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몸담고 있는 동아리에 학생의 경지를 넘어선, 고도의 문학성을 지닌 여학생이 있었다. ‘여학생’이라서가 아니라 순전히 문학성 때문에 난 그녀에게 접근했고, 문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작금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소설이 있냐는 상투적인 질문을 했을 때, 그녀는 눈을 빛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누구더라... 아 씨, 기억이 안나네. 그 있잖아요, 새, 새....”

3분 정도 테이블에 있는 맥주를 들이키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쳤다.

“맞다, 샐린저! 그 사람이 지은 <호밀밭의 파수꾼>이요!”




집에 돌아간 나는 혹시나 우리집에 그 책이 있나 싶어 여동생의 방을 몰래 뒤졌는데, 있긴 있었지만 무척이나 조악한 해적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난 그 책을 아무런 감흥 없이 읽었다. 만 16세 소년이 퇴학을 당한 뒤 극도의 외로움에 시달리는 내용이 왜 그녀의 인생을 풍요롭게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문학소녀가 좋다고 한 책이라면 뭔가 있겠지 싶어 끝까지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적립금이 남아 살 책을 고르다 민음사에서 나온 동명의 책을 집어들었다. 해적판을 읽어서 감흥이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였는데, 사긴 샀지만 그 책을 집어들기까지는 또 몇 년의 세월이 지나야 했다. 가정이 안정되고 나서 슬슬 탈선이 생각난다는 시기인 결혼 4개월차, 드디어 난 제대로 된 번역본의 <호밀밭>을 읽었다. 해적판과 비슷하게 주인공인 콜필드가 아무한테나 들이대는 걸로 일관된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외로움에 마음이 짠한 적도 있지만, 시종일관 “얘는 왜 이렇게 살까?”란 생각이 더 자주 들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을 엉터리라고 얘기하면서 자신은 더 엉터리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돈도 없어서 여동생의 용돈까지 빌리는 놈이 왜 수녀한테는 10달러나 기부를 하고, 한심하다고 얘기하는 여자들 술값은 왜 내주는가? 수녀 뿐 아니라 택시 아저씨나 호텔 경비한테까지 같이 술을 마시자고 얘기하는 대책없는 콜필드, 나 역시 외로운 시기를 몇 년 쯤 겪었는지라 그런 행동이 공감이 안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이 왜 명작으로 불리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 구절을 보라.

어지러운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택시를 탔다.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택시를 잡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239-240쪽).”

빈번하게 나오는 접속사, 그리고 잘 이어지지 않는 단문의 연속들. 이거 완전히 초등학생이 쓴 일기다. 세계명작을 분류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샐린저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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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리 2008-05-28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이렇게 명작이라고 불리는 책들을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의무가 생기지만 막상 읽게되지 않아서 늘 해야할 숙제같은 기분이 들어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의미가 깊은 책 중의 하나로 꼽는 책 중의 하나라 읽어야할 것 같은 압박감은 많이 느꼈지만 그렇다고 퇴학당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16살 아이의 지리한 독백을 들어줄 자신이 없어서 계속 뒤로 밀어왔는데 마태우스님의 서평을 보니 안 읽기를 잘한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이제 다른 책으로 맘편히 넘어갈랍니다. ^^

마늘빵 2008-05-28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저랑은 감상이 많이 다른데요. ^^ 저는 이거 괜찮았는데. 책은 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읽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 감상은 가지각색이겠죠.

마립간 2008-05-28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데미안이 떠오르네요.

심술 2008-05-28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나서 '왜 명작이지?'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했어요. 사람에 따라 명작이 될 수도 지겨울 수도 있는 그런 작품이예요.

다락방 2008-05-28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태우스님. 저도 이 책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또 다시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고 여기저기 막 밑줄도 그었거든요.

그 애가 죽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내가 그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래도 좋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죽었다고 좋아하던 것까지 그만둘 수는 없는 거 아니야? 더군다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살아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천 배나 좋은 사람이라면 더욱 말이야.(p.228)

이렇게 말하는 홀든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는 홀든이요.

그건 그렇다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나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pp.229~230)


저는 샐린저에게 반해버려서 [아홉가지 이야기]도 [프래니와 주이]도 읽고 말았는걸요. 아프락사스님 말씀대로 감상은 가지각색이죠. 고전이라고 꼭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구요. 게다가 저는 이 작품이 왜 좋은지 모르겠다는 분들을 종종 보았어요. :)

심술 2008-05-28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고도의 문학성을 지녔던 여성분 어떻게 되셨어요? 혹시 작가가 되셨나요?

무해한모리군 2008-05-29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때가 있는거 같아요.. 물론 전 아직 동화책을 좋아해서 종종 읽지만, 어떤책은 아 내가 열세살에 이책을 읽었다면 좀 다른 인간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잖아요.. 가오를 잔뜩 잡던 십대시절에 제게 이 책은 참 좋았습니다.. ^^

마태우스 2008-05-29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진모리님/아, 그렇군요. 책은 시기가 중요하네요... 나이가 들어버려 이 책의 진수를 이해 못하는가봐요 흑흑. 저 어릴 땐 맨날 야구만 보면서 책을 멀리했어요...
심술님/음, 그 여성분은 지금 전공의 과정을 밟고 있지요. 작가랑은 좀 거리가 멀죠?^^
정아무개님/어머나 어디서 많이 본 아이디... 언제 돌아오셨나요? 정말 반갑습니다. 님도 감동받은 걸 보면, 문학성이 뛰어난 분들은 이 책의 진수를 알아보는 듯합니다
다락방님/오오 역시 문학성이 뛰어난 다락방님...!! 인용하신 문구 중 위의 것은 저도 좋다고 보는데요, 아래 것은 별반 감동받지 않았는데요, 왜냐면 그게 평소에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동생의 추궁에 즉흥적으로 지어냈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하여간 댓글 감사드려요 꾸벅.
그리고 심술님/님과 저는 읽어야 할 타이밍에 이 책을 읽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마립간님/아...저 데미안도 안읽었는데.. 좀 젊은 알라디너 분이 제게 보내주셔서 읽어야지 하다가 몇년이 갔네요.
아프님/안녕하셨어요. 이 책을 매개로 님과 이렇게 대화를 하게 되네요. 제가 좀 어려울 때 다시 읽어보면 그땐 다른 느낌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갑자기.
카프리님/어어...저는 다른 분들 댓글 보면서 제가 뭘 잘못했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님은 제 글에서 위안을 받고 가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