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학생 때, 응급실은 개판 5분전의 시장이었다. 환자들은 아프다고 아우성이고, 보호자는 오지 않는 의사를 기다렸다. 하다못해 침대라도 차지하고 눕는 것도 그곳에선 호사였다. 수요에 비해 공급은 딸렸고, 입원을 빨리하는 수단으로 응급실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진짜 있어야 할 사람들이 자리가 없다고 내쫓겼다. 게다가 의료 인력은 전부다 갓 졸업한 인턴이라 해줄 게 그다지 많지 않았고, 조금 해보다가 “레지던트 선생님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 뒤 가버리는 게 고작이었다.


기술적 한계가 있다는 것 외에도 인턴들의 문제점은 또 있었다. 뚜렷한 사명감이 없다는 것. 응급실은 그저 한번 거쳐 가는 곳이었을 뿐, 자신의 발전과는 큰 관계가 없었으니까. 24시간 근무에 24시간의 스케쥴은 의사로 하여금 늘 졸음에 시달리게 했고, 그 피로는 아파 죽겠다는 환자의 호소에 초연하도록 만들었다. 의사를 찾으러 모 병원 인턴실 문을 열었을 때, 난 인턴들이 카드를 치고 있던 광경을 지금도 기억한다. 인턴 얘기는 아니지만, 다른 병원에 갔을 때 이런 일도 있었다. 정형외과 레지던트에게 연락이 왔다. 아이의 손가락이 잘려서 어머니가 울고 있다고. 전화를 받은 레지는 “알았다”고 한 뒤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안 가보셔도 되요?”라고 내가 물었을 때 레지는 뭘 그깐 걸 가지고 그러느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이따가 가서 붙이면 돼.”

그 레지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울고 있던 그 어머니를 직접 봤던 난 그 의사의 의연함이 의아하기만 했다. 그 어머니는 필경 TV에서 응급 상황의 의사들이 하는 것처럼 한시라도 빨리 아이의 고통을 덜어 주길 바랐으리라.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 여섯명의 인턴이 근무하도록 배정을 줬는데, 자기들끼리 꾀를 낸 인턴이 4명만 근무하고 나머지 두명이 놀도록 스케쥴을 다시 짰다. 하루만 놀면 어차피 다음날은 휴일이니 2박3일간 어디 놀러갈 수도 있었고, 실제로 외국에도 다녀온 의사가 있단다. 늘 환자로 넘쳐나는 병원 응급실의 비명소리에 그들은 그렇게 무감각했다. 그래서 난 아는 사람이 응급실에 가보면 어떻겠냐고 물을 때마다 “거기 가면 골병든다”고 극구 만류했다.


그러다 응급의학과가 생겼다. 사명감 없는 인턴들 대신 응급상황만을 전문으로 하는 노련한 의사들이 이제 응급실을 지킨다. 거기에 ‘응급의학과’를 표방하는 교수가 근처에 대기하며 레지던트 수준을 넘는 어려운 상황을 해결한다. 의학에서 과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그리 탐탁치 않아했지만-전문화의 반영이자 또다른 수요창출로 읽혀서-응급의학과의 신설은 두손 들고 환영해 마지않을 일이다. 얼마 전 응급실에 갔을 때, 가슴에 ‘응급의학과’란 레테르를 새긴 의사들의 말은 정신이 혼미했던 내게 안도감을 심어줬다. 그들의 멋진 진료 덕분에 난 열이 내렸고, 그날밤은 다행히 편히 잘 수 있었다. 비록 그 다음날 열이 다시 올랐고, 어제 역시 고열로 인해 하루종일 누워만 있었지만, 지금까지와 달리 앞으로는 무슨 일만 생기면 응급실로 달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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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2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7-04-02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응급실 간 적은 없어요. 천만다행으로. 건강의 상징이던 마태님이 이렇게 편찮으시다니. 맘이 아픕니다. 어서 쾌차하시길 빕니다. 이 기회에 술 끊..지는 못하더라도 줄이셔야겠어요. ;;;

무스탕 2007-04-0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급실이라 하면 지성이 어려서 뛰어갔었던적이 1번, 올해 초에 엄마때문에 1번 갔었는데 매번 나쁜 기억은 없었어요. 제가 운이 좋았던건가요?
글고... 아마 이제 많이 들으실 이야기겠지만...
이 기회에 술 끊..지는 못하더라도 줄이셔야겠어요 2

로쟈 2007-04-02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들이 들으면 좋아할 얘기네요(응급의학 레지던트를 하고 있습니다)...

2007-04-02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4-02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7-04-02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닥터스를 보았는데 응급 의료학과 얘기 나오더라구요. 전 방송으로봐도 눈물 나던데 보호자와 환자는 오죽하겠어요. 크흑..ㅠ.ㅠ

모1 2007-04-02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급실 가본적은 없는데 예전에 병원 25시인가에서 응급실 나오는데 정말아비규환이더군요. 아픈사람도 있고 술취해와서행패부리는 사람등등...장난 아니더라구요.

마태우스 2007-04-02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1님/병원25시 그거 실화드라마인가요? 지방 쪽은 싸우다 다친 조폭이 많이 온다는....
마노아님/그렇죠... 진짜 눈물나죠...아프면 서럽다는 걸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어요...
속삭님/그래도 제가 약간의 보탬은 되었군요 호홋
로쟈님/동생들이라면 최소한 두분 이상이 응급의학 레지던트??
무스탕님/아마도 님은 응급의학과 생기고 나서 들어가신 것 같아요... 그 후엔 훨씬 나아졌으니깐요
달밤님/시러요 우리 대작해야죠!!
속삭님/거기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잊고 새출발합시다!

2007-04-03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쾌한 2007-04-03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닥토닥. 아프면 이렇게 많은 분들이 걱정하시니 '최소한만' 아프셨으면 해요. ^^

Mephistopheles 2007-04-03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두번 가봤습니다..공교롭게도 다 술 때문에요..^^

모1 2007-04-03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는데 병원 25시 리얼다큐예요. 드라마 아니구요. 인간극장처럼 카메라 들고 따라다니면서 취재하는~~~. 일주일에 한번씩 했는데 매회 등장인물들이 바뀌죠. 그러다 어느날 응급실을 주제로 1시간 보여줬는데 그때보았어요. 사고로 들어오는 사람은 그렇다쳐도 말씀대로 싸우다 들어온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술만먹으면 응급실와서 돌려보내는데 아주 난감하다고 하더라구요.

비로그인 2007-04-03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급의학과.. 응급실에서 찬밥 신세였던 적이 있던 사람에게는 정말 반가운 이야기네요.

마태우스 2007-04-04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제가 간 병원이 특별했을 수도 있지만, 요즘 많이 나아진 건 사실일 거예요.
모1님/제가 입원했을 때도 술취한 여자분이 한분 오셨었죠.. 글구 조폭들 오면...의사도 무서울 거예요...
메피님/아앗 그래서 님이 요즘 술을 안드시는군요!
유쾌한님/그러겠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