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이 스타덤에 오른 <취권>은 내가 중학교 1학년이던 79년 9월에 개봉했다. 그 영화는 무려 5개월 동안 상영하면서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서울관객 90만을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내 기억이 맞다면, 십여년이 지난 뒤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에 의해 깨졌다. 그때 취권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는데, 당시 신문광고에는 이런 선전문구가 실리기도 했다.
‘취권을 보기 위해 서둘러 머리를 깎으신 6학년 여러분...’

그 해 겨울, 난 친구와 함께 취권을 봤고, 짜장면을 먹고 집에 갔다. 어린 애들이 다 그렇듯 난 이 영화를 보고나서 한동안 무술흉내를 냈고, 젓가락 같은 걸 집을 때도 무술의 초식을 구사하는 것처럼 생쇼를 했다.


 

당시 다른 극장에선 <사형도수>라는, 역시 성룡이 주연한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취권의 위세에 눌리긴 했지만 그 영화도 무려 55만의 관객을 불러 모았는데, 국산영화는 10만, 외화는 30만 정도가 들면 대박이었던 시절인 걸 감안하면 성룡 혼자서 140만의 관객을 동원한 건 거의 신화적이라 하겠다. <취권>을 보기 위해 돈을 탄 것만 해도 엄마에게 죄송했기에, <사형도수>까지 볼 염치는 내게 없었다. 두 개를 같이 본 친구들은 “둘 다 재밌다.”며 내 염장을 질렀는데, 그 이후 성룡이 나온 영화는 죄다 봤지만 <사형도수>는 오래된 빚으로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오늘 밀린 잠을 자려다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니 마침 <사형도수>가 막 시작하는 중이다. 난 잠자는 걸 잠시 뒤로 보류한 채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소화자 겸 백장천이다


 

27년, 강산이 세 번쯤 변했을 긴 시간이다. 그때 중학생이던 난 지금 마흔살의 배나온 아저씨가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성룡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귀엽다 (피부는 물론 옛날이 좋지만). 영화 내용이야 뭐 뻔하다. <취권>에서 ‘소화자’라는 무술의 고수로 나온 영감이 이번엔 ‘백장천’이란 고수로 나와 성룡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성룡은 사부의 목숨을 구하며 사형권의 멸문을 막는다는 것. 단순한 스토리와 느려터진 액션, 지금 애들이 보면 하품이 나올지 모르지만, <취권> 이후 성룡에게 홀딱 반해버렸던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성룡 신화의 기원이 된 그 영화를 봤다. 거지로 변장한 백장천에게 친절을 베푸는 성룡, 그런 성룡이 맨날 두들겨 맞고 사는 처지란 걸 알자 백장천은 바닥에다 발자국 그림을 그려 피하는 법을 연습하도록 한다. <취권>에서 성룡이 반찬을 집는 걸 소화자가 현란한 젓가락 무술로 방해하는 장면이 나온다면, 이번 영화에서 백장천은 사기로 된 밥그릇을 안 뺏기는 묘기를 선보인다. 컴퓨터 그래픽 같은 건 생각도 못했을 테니 다 진짜일 터, 그때 이걸 봤다면 아마 집에서 그릇 깨나 깨먹었을 것 같다.


<사제출마>, <소권괴초> 등의 영화로 명성을 이어나가던 성룡은 <폴리스스토리>를 계기로 현대적인 이미지로 탈바꿈하고, <용형호제>부터는 아예 세계를 무대로 한 대작을 만든다. 그 영화를 찍다가 성룡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침으로써 몇 달간 누워만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는데, 다행히 다시 일어나 ‘007에 맞먹는다.는 평까지 들은 <용형호제 2>를 비롯해 웃다가 죽을 뻔했던 <시티헌터> 등의 ‘명작’들을 내게 선사해 줬다. 그러고 보면 나는 사춘기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성룡과 더불어 살아온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꼭 봐야 할 명작’들을 안보고 성룡 영화나 봤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성룡 영화는 남는 게 없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였는데, 심지어 난 내가 영화평을 못쓰는 걸 성룡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적반하장이란 건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다.


내가 식상한 탓인지 성룡이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2000년대 이후 성룡의 영화들은 재미가 좀 덜해졌다. 그럼에도 내가 <턱시도>나 <러시아워 2>같은 범작들도 꼭 극장에서 봐주는 이유는 물론 성룡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지만, 잠시나마 성룡을 미워했던 나 자신에 대한 반성도 있다. 27년이 지났건만 성룡은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고, 올해 개봉했던 ‘BB 프로젝트’는 다행히 예전에 느꼈던 재미를 듬뿍 담고 있었다. 만년소년 성룡이 언제까지 영화를 만들지 모르지만, 성룡이 나오는 영화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볼 생각이다. 성룡은 그 이름만으로 날 극장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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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1-25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언젯적 기억인지... 저도 <취권>이나 <사형도수> 같은 영화들을 다 봤었지요.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도 성룡 영화의 열혈팬인지라 "난 내가 영화평을 못쓰는 걸 성룡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는 건 (자인하시는 대로) 둘러대기십니다.^^

또또유스또 2006-11-25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때 성룡 영화 안보면 간첩이었답니다..
늘 자막 올라가며 보여주는 그 엔지 잠면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님도 저도 벌써 20 여년을 그와 함께 했네요...
어머 화들짝... 전 성룡 아자씨를 러시아워 할때 알았쪄요.. (음.. 안웃기시죠? 압니다 흑..)
저도 성룡영화는 늘 극장에서 봤어요..^^


마태우스 2006-11-25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흐음, 정성일님도 오래된 성룡 팬이군요. 어제 시네21에서 <길>에 대한 9페이지짜리 정성일님 감상문 읽었어요. 무슨 말인지 당연히 모르겠더이다^^ 하여간 지금은 그런 둘러대기 안합니다^^

마태우스 2006-11-25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스또님/러시아워라면.... 상당히 후기 작품이군요. 역시 님과 전 다른 세대...수암님하고 놀아야겠다...

Mephistopheles 2006-11-25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머리가 커서 취권을 보고 화들짝 놀랐었어요...그 영화에서 성룡이 맡았던 역활이
바로 "황비홍"이라는 사실을 알고요..^^ 실제인물 황비홍..그러니까 이연걸이 연기를
한 황비홍과 동일인물이더라구요.. 그건 이연걸의 황비홍 시리즈 중에 "철계투오공"
이라는 영화에서 황비홍이 이런 대사를 하더라구요..
"내 각은 무영각이고 권은 취권이다..아버지가 술을 먹지 말라고 한 이유는 내 권이
너무 강하여 사람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라고요..^^

성룡...이소룡...로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비로그인 2006-11-25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세대가 홍콩무협영화 관람 1세대이지요.
취권등 권격영화이전에는 검법, 장풍의 시대였지요.
왕우, 로레등이 스타였답니다.


모1 2006-11-25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v에서 하는 취권 본적이 있어요. 잘 기억 안나지만 비틀거리면서 상대방과 싸우던 것만 기억나네요. 줄거리는 전혀 몰랐는데..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참고로 저희 아빠도 성룡좋아하세요. 저는 그냥그냥..

hnine 2006-11-25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학교 1학년때 '취권'보고 성룡에 빠져 한참을 고생(?)했습니다 ^ ^

전호인 2006-11-2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도 유선방송에서 성룡의 취권을 하더이다. 엊그제도 잠시 채녈을 돌리다가 나온 듯 한데..... 울 아들이 빡쎄게 좋아한답니다. ^*^

paviana 2006-11-25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고3때 야자 땡땡이치고 성룡영화보러 갔다가 동생한테 들켰던 적도 있어요..
제가 최초로 전신브로마이드를 방에 붙여놓은게 성룓입니다.^^

짱꿀라 2006-11-26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소룡의 무술영화와 성룡의 무술 영화 정말 짱이죠. 저도 크면서 많이 보고 자란 세대랍니다. 근데 마태님. 영화 너무 좋아하시는가보네요. 평을 이렇게 잘 써주시니.......
그것도 재미나게요. 잘 읽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마태우스 2006-11-26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아앗 제가 영화평을 잘쓴다구요? 절대 아닌데... 하여간 님과 제가 같은 세대라는 걸 알게되어 반갑습니다
파비님/오오 전신누드 브로마이드라니.... 저도 보고 싶군요^^ 글구 동생한테 걸리면 뭐 어떤가요^^
전호인님/아들이 올드한 영화에 취향이 있으시군요^^
hnine님/그죠? 근데 그게 고생이 아니라 즐거움 아닌가요^^
모1님/님과 저는 세대가 틀려서 그런가봐요 옛날엔 그런 식의 유머가 아주 잘 먹혔답니다^^
한자님/제가 이소룡을 초딩 때 봤는데요, 영화가 좀 무섭단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취권은, 너무 친근하게 다가와서 절 사로잡았죠. 왕우에 대해선...별반 좋은 감정은 아니어요. 원표, 홍금보는 좋아하지만.
메피님/나중에야 이소룡이 일찍 죽은 걸 안타깝게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런 요절이 이소룡을 신화로 만든 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성룡도 신화의 반열이라 생각하지만요.

산사춘 2006-11-2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라더랑 밥상머리에서 맨날 젓가락 무술 하다가 디지게 혼나고 그랬시유.
글고 BB프로젝트에 원표도 나와서 넘 반갑반갑~
성룡이랑 원표랑 홍금보랑 엎치락 뒤치락 하는 영화들 넘 그리워요.

마태우스 2006-11-28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흐음...역시 님은 귀엽습다^^ 님과 제가 똑같이 주성치를 좋아하는 걸 알았을 때 어찌나 반갑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