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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질이의 안데스 일기 -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며 쓰다
오주섭 지음 / 소소의책 / 2024년 12월
평점 :
이쯤 되면, 이 책이 가진 반전을 충분히 맛보았다고 해야겠다. 소설도 아닌데 웬 반전이냐? 제목이자, 저자의 닉네임이 바로 반전이라 하겠다. 모질이 하면 떠오르는 건 모자라다는 것인데,(근데 이마저도 반전이다. 이 모질은 세월이 육신은 늙게 하지만 정신은 지혜로워진다는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耄耋) 깊이가 있어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깊이가 있다. 여행 에세이라 하지만, 철학 혹은 인문학 혹은 동양 고전 혹은 세계사 등 여러 권의 책을 한 번에 읽은 기분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진도가 훅훅 나가지 않는다. 역시 빽빽한 글자와 무게감이 그냥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을 내기 전에 남미를 세 번 다녀왔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여행을 이 책으로 기록했다. 2013년 3월 인천을 출발하여 페루와 볼리비아, 칠레, 파타고니아, 아르헨티나, 브라질에서 다시 인천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사진은 소심(그미, 소심하다는 뜻이 아니라 본디 지니고 있는 마음이라는 뜻이란다. 素心) 이, 글은 모질이 썼다. 책 안에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하며 등장하는 내용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기간으로 다지자면 한 달이 채 안 되는 28일간의 여정에서 이 책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여행 에세이를 좋아한다. 직접 가는 여행이 제일 좋지만, 몸과 마음이 편한 걸로 따지자면, 간접 여행이 최고가 아닌가?! 근데, 이렇게 다방면으로 서술이 길고 각종 곁가지가 많이 등장하는 책은 처음이다. 물론 주된 여행 여정과 연결되긴 하지만, 돈키호테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저자의 박식함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아빠가 읽었던 태양의 아들 잉카라는 책의 제목이 내게 꽤 선명한 기억을 선사해 주었는데, 그 후로 잉카라는 단어는 꽤 오래 나를 사로잡았다. 한비야의 여행기에서도 만났고, 가수 3명이 여행한 프로그램에서도 다시 한번 만났다. 그리고 이 책에도 등장한다. 잉카 유적을 만나려면 꼭 가야 하는 쿠스코와 마추픽추가 초반에 등장한다. 당연히 고산지대이기에 고산병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책 안은 물론 책 밖에도 등장할까? 여기까지 가서 빼놓으면 서운한 나스카 라인 이야기는 공포스럽지만, 웃겼다. 가이드의 말도, 엄청난 멀미를 유발하는 비행기도... 역시 간접 여행이 최고다 싶다. 잉카문명의 유적 안에는 다양한 가치들이 곁들어있다. 세계사는 기본이고, 네루다의 시도 등장한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윤동주의 시, 영화 미션, 장윤정의 초혼도 등장한다. 식견이 짧아서 저자가 어디라고 출처를 정확히 밝히지 않은 것은 어디 등장하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다른 색으로 구분을 해준 부분이 상당하다는 것만 이야기해본다.
또 기억에 남는 곳은 단연 우유니 사막이다. 책 안에도 정말 화질 좋은 사진들이 여럿 등장한다.(소심의 사진은 정말 책과 찰떡궁합이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여행기들은 앞으로의 여행을 떠날 후배 여행가들을 위한 팁도 있지만, 그보다 더 깊은 생각의 뿌리들에 더 가깝다.
책을 읽으며, 아는 만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행을 위해 공부 또 공부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 익히고 체화한 것들이 이렇게 쏟아져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에 꽤 깊은 공부가 되었던 여행 에세이였던 것 같다. 현재의 역사의 순간들도 이 책 안에는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래서 더 느끼는 바가 많았던 것 같다.
p. s 유식. 박식. 한자 이런 말에 부담을 느껴서 이 책 마주하기를 피하지는 않길... 중간중간 저자만의 위트가 더 많이 담겨있어서 꽤 흥미로운 여행 에세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