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에는 늘 두려움이 따르니까.
하지만 좋은 시도와 시작이었음을 잊지도, 잃지도 말자."
직업에 수명이 있다? 내 직업에 수명을 알려준다? 신기하고 신선한 소재였다. 장편소설이지만, 단편소설 같은, 때론 연작소설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었다. 주인공 송세린은 11년차 무명 연극배우다. 얼마 후 발표될 결과에 기대를 모으고 있었지만, 후배가 캐스팅된다. 정말 재능이 없는 것일까? 속이 상한 세린은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우연히 마주하게 된 기대 수명 시네마. 직업의 수명을 보여준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상영되는 작품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세린은 재연배우를 찾고 있다는 말에 감정적으로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선다. 세린에게 주어진 일은 색이 이상한 카드의 주인공의 삶을 살아서 카드의 원래 색을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세린은 그렇게 카드 속 주인공의 삶을 찾아간다. 시네마의 주인공은 다 달랐다. 퍼스널 환경 진단 전문가인 반린아, 헤드 큐레이터인 신건우, 파티시에 신연우, 비행사 권기옥, 아나운서 최은효...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좌절과 포기를 경험했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잘나가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들 또한 고통스러운 삶의 여정을 겪었지만, 포기하고 낙오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 다시 일어났고 자신만의 능력을 깨달았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 권기옥과 연관이 있던 심덕희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미 사망했고, 오래전 이야기인지라 네임카드의 색은 탁하디 탁했고, 연수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두기에는 뭔가 안타까움이 있었던 세린은 권기옥의 기억을 토대로 덕희를 찾아낸다. 1919년 3월을 앞둔 겨울. 일제의 감시는 심해져 가고, 여학생들이 모여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덕희는 무서웠다. 자신의 눈앞에서 일본 경찰에게 구타를 당해 사망한 아버지와 끌려간 언니의 모습을 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 덕희에게 조국의 독립은 먼 일이었지만, 하나의 꿈은 있었다. 친구인 기옥이 비행사가 되는 꿈이었다. 과연 덕희의 꿈은 이루어졌을까? 그리고 덕희는 자신의 직업명을 찾을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제일 와닿았던 부분은 HBS 전직 아나운서인 최은효와 아들 권은율의 이야기였다. 엄마의 꿈을 찾아 나선 아들 은율. 그리고 자신의 꿈을 잊고, 우울감에 빠져버려 네임카드도, 수명도 완전히 잃어버린 엄마 은효. 잘나가는 아나운서 은효는 언제부턴가 방송에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은율을 임신하고부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은효는 아나운서를 내려놓고 오로지 은율의 엄마로만 살아간다. 우연히 갔던 기대 수명 시네마에서 잘나가는 여성의 삶에 대한 영화를 본 후 은효의 눈빛은 빛을 잃었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눈빛을 먼저 알아챈 것은 아들 은율이었다. 은율은 다시 기대 수명 시네마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은효의 삶의 DNA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의뢰자가 은효가 아닌 은율이었기 때문이다. 세린과 마호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여러 사건으로 휴직을 신청한 리나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과연 기대 수명 시네마 직원들은 은율이 원하는 영화를 개봉할 수 있을까? 은효는 다시금 눈빛을 찾을 수 있을까?
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고민과 걱정, 좌절 속에 살고 있다. 빛나는 누군가의 삶을 보고 동경하기도, 그와 비교하며 내 삶을 비난하기도 한다. 과거 엄마가 아들에게 이야기해 준 이야기는 다시금 아들에 의해 엄마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이 말이 그 어떤 말보다 와닿았다. 지금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그 누구라도 이 말에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다.
"각자의 생장점이 다르기 때문이야.
어떤 씨앗은 더 많은 햇빛이 필요할 수도, 어떤 씨앗은 물이 덜 필요할 수도 있어.
모두 같은 방법으로 성장할 순 없거든."
"그럼 얘네는 어떻게 해야 해?"
은율은 씨앗이 잠들어 있는 땅을 가리켰다.
"믿고 기다려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