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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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하다. 무척 신선했다. 이런 구성을 가진 책을 처음 만나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당혹스럽다. 진실이라 생각했던 사실이 진실이 아니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실제가 아닌 소설이었기에 반전이라는 단어로 대체될지도 모르겠다. 트러스트(trust)는 우리가 잘 알 듯이 신뢰를 뜻하는 단어이다. 근데, 이 책을 읽은 후 찾아본 trust에 신탁이라는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뢰도 되겠지만, 책 속 금융업을 하는 주인공 벤저민 레스크(앤드루 베벨)의 직업을 이야기하기도 하겠다 싶기도 하다. 과연 둘 다에 trust가 붙는 게 맞는가 의문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신선한 구성을 먼저 언급해야겠다. 어찌 보면 이 또한 반전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구성이 스포일러 일지도 모른다. 총 4개의 글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해럴드 배너가 쓴 소설 채권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앤드루 베벨이 쓴 나의 인생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이고, 세 번째는 앤드루 베벨의 자서전을 대필한 아이다 파르텐자가 쓴 회고록을 기억하며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밀드레드 베벨이 쓴 일기 선물이다. 넷 중 세 개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를 찾았는가? 바로 "베벨"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모든 이야기는 금융가이자 큰돈을 움직였던 사람 앤드루 베벨과 그의 아내인 밀드레드 베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였다. 첫 번째 작품이 소설이기에, 등장인물의 이름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긴 하다. 앤드루 베벨은 벤저민 레스크로, 밀드레드 베벨은 헬렌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네 개의 이야기가 다 같은 사람을 등장시키니 내용이 같을까?

글쎄... 글은 누구의 입장에서 기록되었느냐에 따라 같은 내용도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록되기 때문에 시점의 차이를 넘어서, 이야기의 전체적인 맥락이 달라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듯싶다.

유력한 집안의 아들인 벤저민은 아버지를 잃고 또 얼마 안 되어서 어머니를 잃는다. 타인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어려워하는 그였지만, 돈을 굴리는 데는 출중한 능력과 운이 따랐다. 그래서 가진 돈이 마치 풍선인 듯 부풀고 또 부풀어 오른다. 돈이 많아지고, 금융가에서 유력한 사람이 되어감에도 그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일을 좋아하고, 잘할만한 비서를 통해 일을 처리한다. 벤저민은 자신의 돈을 자랑하는 것도, 값비싼 물건을 구입해서 치장하는 것도 즐기지 않지만 비서가 그 일을 잘했기에 비서인 셸던 로이드가 한껏 부를 과시하게 되면 그의 주인인 벤저민은 얼마나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지가 간접적으로 표현되었기에 나름 만족한다.(최소 이 정도의 머리는 있으니 그 모든 사업을 통해 돈을 부풀릴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돈을 불렸던 그는 다음으로 생각한 일이 있었다. 바로 결혼이었다. 가문의 명성은 있지만, 돈은 없었던 처가 브레보트 가문의 딸인 헬렌을 아내로 맞는다. 헬렌은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 이후 1907년과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위기를 마주하게 되는데, 과연 벤저민은 자산을 지킬 수 있을까?

두 번째는 앞 이야기의 주인공인 벤저민의 실제 모델인 앤드루 베벨의 자서전이 등장한다. 베벨 가문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이 이 모든 위기를 어떻게 넘겨왔고, 자신의 아내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앞 이야기에서 좀 부정적인 형태로 등장했던 자신의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바로잡고자 노력한다고 해야 할까? 연이어서 등장해서 그런지 자신의 삶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또 미화해서 해석하는 분위기가 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서전 대필 작가 아이다 파르텐자의 글에서는 앤드루 베벨의 자서전에 차마 담을 수 없었던 앤드루의 실제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대필 작가인 그는 사실 앤드루의 비서였다. 어쩌면 세 개의 이야기 중 앤드루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이야기가(그래서 더 실제적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많지만, 문제는 그 또한 아이다 파르텐자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쓰인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과연 네 번째 앤드루의 부인인 밀드레드의 일기에서는 앤드루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세 개의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진 앤드루의 이미지가 어떻게 달라지는 지가 가장 큰 흥미이자 반전이라 할 수 있겠다.

부유하고 성공한 금융가의 이야기. 과연 이 이야기의 승리자는 누구일지, 조금은 딱딱한 주제의 이야기지만, 한 인물이 각자의 시선을 통해 어떻게 왜곡되어갔는지에 방점을 두고 읽는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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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노 도미노
온다 리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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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장편소설 도미노. 최근 후속작이 나왔던 터라, 정주행을 시작했다. 첫 장부터 혀를 내둘렀다. 사실 일본 작가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힘든 이유가 등장인물의 이름이 헷갈리기 때문인데, 그러다 보니 책을 읽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따로 적어놓는다. 다행이라면 도미노의 등장인물과 주요 대사가 먼저 소개된다는 것이다. 근데 등장인물이 끝이 없다. 앞뒤로 빽빽하게 4페이지에 걸쳐 등장인물(28명)이 나오니 말이다. 도대체 이 책에 왜 이리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걸까? 역시 읽다 보면 그럴만 하구나! 싶다. 초반에는 정신이 없다. 이 사람 저 사람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고 앞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 중반부는 지나야 했다. 거기다 두 페이지 가득 담긴 도쿄역의 지도. 등장인물만큼이나 복잡하다. 입체감 있게 읽기 위해서 + 좀 더 장면을 이하 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니 한 번씩 앞장으로 건너오는 것도 좋겠다.

도쿄역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여러 사건과 인물이 등장한다. 15년 전의 소설이라고 하니, 지금과 형편이 다르긴 하다. 마감을 앞두고 탄 기차에서 발생한 사고로 입금이 지연되어 전체 지점이 패닉 상태에 빠진 간토 생명의 이야기와 함께 어떻게든 입금을 받기 위해 과거 인맥을 동원해 오토바이 추격전을 벌이는 이야기와 간식을 사러 갔다가 졸지에 범죄자로부터 시한폭탄을 받게 된 이야기가 연결된다. 배우를 꿈꾸는 아이 아유카와 마리카는 상대 오디션 참가자의 엄마가 건넨 설사약이 담긴 음료를 먹고 배탈이 나지만, 전화위복으로 결국 오디션에 합격된다. 그 밖에도 사촌동생의 여자친구를 떼어내기 위해 새로 생긴 애인 역할을 하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와 호러 동호회의 회장이 되기 위해 영화를 보는 대학생들이 자신들이 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을 우연히 마주치기도 한다. 넓디넓은 도쿄 역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이며 사건이 일어난다. 각기 다른 이야기 같지만, 이렇게 저렇게 연결되다 보니 결국은 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고 할까? 다행이라면 얽히고설킨 이야기가 아주 우연히 그 시간에 그렇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모든 끈을 완벽하게 연결한 작가의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처음에 도미노란 제목과 작품이 어떤 연결이 있을까 싶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우선 작품 속에서도 혼잡하고 많은 사람들로 인해 도미노처럼 덮친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 일로 인해 독약을 먹었던 여성의 복부의 힘이 가해져 자동으로 약을 뱉어내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작품을 읽고 보니 차곡차곡 쌓인 첫 번째 블록 하나가 넘어지면 자연스레 다른 블록까지 넘어지는 게 바로 도미노이듯, 도쿄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꼬리가 되고 또 꼬리가 되면서 작품 속 이야기가 전개되기에 그런 제목이 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신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가 마치 도미노이자 뫼비우스의 띠처럼 느껴지도 하는 온다 리쿠만의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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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동건 지음 / 델피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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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우린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를 흥미롭게 읽었다. 근데 끝이 뭔가 아쉬웠다. 워낙 열린 결말로 끝나는 작품들이 많으니, 아쉬움을 뒤로하고 책을 덮었다. 근데, 후속작이 등장했다. 반가웠다. 애매한 끝이 이번에는 제대로 된 결말을 맞이하겠구나! 싶어서였다.

소리 소문 없이,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살인을 하는 살인 병기 박종혁. 대천이라는 대기업의 회장 김필정의 아들 김태수를 죽인 것을 시작으로 그는 김필정의 사주를 받는다. 그리고 연결된 정치검사 이진수. 일개 검사가 어마어마한 일을 벌이고 있다. 킹 메이커라고 해야 할까? 평검사임에도, 그와 연결되지 않은 인사들이 없다. 그리고 그의 계획은 100%에 가까울 정도로 실행률이 좋다. 한 수 뿐 아니라 몇 달 후 이루어질 일까지 예측하고 그에 대한 방비를 해둔다. 이 정도면 점쟁이급이 아닐까? 김필정에 이어 다선 의원인 김성국까지 살해한 박종혁은 이진수에 의해 해외로 떠나게 된다. 돈도 원하는 대로 받았음에도 박종혁은 늘 불안하다. 이진수가 자신의 목숨을 노릴 때가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진수가 자신을 죽이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나서야 한다. 한국에 들어온 박종혁은 이진수를 같이 칠 힘 있는 정치인을 찾기 시작한다. 그 시기에 이진수는 어르신이라 불리는 정치인 3인방을 감옥으로 보내버린다. 그들의 비리가 까발려지고, 당은 급속도로 힘을 일어가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다음 대통령으로 최성진을 선택한 이진수는 최성진을 조종하기 시작한다.

이진수를 쳐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최창길과 이원택을 만나는 박종혁. 협박 아닌 협박으로 우선 이진수를 가둬두라는 말을 남긴다. 이원택은 워낙 몸을 사리는 사람이기에 박종혁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발을 뺐지만, 최창길은 박종혁의 말에 넘어가서 이진수를 가둔다. 하지만, 이미 박종혁이 자신을 배신할 계획까지 생각하고 있던 이진수는 최성진을 시켜 박종혁을 협박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진수가 시킨 모든 죄는 철저히 최창길에게 뒤집어 씌워졌고, 그 일로 최창길은 구속된다. 결국 최창길은 감옥 안에서 자살까지 하게 된다. 이진수가 벌인 일이었다. 그 모든 수를 알고 있던 이원택은 최창길의 장례식장에 나타난 이진수에게 더 이상 올라오지 말라고 강하게 협박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번 편의 주인공은 박종혁이 아닌 이진수였다고 볼 수 있다. 책 속에 이루어지는 모든 이야기는 그의 계획을 넘어서는 게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작은 균열 하나가 결국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는 말이 이 작품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과연 그 균열은 무엇일까?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뭔가 또 아쉽다. 긴장하며 읽고 읽었는데, 중반부 즈음에서 주인공이 급 사라진다. 당연히 짜잔! 하고 나타날 거라 생각했는데 하하....;;;그리고 끝도 뭔가 급하게 맺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악의 축이 좀 더 철저히 망가지기를 바랐지만 말이다. 반전이라면, 어쩌면 주인공 박종혁 보다 더 주인공 같은 이진수의 과거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점?이라고 할까? 더 이상의 후속작은 없을 듯싶다. 아니, 외전 식으로나 프리퀄 식으로 이진수의 좀 더 제대로 된 과거 이야기나 진짜 이진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도 흥미로울 듯싶다. 이 책에서 다룬 한 장의 이진수의 과거는 뭔가 아쉬우니 말이다. 끝까지 악이라 생각했던 이진수의 나름 풋풋했던 과거를 들여다보니 그 모든 시작은 복수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물론 그 복수가 어떤 면에서는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복수를 위해 자신 또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으니 복수는 결국 또 다른 복수로 끝났다고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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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오는 건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야
아오야마 미치코 지음, 이경옥 옮김 / 빚은책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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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이가 든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긍지를 갖도록 살고 싶어.

그때가 좋았다고 탄식만 하지 않고 상자 속에 있는 젊은 나를 당당히 마주할 수 있도록."

월요일 말차 카페에 이어 두 번째 만나는(사실은 세 번째인^^) 아오야마 미치코 작가의 책이다. 전작의 특이한 형태의 연작소설을 읽고 흥미로웠는데, 이번 작품은 제목에 차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코코아, 말차처럼), 표지의 그림처럼 카페에서 이루어진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번에도 연작소설의 형태인데, 주된 주인공들이 있고 그 주인공들과 연관된 이야기가 이어진다.

1년 교환학생으로 호주 멜버른에 도착한 타치바나 아카네는 낯선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나름 영어를 잘하는 편이라 생각했지만, '우물 안 개구리였나.' 싶을 정도로 의사소통이 술술 되지는 않았다. 거기다 호주에서 일본인으로 사는 것, 특히 알바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같은 곳에서 알바를 하는 9살 연상의 유리 씨가 있지만, 썩 호감이 가지 않는다. 우연히 초대받은 바베큐 파티에서 만나게 된 엔조지 스우는 자신을 부(Boo)라고 소개한다. 부는 아카네를 레이라고 부른다. 부의 부모님도 일본인이었는데, 10살에 호주로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고 미술상을 경영하고 있다. 외로운 타지에서 만난 부는 의외로 레이와 잘 맞는 상대였다. 조금씩 부에게 호감 이상을 느끼는 레이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바베큐 파티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이 부가 선수라는 말을 했기에 레이는 더욱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1년 뒤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부가 레이에게 사귀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1년 기한부 연애를 하겠다는 말을 한다. 일본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안 남은 날이었다. 부는 자신의 친구가 화가인데, 레이를 그리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한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무척 마음에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장시간이 힘들다면, 에스키스(밑그림)를 그릴 시간 정도라도 괜찮다는 말에 레이는 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날 역시 부를 처음 만난 날 입었던 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가는 레이. 그렇게 화가인 잭 잭슨은 레이를 그리기 시작한다. 자신을 그리는 잭 잭슨 옆에서 그림을 지켜보는 부. 부가 선물로 준 파란색 새 브로치와 빨강 블라우스를 표현하기 위해 두 가지 색을 사용하는 잭. 그리고 부와 레이는 눈이 마주친다. 그들은 과연 1년 기한부 연애를 끝낼 수 있을까?

총 4편의 작품이 담겨있는 책 속에 모두 등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잭 잭슨이 레이를 그린 그림 에스키스다. 사실 그림이 매개가 되긴 하지만, 각 이야기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마지막 에필로그를 읽으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에스키스라는 그림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인 레이와 부가 각 이야기의 주연으로 혹은 조연으로 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그들은 나이를 먹고 있었다.

또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카페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는데, 표지 속 그 그림이 바로 세 번째 이야기의 장소를 담아내고 있었다. 만화가인 다카시마 츠루기는 과거 어시스턴트였던 스나가와 료의 울트라 만화대상 수상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한 잡지사로부터 스나가와와 함께 대담 요청을 받게 된다. 약속한 카페에 도착해서 보니 눈에 띄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을 구입했느냐는 말에 가시 돋친 듯 쏟아지는 주인의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드디어 시작된 대담. 인터뷰를 할수록 괜스레 제자의 성공에 질투가 난다. 자신의 데뷔를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실제 이야기는 참 가슴 아팠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데뷔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제자의 말에 더 속이 상한다. 청출어람의 뜻이 그대로 드러난 상황도 말이다. 자신이 시킨 빨간색 토마토주스와 스나가와가 시킨 파란색의 버터플라이피 처럼 말이다. 인터뷰 후 스나가와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 다카시마. 원래 말이 없던 그가 쏟아낸 말에 비로소 스나가와의 진심을 깨닫게 되는데...

4편의 작품을 읽으며 나 또한 나만의 상상 속에서 작품을 나름 해석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에필로그가 마치 반전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책 속 주된 이야기는 레이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에필로그는 레이가 아닌 타인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누군가의 진심을 제대로 목도하게 된다. 비로소 모든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지고, 모든 감정들이 이해가 되었다. 일방적인 이야기가 아닌 쌍방의 이야기로 말이다. 쌍방의 이야기가 되고 나니, 그 안에 담긴 모든 감정들이 더 선명해졌다. 그러고 읽어보니 이 문장이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옆에 그이가 있어도 사랑이 가면 끝.

거꾸로 그이가 없어도 사랑이 여기에 있는 한은 끝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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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박물관
김동식 지음 / 요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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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해 살아라. 그래도 괜찮다. 아빠도 너를 위해 사니까.

스웨터의 머리 부분에는 얼굴이 아닌 다양한 색상의 공이 담겨있다. 김동식 작가의 소설을 여러 편 읽었는데, 그래서일까? 공을 보자마자 떠오른 이미지는 기묘한 내용 혹은 다중인격의 이야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기묘한 이야기도, 다중인격이라 불리는 이야기도 책 속에서 만날 수 있었지만, 주된 포커스는 인생의 "아름답고","감동적인"이야기들이었다. 선입관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근데 한편으로는 그런 정반대의 기대를 가지고 책을 읽었기 때문에 책 속 이야기가 더 가슴에 박히기도 한 것 같다.

책 속에는 다양한 분량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5페이지 내외의 짧은 초단편부터, 수십 페이지 분량의 단편까지 담겨있는데, 인생 박물관은 그중 한 작품의 제목이다. 우연히 문 닫힌 박물관 앞에서 만난 할아버지 말대로 자신만의 박물관에 들어가게 된 김민서 박물관에서 민서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인생 박물관에서 본 조형물의 내용이 실제로 다음날 펼쳐지자 당황스러운 민서. 그리고 다시 들어간 박물관에서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조형물을 보고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통해 조형물을 없애는 방법을 듣게 된 민서는 자신을 도울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자신에게 부상을 입혔던 김우성에게 부탁을 한다. 하지만 우성이 박물관에 갇히게 되고(실제로는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 우성을 구하러 들어갔다 이번에는 민서가 박물관에 갇히게 된다. 아무리 두드려도 탈출할 수 없는 김우성 박물관을 둘러보며 민서는 우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되는데...

여러 편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데, 아들이 간판에 넣을 조언 한 줄을 달라는 말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변의 교수와 잘나가는 선배들과 견주어서도 꿀리지 않는 한 줄 때문에 고민인 아버지. 친구와 술자리를 가지며 이야기를 꺼낸다. 우연히 옆자리에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한 줄을 이야기하게 되고, 모두의 이야기의 결론 한 줄을 아들에게 보낸다. 과연 그 한 줄은 무엇이었을까?

너무 착하게 살아온 그녀 진수희의 이야기를 읽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유난히 운수가 좋았던 그 하루를 마지막으로 그녀는 세상을 떠난다. 원래는 전날 사망해야 했지만, 저승사자의 명패를 찾아준 공으로 하루를 더 주었다는 말에 수희는 너무 속이 상했다. 하필 그날이 운수 좋은 날(멋진 남자와 미팅 후 애프터를 받음, 팀장으로 승진, 공기청정기 선물을 받음 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운수 좋은 날에 일어난 일들은 모두 수희가 그동안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사실을 저승의 문턱에서 알게 된다. 과연 수희에게는 더없이 운수 좋은 날이 이어질까?

책 속에 등장한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눈물이 핑 돌고, 미소가 지어지고, 가슴이 뛰는 이야기들이었다. '세상에... 잘 됐다... 그럴 줄 알았어... 다행이다...'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주한 작가의 말! 반전 아닌 반전에 정말 "빵"터졌다. 물론 앞 이야기의 감동이 켜켜이 쌓였기에 가능한 한마디가 아니었나 싶다.

소설이지만, 실제 이야기였으면 싶을 정도로 마음이 가는 작품들이 많았다. 호러나 공포 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였기에,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들이 생각날 때마다 따로 적어놨던 것을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봄이지만 여전히 어둡고 추운 마음에 변화가 필요하다면 이 작품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우리의 삶 역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처럼 결국은 웃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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