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의 용이 울 때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2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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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의 두 번째 권은 땅속의 용이 울 때다. 첫 번째 권인 별의 지도는 얼핏 유추가 가능했지만, 땅속의 용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내심 난해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건 아닐까 우려했는데,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싶다. 땅속의 용을 한자로 하면 지룡(地龍)이다. 지룡이 과연 누구일까? 사실 이 생물이 이렇게 불렸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다른 이름으로는 토룡(土龍), 구인(蚯蚓)이라고도 부른단다. 힌트는 지룡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환형동물이다. 혹시 눈치챘는가? 지룡은 바로 지렁이를 의미한다. 혹시 진화론자인 찰스 다윈이 지렁이를 연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이 책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이야기들이 첫 장부터 빵빵 터진다.

도대체 지렁이가 뭐길래 찰스 다윈도, 이어령 교수도 지렁이를 생각하며 연구하고 책을 쓴 것일까? 나 역시 비 오는 날 길을 따라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지렁이를 참 많이도 봤다. 어찌 보면 생태계의 최약자라고 할 수 있는 지렁이 때문에 생태계가 유지된다는 사실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지렁이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약해 보이고, 가장 약하기만 한 지렁이는 그저 자신의 길을 간다. 흙을 먹고 분해하고 배변하고 이리저리 기어다니면서 흙 속에 바람을 불어넣는다. 때론 흙 밖으로 나와서 나뭇잎을 먹고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서 양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기름진 땅에서 식물이 자라나고, 그 식물을 먹고 또 다른 생명들이 살아간다. 지렁이가 묵묵히 살아낸 그 시간이 지금의 우리까지 살게 만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렁이는 약하지만 강하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이어령 교수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담긴 이야기가 펼쳐지며 또 다른 주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20대 당시 마주한 노부부와 자동차 이야기를 비롯하여 아리랑과 한자세대 그리고 한글세대의 이야기, 일본에 대한 이야기로도 이어진다.

20대부터 작년에 별세하기 전인 88세까지 60여 년간 글을 쓴 이어령 교수는 자신을 재수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10년을 단위로 늘 새로운 글과 생각들을 펼쳐놓은 저자의 글을 읽을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지 놀랐고, 조금만 나이 들어도 자신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소위 꼰대가 되는 사람이 많은 시대 속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늘 젊은이의 마인드를 가지고 평생을 살았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 밖에도 채집을 해서 먹고사는 수렵인들과 신석기 농업혁명 이후의 우리들에 대한 비교 글도 기억에 남는다. 그동안 당연히 하루하루 먹고 살 것을 걱정해야 하는 수렵인들의 삶이 현재의 우리보다 더 고달프고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들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왠지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저자의 견해는 달랐다. 물론 저자만의 생각은 아니고, 타인의 글을 인용하며 자신의 생각을 펼쳐 나간다.

수렵 채집인은 인근의 식량 자원이 고갈되면 식량을 찾아 다른 지역을 향해 떠납니다.

우리에게는 고되게 보이는 이동이지만, 그들에게는 소풍을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이 '게으른 여행자'가 도착한 새로운 지역은 식량을 안정적이고 규칙적으로 제공해 주었겠죠.

게다가 이들의 인구는 자연이 마련해놓은 훌륭한 창고의 혜택을 풍족하게 누릴 수 있을 만큼 적절했어요.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느냐, 어디에 기준을 맞추고 사느냐에 따라 삶은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들에게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글쎄... 덮어놓고 그들이 불행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권의 책을 통해 만난 저자 이어령 교수의 글에는 다양한 감정선이 담겨있다. 유머도, 채찍도, 감동도, 그리고 묵직한 눈물도 담겨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의 글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두 번째 한국인 시리즈는 총 6권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남은 4권의 책 또한 이어령 교수만의 한국 문화 이야기가 어떻게 꼬불꼬불 펼쳐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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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기행 1 - 길 위에서 읽는 삼국지, 개정증보판 삼국지 기행 1
허우범 지음 / 책문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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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라는 이름이 주는 묵직한 맛이 있다. 집에 정사 삼국지(진수)도, 황석영 작가 번역의 소설 삼국지(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설)도 가지고 있다. 물론 아직 표지 말고는 펼쳐보지 않았지만 말이다.(이게 바로 내 책이 되는 순간 언젠가 읽겠지...의 폐해다.) 그렇다고 삼국지의 내용을 1도 모르는 건 아니다. 10권짜리 전집은 아니어도, 두 권으로 축약한 책은 읽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삼국지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느냐는 물음에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과거 이문열 번역의 삼국지를 읽다가 2권 초반에 접었던 적이 여러 번이다. 여러 가지 사정 때문이다. 삼국지연의 전집을 들일 때도 그래서 나름 고민하고 자문을 구한 다음에 구입했지만 읽지 않을 바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삼국지 기행이라는 제목을 마주한 순간,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3세기(정사 삼국지 기준)부터 이어져 온 위. 촉. 오 3국의 배경이 되는(또는 15세기- 삼국지연의 기준) 곳이 과연 현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었고, 또 하나는 삼국지 기행이 흥미롭다면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를 읽는 데 동기부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다행이라면 두 권의 삼국지가 궁금해졌다. 내용이 흥미롭기도 했지만, 저자가 언급하는 장소 속에서 벌어졌던 일의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책은 2009년 동일 저자가 쓴 책의 증보판으로, 저자가 약속했던 내용을 지키기 위해서 과거의 다녔던 지역 중 일부를 다시 다녀보고 책을 손봐서 다시 내놓았다고 한다.

사실 삼국지의 내용을 정확히 꿰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1.2권으로 나뉘어서 담긴 이야기가 각 권의 어떤 부분을 놓고 답사했는지를 쓸 수 없는 게 아쉽다. (제목과 내용을 보자면 유비와 관우, 장비의 만남부터 동탁의 정권을 잡고 적벽대전이 벌어지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럼에도 다행이라면 저자가 각 장소를 다녀오면서 삼국지 속 이야기를 하나 둘 풀어내기 때문에 삼국지를 읽지 않았어도 책을 읽는데 무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책은 두 책(정사 삼국지, 삼국지연의)을 대비하며 실제 역사와 다른 소설만의 내용에 대해서는 적절한 코멘트를 남기고 있기 때문에 진짜 역사와 창작된 역사를 구별하며 읽어나갈 수 있어서 좋았다.

저자가 직접 다녀온 삼국지 속의 배경지를 언급하기에 앞서서 앞으로 갈 곳의 지도를 먼저 보여준다. 삼국지 속 어떤 부분의 내용인지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실제 사진이 함께 담겨 있기에 읽는 맛보는 맛이 쏠쏠하다. 사실 상당히 오래된 역사인지라 과연 오랜 세월 동안 그 장소가 잘 보존되어 있을까 내심 궁금했는데, 책 속 내용을 마주하니 극과 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소 중 상당수는 파헤쳐 지고, 그냥 터만 남아 있거나 터 조차 없이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오히려 찾아간 저자나 글로 마주한 내가 민망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또 다른 장소는 관광객을 위해 과할 정도로 꾸며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삼국지가 워낙 유명한 책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테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기왕이면 차라리 후자처럼 보존이 되어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1권에는 삼국지의 주인공인 유비, 관우, 장비 그리고 조조와 관련된 장소와 함께 삼국지연의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순서에 따라 황건적, 동탁, 여포, 원소 등과 관련이 깊은 장소가 등장했다. 우리도 유비와 조조에 대한 온도차가 상당한 것처럼, 중국인들 역시 그런가 보다. 상대적으로 조조와 관련된 장소(고향을 비롯하여)들의 경우 마을 사람들조차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경우도 있었고, 보존 상태도 아쉬움이 남으니 말이다. 또한 누구나 삼국지 하면 떠오르는 삼 형제의 도원결의가 실제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다. 물론 도원결의 장소는 관광객을 위해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놓긴 했지만 말이다.

이어지는 2권에서는 삼국지의 어떤 장소가 등장할지 역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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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미야모토 테루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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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벌어지는 집다 괴롭힘에도 '무시'라는 음습한 방법이 있다는데,

거기에는 상대를 배려하거나 동정하는 마음은 없다. 그저 괴롭힐 뿐이다.

아버지의 무시는 다르다. 아들을 근본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해서다.

아들의 가장 약한 곳, 가장 몹쓸 곳, 장차 아들을 비뚤어지게 할 요인을 몰아내기 위해서다.

지난달 읽었던 책 중 한 권이 등대에서 벌어진 미스터리한 공포물이었는데, 이번에 마주한 등대는 같은 소재를 사용했지만 많이 달랐다. 둘 다 소설이고, 등대가 중요한 매개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느낌은 극과 극이니 말이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배들의 길잡이가 돼주는 등대. 세상을 떠난 주인공 마키노 고헤의 아내 마키노 란코 역시 누군가의 등대였다는 사실을 책을 덮으며 떠올리게 되었다.

마키노 중화 소바 집 주인인 마키노 고헤는 아버지로부터 중화 소바 가게를 물려받았다. 그가 중화 소바 주인이 된 데는 적잖은 사연이 있다. 천성이 소심하고, 싫은 소리를 못하는 사람 인터라 매일 아버지를 도와드리고 등교했던 고헤에게 한 여학생으로부터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소리를 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이유를 설명했겠지만, 깨끗하게 씻고 등교한 날도 그 소리는 계속 고헤의 귓가에 남겨졌다. 결국 그 일을 이유로 고헤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는다. 그리고 몇 년 후, 가게에 들렀던 손님 란코를 만나 결혼을 하고 3남매를 둔다. 요령 부리지 않고 묵묵히 아버지의 방식으로 중화 소바를 만들던 어느 날, 아내 란코가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피로가 누적되었기 때문일까? 그날 이후로 고헤는 가게를 접는다. 란코 없이 중화 소바를 만들어 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함께 지내는 친구 이자 상점가에서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야마시타 도시오와 대기업에 다니다 그만두고 건물을 올려서 먹고사는 구라키 간지와 가깝게 지내며 살고 있던 중, 낮까지만 해도 자신의 장미를 자랑하던 간지(간짱)이 갑자기 사망하자 패닉에 빠진다. 2년 전 세상을 떠난 란코와 절친 간짱의 죽음은 고헤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다. 우연히 도시오의 가게를 들렀다가 보게 된 달력 속 등대 사진은 잊고 있던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과거 란코 앞으로 왔던 등대가 그려진 작은 엽서가 있었다. 보낸 사람은 고사카 마사오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작 란코는 고사카 마사오가 누군지 모른다는 답장을 써서 보낸다. 그때의 그 엽서가 고헤가 유일하게 읽지 않았던 책 신의 역사 사이에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고헤는 가까운 등대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아내가 털어놓지 않았던 과거 이즈모에서의 이야기를 마주하게 되는데...

친구이자 급사한 간짱에게는 숨겨진 아들이 있었다. 대기업 재직 중 바람을 피웠던 것이다. 가정이 있는 간짱은 상대에게 아이를 지웠다는 말을 듣고 관계를 정리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았고, 갑작스럽게 간짱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자신의 아들 다키가와 신노스케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털어놓는다. 또 다른 친구 도시오에게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얼마 후, 골목을 배회하는 한 부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간짱의 아들 신노스케라는 사시를 알게 되고, 신노스케에게 도움을 줬던 고헤는 신노스케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짐작건대 그런 사람들은, 놀랄 만큼의 행복은 평생 만나지 못한다.

말라죽은 줄 알았던 작은 화분의 꽃씨가 연둣빛 새싹을 틔웠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뭘까.

삐딱하게만 굴다 집을 나갔던 아들이 어느 날 대문 앞에 서 있다가 "죄송해요"라며 울먹인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뭘까.

그렇게 생각하면 누구의 인생에나 넉넉한 행복이 마련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소설의 분위기는 잔잔하다. 고헤의 성격을 닮은 듯하다. 아내의 죽음 이후, 바깥출입을 줄여온 고헤가 우연한 계기로 등대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조금씩 바뀌어간다. 자녀들과의 교류뿐 아니라, 다시 가게를 열고자 마음을 먹기도 한다. 친구의 숨겨진 아들인 신노스케와의 관계나 숨겨진 엽서의 주인공 고사카 마사오를 만나며 고헤는 란코의 알지 못했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당연히 이야기해야 할 이유조차 말하지 못해서 학교를 그만두었던 고헤는 타인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 정도로 변화된다. 물론 그 변화가 단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등대는 단순히 소재가 아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누군가의 길잡이가 돼주는 등대의 역할을 이 책 속 인물들이 서로에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들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고헤 그리고 란코의 이야기가 묵직한 여운을 주는 것 또한 그래서 일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내 일상에도 참 많은 행복이 있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삶을 이끌어가는 힘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집다 괴롭힘에도 ‘무시‘라는 음습한 방법이 있다는데,

거기에는 상대를 배려하거나 동정하는 마음은 없다. 그저 괴롭힐 뿐이다.

아버지의 무시는 다르다. 아들을 근본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해서다.

아들의 가장 약한 곳, 가장 몹쓸 곳, 장차 아들을 비뚤어지게 할 요인을 몰아내기 위해서다.

짐작건대 그런 사람들은, 놀랄 만큼의 행복은 평생 만나지 못한다.

말라죽은 줄 알았던 작은 화분의 꽃씨가 연둣빛 새싹을 틔웠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뭘까.

삐딱하게만 굴다 집을 나갔던 아들이 어느 날 대문 앞에 서 있다가 "죄송해요"라며 울먹인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뭘까.

그렇게 생각하면 누구의 인생에나 넉넉한 행복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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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걷기 수업 - 두 발로 다다르는 행복에 대하여
알베르트 키츨러 지음, 유영미 옮김 / 푸른숲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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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를 오랜 시간 걸었던 기억을 떠올려보라. 줄곧 직선으로만 이어지는 길은 없다.

구불구불 곡선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어떤 지점에서는 되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

인생의 경로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을 결코 일직선이 아니며 순탄하지도 않다.

예전에 큰 아이가 다녔던 어린이집 원장님과 상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원장님이 주신 조언 중 하나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아이들이 유난히 짜증스럽고 감정 표현이 격한 날이 있는데, 그때는 무엇을 하고 있든 간에 내려놓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다고 한다. 모두 같이 어린이집 주변을 걸으며 나무와 꽃도 보고, 바람을 쐬고 나면 아이들도 선생님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고 한다. 도시에 살다 보니 땅을 밟고 자연을 마주할 기회가 적은 아이들이기에, 부러 시간을 내서 걷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말씀이셨다.

생각해 보니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유난히 마음이 안 잡히고 복잡한 날이면, 혼자 조용히 걸으며 물도 보고 산도 보고 왔었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으면 집 앞 강가나 아파트 주변 공원이라도 걸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면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고 번잡한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경력이 다채롭다. 변호사이자 영화감독이고, 철학자이니 말이다. 이 모든 것을 다 해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자신의 진로와 선택에 대해 후회하진 않지만(그 모든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기에), 이미 자신은 10대 때부터 철학을 해야 할 사람이었다는 말이 부럽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그는 대학에서 철학과 법학을 전공했는데, 철학을 전공해서는 밥벌이가 쉽지 않다는 조언을 듣고 변호사가 되었다고 한다.)

책 속에는 총 14개의 주제와 길이 겹쳐진다. 처음부터 찬찬히 읽는 것도 좋지만, 챕터의 제목을 보고 당장 내게 필요하거나 마음이 가는 것부터 읽어도 문제없다. 걷는 것에도 특정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물론 조용한 숲길이나 자연에 가까이 있는 길이 마음을 정돈하고 생각을 집중하는 데 더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나는 주로 출퇴근길에 책을 읽었는데), 한 번씩 주변을 살펴보게 되었다. 늘 바쁘게 무언가에 빠져사는 삶에서 잠깐의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돌아보는 것 말이다. 늘 무언가를 열심히 하기만 했지, 내가 과연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할 시간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때론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생각 안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도출되지 않으면 실패할 거라 여기고 실행하지도 않을 때도 많았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그러니까 길을 나서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이 올바른 길인지 알 수 있겠는가.

오로지 길을 떠나서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만이 목적지에 도착한다.

묻는 자 만이 대답을 얻는다.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자만이 자신에게 이르고, 자기 본연의 가장 깊은 욕망에 닿으며,

자신의 뿌리에 다다를 수 있다.

저자는 책 속에 다양한 철학자들의 걷기에 대한 글들을 소개한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게 이렇게 많은 철학자들이 걷기의 중요성과 걷기가 주는 장점을 이야기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그 글을 찾아서 함께 만날 수 있게 책으로 엮은 저자의 노력에 또한 박수를 보낸다.

누구나 어렵지 않게 행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방법에 걷기만큼 좋은 게 없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머리와 마음이 복잡하다면, 이 책과 함께 걷는 즐거움을 마주해보는 것은 어떨까?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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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3-06-08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근을 일찍 해서 독서를 하는데 오늘은 독서시간을 조금 줄이고 걸으면서 사색에 잠기는 시간을 가져야겠네요~~
좋은 책인거 같아서 담아갑니다~
하루 잘 마무리하시고 요즘 감기가 좀 강한거 같더라고요 건강 잘 챙기세요~~!

명랑걸우네 2023-06-08 19:1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루피닷님^^ 여러가지로 동기부여가 되는 책이었어요ㅎ
 
조선생 - 새이야기
곽정식 지음 / 자연경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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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낯이 익다. 한자는 다르지만, 나 역시 "조선생"으로 꽤 오래 불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조류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매일 아침마다 만나는 참새나 비둘기를 비롯하여 어린이집 등원 때마다 무서워하는 까마귀, 큰 아이의 최애 음식인 닭, 요즘은 보기 쉽지 않은 제비를 비롯하여 올 초 시댁에 갔다 마주한 독수리 그리고 동물원에 갈 때마다 꼭 보고 오는 앵무새와 공작, 타조 등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새들이 책 속 가득 담겨있다.

사실 새에 관한 생물도감 정도로 생각하고 우리가 쉽게 접하는 새들의 특징이나 생태습성 등을 통해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아뿔싸!! "선생"을 놓쳤다는 생각이 첫 장을 넘기며 바로 들었다. 이 책의 저자는 생물학자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책 속에 담겨있는 삽화만큼이나 흥미로웠다. 가령 참새를 예로 들자면, 참새와 관련된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등장한다. 작설차를 비롯하여 참새구이, 마작과 모택동, 새가슴에 이어 참새의 날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다양한 참새 관련 이야기가 있을 줄이야! 싶을 정도로 흥미롭다. 새를 통한 인문학이라고 해야 할까? 책을 읽으면서 왜 저자가 새 조(鳥) 뒤에 선생을 붙였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사실 비둘기만 해도 평화의 상징, 순결의 상징이라는 과거의 긍정적 이미지는 다르게, 현재는 유해조류라고 불리고 있으니 말이다. 나 역시 출퇴근 길에 역 앞 광장을 지나가는데, 비둘기가 움직이면 소름 끼치게 무섭다. 재수 없을 때는 비둘기 똥 테러를 당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비둘기를 무서워(더러워서 피하는) 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 같다. 내 영향 때문인지, 큰 아이 역시 어렸을 때 그렇게 좋아하던 비둘기를 더럽다고 피하니 말이다. 이 또한 사람들의 잘못이라는 게 저자의 이야기다. 같은 새를 보고 자신의 편의에 따라 재단하는 것을 비롯하여, 비둘기가 많이 모이는 곳에는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와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기도 하다. 원래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는 비둘기(놀라웠다.)가 씻을 수 있도록(?) 중간중간 분수와 같은 곳을 만들어주자는 의견도 제시한다.

그 밖에 기억에 남는 새는 공작이다. 공작에 공자가 공자의 공자와 같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그 연유를 사천성의 한 노인에게 전해 들은 저자의 글에 나 역시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이 기억이 남는 이유는 얼마 전 읽었던 그리스 로마신화 때문이었다. 눈이 100개 있던 헤라의 부하 아르고스. 그날도 역시 바람을 피우던 제우스를 감시하기 하던 중, 헤라의 눈에 걸릴 것을 예상한 제우스가 바람피운 상대인 이오를 암소로 변신 시킨다. 하지만 여자의 직감 때문일까? 암소를 제우스에게 달라고 요청한 헤라는 아르고스를 시켜 암소를 감시한다. 암소로 변신한 이오가 걱정되었던 제우스는 아들인 헤르메스를 시켜 아르고스를 죽이고, 부하 아르고스의 죽음을 슬퍼한 헤라는 자신을 상징하는 새인 공작에 날개에 아르고스의 눈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보니 공작의 날개가 무서워졌다. 참 이상한 게 사람이라고... 그전까지만 해도 마냥 아름답게 보였던 날개가 무섭게 보이니 말이다.

그 밖에도 닭과 관련된 내용을 읽으며 어린 시절 키웠던 닭들(닭고기가 먹고 싶다는 말에 옆집 슈퍼 가게 할아버지가 아빠가 키워왔던 영계 5마리를 다 잡아서 프라이드치킨을 만드셨다. 그 이후 나는 통째로 튀긴 닭은 입에 대지 않는다.)과 병아리 꿈이가 떠올랐다.

새를 비롯해서 자연과 생물들은 늘 똑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에 따라서, 아니 인간이 가진 것에 어떤 피해를 주느냐에 따라서 유해물이 되기도 하고, 찬사를 받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입장에서의 판단이 굴레가 된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하기만 했다. 또한 우리 주변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었던 참새의 경우 과거에 비해 50%나 급감했다고 하니 앞으로는 참새를 책 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안타깝기도 했다. 인간과 생태계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 때이다. 이렇게 책을 읽고 보니 저자의 전작인 충선생도 궁금해진다. 기회가 된다면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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