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미야모토 테루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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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벌어지는 집다 괴롭힘에도 '무시'라는 음습한 방법이 있다는데,

거기에는 상대를 배려하거나 동정하는 마음은 없다. 그저 괴롭힐 뿐이다.

아버지의 무시는 다르다. 아들을 근본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해서다.

아들의 가장 약한 곳, 가장 몹쓸 곳, 장차 아들을 비뚤어지게 할 요인을 몰아내기 위해서다.

지난달 읽었던 책 중 한 권이 등대에서 벌어진 미스터리한 공포물이었는데, 이번에 마주한 등대는 같은 소재를 사용했지만 많이 달랐다. 둘 다 소설이고, 등대가 중요한 매개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느낌은 극과 극이니 말이다. 어두운 밤바다에서 배들의 길잡이가 돼주는 등대. 세상을 떠난 주인공 마키노 고헤의 아내 마키노 란코 역시 누군가의 등대였다는 사실을 책을 덮으며 떠올리게 되었다.

마키노 중화 소바 집 주인인 마키노 고헤는 아버지로부터 중화 소바 가게를 물려받았다. 그가 중화 소바 주인이 된 데는 적잖은 사연이 있다. 천성이 소심하고, 싫은 소리를 못하는 사람 인터라 매일 아버지를 도와드리고 등교했던 고헤에게 한 여학생으로부터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소리를 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이유를 설명했겠지만, 깨끗하게 씻고 등교한 날도 그 소리는 계속 고헤의 귓가에 남겨졌다. 결국 그 일을 이유로 고헤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는다. 그리고 몇 년 후, 가게에 들렀던 손님 란코를 만나 결혼을 하고 3남매를 둔다. 요령 부리지 않고 묵묵히 아버지의 방식으로 중화 소바를 만들던 어느 날, 아내 란코가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피로가 누적되었기 때문일까? 그날 이후로 고헤는 가게를 접는다. 란코 없이 중화 소바를 만들어 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함께 지내는 친구 이자 상점가에서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야마시타 도시오와 대기업에 다니다 그만두고 건물을 올려서 먹고사는 구라키 간지와 가깝게 지내며 살고 있던 중, 낮까지만 해도 자신의 장미를 자랑하던 간지(간짱)이 갑자기 사망하자 패닉에 빠진다. 2년 전 세상을 떠난 란코와 절친 간짱의 죽음은 고헤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다. 우연히 도시오의 가게를 들렀다가 보게 된 달력 속 등대 사진은 잊고 있던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과거 란코 앞으로 왔던 등대가 그려진 작은 엽서가 있었다. 보낸 사람은 고사카 마사오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작 란코는 고사카 마사오가 누군지 모른다는 답장을 써서 보낸다. 그때의 그 엽서가 고헤가 유일하게 읽지 않았던 책 신의 역사 사이에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고헤는 가까운 등대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아내가 털어놓지 않았던 과거 이즈모에서의 이야기를 마주하게 되는데...

친구이자 급사한 간짱에게는 숨겨진 아들이 있었다. 대기업 재직 중 바람을 피웠던 것이다. 가정이 있는 간짱은 상대에게 아이를 지웠다는 말을 듣고 관계를 정리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았고, 갑작스럽게 간짱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자신의 아들 다키가와 신노스케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털어놓는다. 또 다른 친구 도시오에게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얼마 후, 골목을 배회하는 한 부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간짱의 아들 신노스케라는 사시를 알게 되고, 신노스케에게 도움을 줬던 고헤는 신노스케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짐작건대 그런 사람들은, 놀랄 만큼의 행복은 평생 만나지 못한다.

말라죽은 줄 알았던 작은 화분의 꽃씨가 연둣빛 새싹을 틔웠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뭘까.

삐딱하게만 굴다 집을 나갔던 아들이 어느 날 대문 앞에 서 있다가 "죄송해요"라며 울먹인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뭘까.

그렇게 생각하면 누구의 인생에나 넉넉한 행복이 마련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소설의 분위기는 잔잔하다. 고헤의 성격을 닮은 듯하다. 아내의 죽음 이후, 바깥출입을 줄여온 고헤가 우연한 계기로 등대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조금씩 바뀌어간다. 자녀들과의 교류뿐 아니라, 다시 가게를 열고자 마음을 먹기도 한다. 친구의 숨겨진 아들인 신노스케와의 관계나 숨겨진 엽서의 주인공 고사카 마사오를 만나며 고헤는 란코의 알지 못했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당연히 이야기해야 할 이유조차 말하지 못해서 학교를 그만두었던 고헤는 타인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 정도로 변화된다. 물론 그 변화가 단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등대는 단순히 소재가 아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누군가의 길잡이가 돼주는 등대의 역할을 이 책 속 인물들이 서로에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들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고헤 그리고 란코의 이야기가 묵직한 여운을 주는 것 또한 그래서 일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내 일상에도 참 많은 행복이 있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삶을 이끌어가는 힘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집다 괴롭힘에도 ‘무시‘라는 음습한 방법이 있다는데,

거기에는 상대를 배려하거나 동정하는 마음은 없다. 그저 괴롭힐 뿐이다.

아버지의 무시는 다르다. 아들을 근본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해서다.

아들의 가장 약한 곳, 가장 몹쓸 곳, 장차 아들을 비뚤어지게 할 요인을 몰아내기 위해서다.

짐작건대 그런 사람들은, 놀랄 만큼의 행복은 평생 만나지 못한다.

말라죽은 줄 알았던 작은 화분의 꽃씨가 연둣빛 새싹을 틔웠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뭘까.

삐딱하게만 굴다 집을 나갔던 아들이 어느 날 대문 앞에 서 있다가 "죄송해요"라며 울먹인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뭘까.

그렇게 생각하면 누구의 인생에나 넉넉한 행복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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