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표류기 - 조선과 유럽의 운명적 만남, 난선제주도난파기 그리고 책 읽어드립니다
헨드릭 하멜 지음,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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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 8월 조선에도 아주 사소한 ‘뜻밖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스페르베르호가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다가 제주도 해안에서 폭풍우로 난파되었습니다. 선원 64명 가운데 선장을 포함하여 28명이 사망하고 36명이 살아남아 가까스로 뭍에 표착합니다. 그 이후 이들은 무려 13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다가 생존자들이 탈출해 귀향합니다. 이 중에는 그 배의 서기였던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도 끼여 있었습니다. 그는 1666년 9월 조선을 탈출해 이듬해까지 나가사키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그는 회사에 밀린 급료를 요구하기 위해 그동안 일행이 공무를 수행하다 겪은 재난을 연도별로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이 책이 바로 ‘하멜 표류기’라고 부르는 책입니다.

하멜 일행은 표착 직후 체포되어 제주도에 억류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이 통역 겸 조사관으로 파견한 사람이 바로 박연이었습니다. 그 역시 1627년 조선 해안에 표착했다가 붙잡힌 네덜란드인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에 귀화하여 훈련도감의 장교로 있었습니다. 하멜은 당시 박연의 나이를 57~58세로 추정했습니다.

이듬해 5월, 조정은 그들을 한양으로 올려보내라고 명령합니다. 호송 도중에 한 명이 사망하여 한양에 도착한 것은 35명이었습니다. 며칠 후 그들은 국왕(효종) 앞에 불려 나가 고국으로 송환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국왕은 이를 거부하면서 대신 “죽을 때까지 부양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튿날 그들은 박연이 소속된 훈련도감에 배치되어 호패와 화승총을 지급받았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대항해 시대를 주도하던 나라였습니다. 하멜 일행도 항해사, 조타수, 포수, 갑판원, 선의, 서기 등 다양한 직군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배에는 대포만 수십 문이 있었습니다. 1666년 조선을 탈출할 당시의 생존자(16명) 중에도 포수만 4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이 그들의 근대적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시도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p53 저희들은 날마다 여러 귀족들의 잔치에 초대받았는데, 그것은 저희들의 검술과 춤추는 것 등 노는 솜씨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처자들은 저희들을 구경하고 싶어 했는데 그것은 제주도 사람들이 저희들을 괴물로 본다든가, 무엇을 마실 때는 코를 귀의 뒤똑에 돌리고 마실 것이라든가, 머리카락이 갈색이기 때문에 사람이라기보다는 물속의 헤엄쳐 다니는 새처럼 보인다든가 하는 소문이 돌았고, 또 그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듣고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처음 접견한 국왕은 그들에게 ‘네덜란드 식으로’ 춤을 추게 하고 노래도 부르게 했습니다. 이어서 그들은 ‘매일 고관들의 집을 방문하도록 명령을 받고’ 그 집 식솔들 앞에서 광대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큰 코, 붉은 머리, 흰 피부를 가진 ‘남만인’들은 당시 한양 사람들에게 대단한 볼거리였습니다.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그들은 가택에 연금되거나 남한산성으로 격리되었습니다. 그런데 1655년 3월 그들 중 두 명이 몰래 숨었다가 사신의 행렬로 난입하는 충격적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조정은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사건을 무마하고도 상당 기간 청나라의 트집을 염려했습니다. 두 명은 투옥되었다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돌발적 사건을 계기로 조정은 이들의 존재에 부담을 갖게 되었습니다. 청나라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도 문제였습니다. 임진왜란 후 양국은 외국인의 표착을 상호 통보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강경파들은 아예 이들을 처형해서 없애자고 주장했으나 국왕은 호남으로 보내도록 조치했습니다. 호남은 청나라와 일본의 눈길로부터 가장 먼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1656년 봄, 생존자 33명은 전라병영(강진 소재)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들은 잡다한 부역에 시달리며 땔감을 구하고 심지어 구걸까지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5~6년 동안 그들 중 무려 11명이 죽고 1662년에 생존자는 22명으로 줄었습니다. 재정이 피폐해진 전라병영의 요청으로 그들은 다시 여수(12명)·순천(5명)·남원(5명)으로 분산배치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가뭄·혹한과 같은 자연재해가 잇따라 그들뿐만 아니라 조선 민중 전체가 도탄에 빠졌습니다. 더구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사회는 피폐하여 근본적인 변화가 절실했습니다. 주자학도 이미 순기능을 다했습니다. 그럼에도 엘리트들은 시대 변화를 외면한 채 수구적인 예학을 통해 기득권을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다시 3~4년이 흘러 생존자는 불과 16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구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한’ 끝에 1666년 9월 웃돈을 주고 산 배를 타고 8명이 일본으로 탈출했습니다. 1668년에 잔존자 7명이 일본을 통해 송환되었습니다. 잔존자 8명 중 1명은 그 사이 사망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리하여 최후의 생존자 15명은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항해술, 조선술, 포술과 같은 그들이 보유한 선진적 기술을 별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돌발적 사건을 겪고 나서야 그들의 신병 처리를 고민했습니다. 아울러 사건의 대목마다 늘 온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처럼 조선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피상적인 호기심, 무전략, 온정주의 등으로 일관했습니다. 아쉽게도 세계사적 흐름에 대한 안목은 전무했습니다. 조선을 탈출해 규슈 해안에 표착한 하멜 일행은 일본의 개항장인 나가사키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들이 도착하자 그곳의 일본 행정 책임자는 그들에게 난파선 규모 및 항해 목적, 조선의 군사·경제·풍습·종교, 탈출 경위 등을 비롯해 5개 분야 총 54개항을 집중적으로 심문했습니다. 조선 측이 이렇게 그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다는 이야기는 ‘하멜 표류기’나 조선 측 기록 어디에도 없습니다. 조선이 13년 동안 하지 않은 일을 일본은 단 하루 만에 한 셈입니다.

p149 국왕에게 반항한 사람과 이 왕국을 배반한 사람은 그 일가친척까지 모두 사형을 당합니다. 그들의 집은 주춧돌에 이르기까지 헐리며 그 자리에는 아무도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재산과 노예는 국가 재산으로 몰수되던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국왕이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복종하지 않은 사람 역시 사형됩니다.

외국인의 눈으로 볼 때 조선의 형벌제도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하멜의 시선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지만 객관적이고 정확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적잖게 충격을 받은 점은 각 마을마다 거북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또, ‘조선 사람들은 대체로 선량하며 성품이 좋으나 남을 속이고 훔치는 일이 많으며, 피를 보기 싫어한다’ 는 기록도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한편, 사대주의적인 조선인의 시각에 대한 기록도 있었는데 ‘조선인들은 세상에 12개의 국가만 있으며 모두 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친다‘는 기록도 있었습니다.

이 책 가운데에는 일부 잘못 관찰된 내용이나 피상적으로 서술된 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물론 억류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겠지만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의 단면이어서 씁쓸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17세기중엽 우연히 조선에 표착했던 외국인 관찰자가 최선을 다하여 기록할 수 있었던 내용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기록에서 당시의 서양인들에게 뿐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흥미 있는 여러 부분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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