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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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허난설헌’이라고 하면 천재적인 시재를 발휘했던 조선의 여류시인이자 허균의 누이라고 알고 있으실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 대부분이 허난설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마 이 정도일 것입니다.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지만, 그 명성에 비해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황진이, 신사임당과 더불어 가장 많이 회자되는 조선의 여인이지만 역사적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지금까지 온갖 의문에 싸여 있는 허난설헌.

하늘이 내린 뛰어난 재능도 여자에겐 축복이 되지 못했던 시대, 철저하게 남성중심사회였던 조선에서 여성의 글을 인정하지 않는 편견을 뒤로한 채, 시를 위해 온 생명을 불살랐던 허난설헌의 삶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되살린 소설이 있습니다.

 

벼슬을 하는 허엽의 막내딸인 초희에게는 오빠 허 봉과 동생 허 균이 한 어머니를 모시고 태어났으며 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글에 능하고 시어에 뛰어났습니다. 오빠와 동생은 일찌기 과거에 급제를 하고 선비로서의 겸양을 갖추었고, 재능이 뛰어난 동생과 누나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결혼을 앞둔 날부터 이어지던 흉칙한 징조들, 그칠 줄 모르고 내리긋던 빗줄기,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에 품은 채, 품은 마음마저도 죄악인 듯 하여 안으로만 치대어 밀어들이던 초희의 결혼은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번번히 과거에 낙방을 하는 신랑 김성립은 공부를 하기보다는 기방출입과 술에 젖어 살았고 글과 함께하는 신부 초희를 감당하지 못한 김성립은 몸과 마음으로 그녀를 괴롭히고 학대합니다. 남편이라기보다는 강간범처럼 다가드는 남편과는 한마디의 대화도 이어지질 않았고 시어머니 송씨의 고약한 성미는 초희가 설 곳에 대한 조금의 틈도 주질 않았습니다.

p143 송씨의 눈에는 그런 며느리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가 오만방자하게 보였다.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언제 보아도 범접할 수 없는 차가움이 서려 있는 몸가짐, 그것이 송씨의 분노를 늘 부채질했다. 장원급제하라는 아들 성립은 기방에 들락거리는데, 며느리라는 것은 짬만 나면 서책을 끼고 있으니 원통하고 분했다

 

‘시어머니’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뻔뻔하고 두려움없는 구박과 지아비란 이름으로 버젓이 짓밟으며 빼앗아가는 육신과 영혼의 갈래들, 시를 쓰고 글을 읽는 것이 그녀의 휴식이었으며 희망이었고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지만 글을 가까이 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망측하다며 서책을 뒤엎기 일쑤인 시어머니 앞에서 그녀는 서서히 죽어갑니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마음껏 안아보지 못하고, 젖을 물리지도 못하는 현실 앞에서도 그녀는 원망하지 않고 모든 것이 고여 있지 않고 흘러간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합니다. 외할머니댁에서 요양을 하던 그녀에게 마음에 매인 최순치가 수연과 함께 찾아오고 터무니없는 밀고로 인하여 초희는 결국 시댁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맙니다. 이유는 알아보지도 않은 채 시어머니 송씨는 그녀에게서 아이들을 데리고 갑니다. 아장거리는 소헌이와 젖을 물리는 제헌이까지 데려간 시어머니는 아이들을 초희로부터 빼앗음으로써 그녀의 삶의 모든 이유들을 거둬들이기 시작합니다.

p309 자식이 어미를 따르고, 어미가 자식을 아끼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을 그 뜨겁고 세찬 본능의 흐름을 막자고 드는 게 정녕 정성이란 말인가, 그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 아이들 얼굴만 떠올려도 빗물처럼 흐르는 눈물이 눈을 가려 그제도, 어제도, 내일도, 모레도,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분하고 슬픈 일이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어느날 소헌이 열에 들떠 숨을 거둘 때에야 초희에게 건네고, 초희는 어린 딸의 죽음 앞에서 오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헌이가 죽은지 계절이 다시 바뀌기도 전에 동생 제헌마저 죽게 됩니다. 아이를 잃은 한에 가슴이 멍들어가던 초희는 두 아이를 잃자, 27살의 젊은 나이에 그나마 시를 통하여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 세상에 대한 끈을 놓아버립니다.

p57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담을 넘어가면 안 된다는 남존여비의 금기와 제재가 여자들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여자가 글을 밝히면 팔자가 드세다는 속설 또한 여자들의 지적인 갈망에 족쇄를 채웠다

 

천재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 보다는 여자로서의 일상적인 허난설헌의 삶을 그려내면서 그 시대적인 닫힘과 유교적인 사슬로 인해 한 천재가 그냥 그렇게 사라지는 안타까움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흥미로운 부분으로는 조선시대의 풍속사들이 고스란히 들어있어서 그 시대의

혼례를 치르는 자잘한 이야기나 난설헌 주위의 여러 다양한 여인들의 사는 모습들이었습니다. 난설헌의 어머니나 시어머니, 시숙모, 유모, 몸종, 기생, 술청여인네나 외할머니 등의 여러 가지 삶들을 세심하게 표현하여 그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낸 부분들이 인상 깊었습니다. 난설헌의 어머니는 현모양처이고, 시어머니는 자격지심이 심하고, 시숙모는 능력이 뛰어나나 그것을 감추고 살아갑니다. 난설헌의 몸종은 자신의 처지 때문에 제대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과거에 짧은 인생을 천재 시인으로 살다가 죽은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자’라는 이름에 갇혀 살아가는 모든 여자들의 모습을 투영시킨 작품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p242 겹겹이 감추고, 숨기고, 억압하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순수한 본성가지도 작은 틀 속에 가두려는 제도와 인습이 문득 진저리쳐진다. 내 어찌 이 땅에 아녀자로 태어나 이 작은 틀 속에 갇힌 신세가 되었던고. 죽어 다시 태어나면 저 너른 중원천리를 말 타고 달리는 남정네로 태어나리라

우리는 신사임당을 예술가이며 율곡 이이를 키운 어머니, 그리고 현모양처로 기억하고 있고, 이런 이유로 오만 원 지폐에서 신사임당의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반면 허난설헌의 시에는 자아의 욕망과 슬픔과 기쁨이 드러나고 있고, 표현 또한 세련되어 현대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그녀가 후대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대를 앞선 시를 썼기 때문이고, 아들을 일찍 여의었기 때문이고, 유교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스물일곱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우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자, 그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의 힘을 보여주는 소설이었습니다. 숨막히는 유교사회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희생당한 그녀의 아픔은 시 속에 그대로 녹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녀의 인생 모두를 알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긴 하지만, 그녀가 남긴 세밀하고도 아름다운 언어의 불멸의 작품들을 다시 음미해봅니다.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자유롭게 작성하였습니다

오늘 초희는 자꾸만 구겨지는 마음이 다림질되지 않는다. 덜 마른 빨래를 손다림질하는 어머니 김씨 곁에서 초희가 익힌 것이 있다면 삶의 구김새도 숯불 다림질이 아닌 맨손으로 곱게 매만질 수 있다는 손다림질의 지혜였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고 부릴 때도 손다림질의 온기로 다독이라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 가르침이라고 초희는 알아들었다.

- P27

그미는 가슴으로, 머리로 시를 쓰고 읊조렸다. 아이를 안은 채 오색 구름 위를 날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자유자재로 영혼의 나들이를 한다. 그것은 그미에게 절대의 시간이다. 아무도 그것만은 빼앗을 수가 없다. 그미만의 세상이다
- P229

어머니 김씨가 딸의 어깨를 얼싸 안았다. ‘초희야. 너의 영민함도, 너무 다정함도, 지나친 나약함도 이 세상에 배겨나지 못하는 것을 어쩌자고 머릿속에 촛불을 켜고 산다더냐.’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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