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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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하던 1922년, 러시아의 귀족 출신으로서 구시대 인물인 로스토프 백작은 자신이 묵고 있던 메트로폴 호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평생 연금형을 선고 받습니다. 귀족의 모든 특혜를 몰수 당하고 하인용 방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지만 백작 특유의 긍정적인 마음으로 현실에 적응해 갑니다.

p90 겨우 3주가 지났을 뿐인데.....할 일은 너무 없고 할 일 없이 때우기엔 시간이 너무너무 많아서 인간 감정의 공포스러운 수렁이라 할 수 있는 권태감이 계속해서 백작의 마음의 평화를 위협했다

백작은 꼬마 숙녀의 놀이 친구, 유명 배우의 비밀 연인, 공산당 고위 간부의 개인교사, 수상한 주방 모임의 주요 참석자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면서 점차 호텔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 갑니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 결국 사라지는 러시아 역사를 가장 안전한 곳에서 지켜보는 ‘관찰자’이지만 호텔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적극적인 ‘참견자’입니다. 세련되고 우아한 태도, 인간적 매력으로 무장한 그는 호텔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p98 화려함은 끈질김 힘이니까 말이다. 영악함도 끈질긴 힘이다.

황제가 계단 아래로 끌려 내려와 던져질 때 화려함은 얼마나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는가. 그러고 나서 화려함은 조용히 알맞은 때를 기다리며 새로 임명된 지도자의 복장에 관해 조언해준다. 그 지도자의 외모를 칭찬하면서 한두 개의 훈장을 착용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한다. 또는 공식 만찬 자리에서 그 지도자를 접대하면서, 화려함은 이 같은 막중한 책임을 맡은 분께는 더 높은 의지가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일부러 들리도록 중얼거린다.

거처를 스위트룸에서 하인용 다락방으로 옮기고 귀족으로서 누리던 모든 특혜를 회수당한 그이지만 메트로폴이 꼭 감옥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호텔은 백작의 세련되고 고상한 취향과 자상하고 긍정적인 성격을 지킬 수 있는 피난처이자 모험과 새로운 만남의 장소, 사랑과 우정을 키워나가는 좋은 집이기도 했습니다.

p630 알렉산드르 로스토프는 과학자도 아니고 현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예순넷이라는 나이를 먹은 그는, 인생이란 것은 성큼성큼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만큼은 현명했다. 인생은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다. 주어진 하나하나의 순간마다 천 번에 걸친 변화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우리의 능력은 흥하다가 이울고, 우리의 경험은 축적되며, 우리의 의견은 - 빙하가 녹듯 매우 느리지는 않다 해도 적어도 천천히 점진적으로 - 진화한다. 소량의 후추가 스튜를 변화시키듯,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세월이 흐르면서 백작은 항상 완벽한 신사처럼 행동합니다. 그는 자신의 감금에 대해 결코 불평하지 않습니다. 감금이라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한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여러 인연과 사건들을 흥미롭게 읽다보면 백작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됩니다.

로스토프 백작을 둘러싼 이야기 또한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었습니다. 생생한 디테일은 정말로 혁명 직후의 모스크바에 로스토프 백작 같은 사람이 있었겠다 싶게 만들고 평범한 소동과 작은 소품이 역사적 사실과 연결되어 더 큰 이야기를 완성할 때는 짜릿함마저 안겨주었습니다.

두꺼운 분량에 부담감과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읽고 나면 기억에 남는 독서 경험으로 보상받을 것입니다.

야로슬라프는 가위 두 개를 동시에 들고 은발의 신사에게 마법 같은 기술을 발휘하고 있었다. 야로슬라프의 손에 들린 가위는 처음에는 무용수가 뛰어올라 두 다리를 공중에서 교차하는 동작인 앙트르샤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이발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손은 점점 더 빨라져서 마침내 가위는 고파크를 추는 카자크 사람처럼 뛰어올라 다리를 내치곤 했다
- P61

세상은 돌고 도는 거야. 사실 지구는 지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동시에 태양 주위를 돈다. 은하수도 돈다. 더 큰 바퀴 속의 작은 바퀴인 셈이다. 천체는 돌면서 시계의 작은 망치가 내는 종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자연의 소리를 낸다. 그 천체의 종소리가 울리면 아마 거울은 불현듯 자신의 보다 더 진정한 목적에 맞게 일할 것이다. 즉, 우리 인간에게 자신이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그 실제 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 P65

시대는 가차 없이 변한다. 필연적으로 변한다. 창의적으로 변한다. 그렇게 시대는 변하면서 케케묵은 경칭과 사냥용 호른뿐 아니라 은으로 만든 호출종과 자개를 입힌 오페라글라스, 그리고 이제는 쓰임새가 없어진 온갖 종류의 공들여 만든 물건들을 골동품으로 만들어버린다
- P124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교 범위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슬프지만,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현실이지." 그가 말했다. "습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늘거나 아니면 활력이 주는 탓에 우리는 갑자기 몇몇 익숙한 사람들과만 사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단다. 그래서 나는 인생의 지금 단계에서 너처럼 멋진 새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을 굉장한 행운으로 여겨."
- P153

첫 인상이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화음이 우리에게 베토벤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 또는 하나의 붓 터치가 우리에게 보티첼리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너무 변덕스럽고 너무 복잡하고 엄청나게 모순적이어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듭 숙고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우리가 가능한 한 많은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겪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관한 견해를 보류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 P194

백작에게 손짓했던 여름 미풍은 이제 온전히 그를 감쌌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바람은 다섯 살이나 열 살 혹은 스무 살 시절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나 티히차스의 풀밭에서 느꼈던 어린 시절 여름밤의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헤어나기 힘들 만큼 옛 생각에 푹 젖은 백작은 잠시 가만히 멈추어 서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야 지붕 서쪽 가장자리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 P202

"저는 상황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진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 내몰리는 것과 상황을 잘 감수해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려 합니다."
- P338

그 옛날 너에게 평생 메트로폴을 떠날 수 없다는 연금형이 선고되었을 때, 네가 러시아 최고의 행운아가 되리라는 걸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가 말했다
- P460

아이를 양육하는 데는 수많은 걱정거리-학업, 옷, 예절 등-가 뒤따르지만, 결국 부모의 책임이란 매우 단순한 것이다. 아이를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전하게 키움으로써 아이가 목적 있는 삶을, 그리고 신이 허락한다면 만족스러운 삶을 경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 P488

소피야가 이 곡을 선택했을 때 백작은 곡이 ‘즐겁다‘, ‘매우 발랄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우려를 에둘러 표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마음을 편히 먹었다. 우려를 표명한 다음에는 세 발짝 물러서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한 발짝도 아니고 두 발짝도 아닌, 세 발짝이었다. 어쩌면 네 발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섯 발짝은 절대 아니었다.) 그랬다. 아버지는 자신이 걱정한다는 것을 알려준 다음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 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비록 그 결정이 실망스러운 결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 P564

내겐 너를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단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음악원 경연 대회가 열렸던 밤이었어. 하지만 정작 내가 최고의 자부심을 느낀 순간은 안나와 네가 우승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가 아니야. 그것은 바로 그날 저녁, 경연을 몇 시간 앞두고 네가 경연장으로 가기 위해 호텔 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박수 갈채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환호를 받게 될 것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이란다
- P609

아버지는 우리 인생은 불확실성에 의해 움직여 나아가는데, 그러한 불확실성은 우리의 인생 행로에 지장을 주거나 나아가 위협적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잃지 않고 보존한다면 우리에게 극히 명료한 순간이 찾아들 거라고 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갑자기 하나의 필수 과정이었음을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든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으로 꿈꿔온 대담하고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서 있을 때조차도 그렇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이런 주장은 너무 특이하고 과장되어 보였기 때문에 소피야의 괴로움을 조금도 달래주지 못했다
- P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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