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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평점 :
사랑에 대한 경험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비슷하고, 비슷하지만 다 다릅니다.
형배와 선희는 같은 대학 같은 동아리 회원으로 이른바 캠퍼스 커플입니다. 형배가 선희보다 두 살 많습니다. 두 사람은 대개의 커플이 그러하듯이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스포츠경기를 관람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술집에서 술과 함께 밤을 지새우곤 했습니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사랑 역시 차츰 무르익어갑니다. 형배는 자신이 사랑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너의 사랑을 받아 줄 수 없다고 말하며 두발짝 뒤로 물러서고 맙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집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2년 10개월이 흐른 뒤, 두 사람은 지인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3년에 가까운 시간의 흐름은 많은 것들을 바꿔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선희는 어이없게 헤어졌던 당시와 비교해볼 때 많은 부분에서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게 되니 형배의 마음은 괜시리 설레기도 합니다. 조심스레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고백합니다.
p146 여기 하나의 사랑이 있다. 영석과 선희의 사랑. 나이 든 남자인 영석은 응석을 부리고 나이 어린 여자인 선희는 그의 응석을 받아준다. 그들이 사랑하는 풍경이다. 선희가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가령 형배와의 관계에서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으며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영석이 형배가 아니고 형배가 영석이 아니기 때문이다. 형배가 영석처럼 응석을 부리지 않기 때문에 선희는 응석을 받아주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당신이 나의 방식을 정한다. 연인은 사랑하는 자이고, 동시에 연인의 사랑의 방식을 결정하는 자이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그와 헤어진 뒤 직무상 알게 된 영석과 교제 중이었습니다. 영석은 선희에게 있어 전혀 관심 밖의 인물이었으며, 되레 그녀는 형배를 여전히 잊지 못하던 와중이었습니다. 평소 꿈에 그리던 작가가 된 자신에게 형배가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주기를 바랐지만, 비록 형배 역할을 해준 대타에 불과했음에도 이를 실행에 옮긴 건 결국 영석이었으며,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연을 이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희를 거절하기 위해 적당한 이유로 돌려 말 한 것이지만 그 장면은 밀도있게 다가왔습니다. 과연 사랑에 자격이 필요한 걸까요?
흔히 사랑에 빠진다고 표현합니다. ‘빠진다’ 라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의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나타냅니다. 내가 원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원하든 원치않든 주어진 것입니다. 자격을 갖추고 내가 사랑을 해야 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이뤄지는게 사랑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가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종종 그 자격에 대해 운운합니다. 마치 내가 결정권이라도 갖고 있는 것처럼.
요즘에는 3포 세대 운운하며 결혼과 연애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포기 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감추고 있는 것 뿐입니다.
p167 사랑 자체인 이 사랑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와 자기 생애를 시작한다. 그 생애가 연애의 기간이다. 어떤 생애는 짧고 어떤 생애는 길다. 어떤 생애는 죽음 후에 부활하고, 어떤 생애는 영원하다
‘생애’라는 것은 한 개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눈을 감을 때까지의 전 과정을 일컫습니다. 사랑이 발아하여 성장하고 다시 소멸할 때까지의 시간이 다름 아닌 사랑의 생애일 것입니다.
작가는 영화속 에이리언이 사람을 숙주 삼아 그들 스스로의 생명을 이어갔던 것처럼 사랑 역시 사람을 ‘숙주’ 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기생체가 몸에 들어와 숙주를 조종합니다. 이때 숙주가 기생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생체가 숙주를 선택합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평소와 다르게 행동합니다. 연인을 위해 담배를 끊고 성격을 고치기도 하며, 하고 싶은 것을 참고 하기 싫은 일들을 하게 됩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든 일들을 훨씬 잘 버텨내기도 하는 반면, 원래라면 별 대수롭지 않는 일에 쉽게 무너지기도 합니다. 감정은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우울했다가 기뻤다가를 반복합니다.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처럼 뇌와 육체는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사랑’이라는 ‘기생체’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내 의지가 아니라 내 안의 기생체가 지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냥 몸을 내어준 것 뿐입니다.
처음 발아한 사랑은 성장해 나가다가 숙주를 새로이 선택, 옮겨간 뒤 남은 생애를 지속하곤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사랑의 종류가 워낙 다양한 만큼 이를 일일이 헤아린다는 건 의미 없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사랑이란 형배의 엄마처럼 상대의 사랑이 떠나가든 그렇지 않든 '처음으로 사랑하고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을 향한 지고지순한 방식도 있겠지만, 준호처럼 결혼은 사랑과 무관하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영원불변하는 사랑의 신화가 보호하는 제도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보다 많은 상대와 연애하는 방식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p285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 사랑하느라 바쁜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것의 근거나 방식이 어떠한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삼각관계와 자유연애만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주장 그리고 자신을 버리고 떠나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구걸한 남편을 끝까지 끌어안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 등 저자의 생각처럼, 사랑이란 어쩌면 사랑의 숙주에 불과한 사람이 이에 대해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없으며, 이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일들이 전부 사랑이 시킨 짓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배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랑의 유형들은 아름다우면서도 처절하기도 했습니다.
작가 특유의 문학적 현미경과 철학적 통찰력을 통해 집요하게 관찰되는 사랑 이야기는 사랑의 선택적인, 그러나 무작위적인 개입으로 사랑하게 된 연인의 비논리적인 감정과 심리를 치밀한 논리로 집요하게 파고들어 우리가 왜 사랑하기 전의 자신과 그토록 달라질 수밖에 없는지 증명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도저히 사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사랑’이라는 사건에 어떤 형태로든 관여되어 당혹하고 혼란스러워본 적 있는 분이라면 공감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알아가야 하는 숙제를 떠안는 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누군가는 앞으로 알아갈, 모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잘 알던(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 숙주 안에 깃들어 생애를 시작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신비스러운 일이다. - P31
사랑의 말은 직선을 모른다. 아니, 모르지는 않지만 쓰지 못한다. 쓰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두근거림과 조심스러움, 즉 수줍음이 쓰지 못하게 한다. 직선의 언어는 빠르지만 날카로워서 발화자든 청자든 누군가를 다치게 하기 쉽다. 자기든 남이든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시작되는 현장에서 직선의 언어는 여간해서는 채택되지 않는다 - P48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 사람이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저 사람도 반드시 그래야 하는 법은 없다. 이 사람에게 대단한 일이 저 사람에게는 대단하지 않거나, 저 사람에게 하찮은 일이 이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일인 경우가 허다하다. 기쁨과 보함을 느끼며 하는 일에 우리는 가치를 부여한다 - P53
사람은 다 다르다. 사람은 많은 부분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만 전부를 공유하지는 않는다. 공유하고 있는 많은 부분이 아니라 공유하지 않은 아주 작은 부분이 개체 간의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가 그 사람만의 고유한 성격, 그 사람의 정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아주 작은 그 차이 속에 매력이 잠겨 있다. 똑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고유하고 특별하므로 모든 사람을 고유하고 특별하게 대해야 한다. 유일한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사람의 매력은 한 줄로 순서를 매겨 세울 수 없고, 비교 불가능하다. - P72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거나, 거짓이 아니라면 아예 사랑이라는 것을 (기대가 없어서든 억압되어서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개별적 존재가 발산하는 매력에 대한 정당한 반응으로서의 개별적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자기 안의 쾌락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혹은 더 나쁜 경우로, 단지 편리와 관습에 따라 사랑을 구실로 내세워 사람을 붙들고 있는 것뿐이라면, 이것이야말로 개인이 가진 고유성에 대한 마땅하고 정당한 대우를 하고 있다 볼 수 없기 때문에 부도덕하다고 말할 수 있다 - P77
듣는 사람은 잘못 들을 수도 있지만 하는 사람, 하면서 듣는 사람은 잘못 들을 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는 어렵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해놓고 사랑하지 않기는 더욱 어렵다. - P131
말은 맥락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매우 불완전하고 비자족적인 신호체계라서 듣고 싶은 데에 따라 달리 들리는 속성이 있다.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대로 들린다. - P221
질투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느끼는 약점의 크기를 보인다. 사랑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약점이 있어 질투하는 것이다 - P228
그는 연인을 끌어당길 만한 매력이 자기에게 없기 때문에 그녀가 언제든 자기를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시적으로 시달린다. 그녀가 자기를 떠난다고 할 때 그는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그녀가 언제든 떠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는 초조하고 조마조마하다. 그의 사랑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그는 이 사랑에 대해 주도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사랑은 순전히 그녀에게 달려 있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과 눈빛과 말투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된다. 사소한 것을 크게 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확대하고 과장한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이나 의도 없이 짓는 표정이 의식적인 것이 되고 의도한 것이 된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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