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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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의 이름은 많이 들었었습니다. 60-70년대의 소설가.

60년대의 감수성이 지금에도 와 닿는 것이 놀랍고, 그 감수성 문체, 이야기 등 무엇 하나 버릴 게 없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무진기행은 불과 24살 대학생 시절(1964년)에 씌여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현대의 하루키적 감수성에, 언어표현은 시인과 같고, 깊이는 전형적인 한국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대에 이런 느낌을 표현했다는 것이 놀랍고, 그 시대와 변함없는 이 시대의 감수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깊고 구성도 단단했습니다. 상징과 의미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면서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갔습니다. 작가가 빈 종이 위에서 거침없이 써내려간 듯한 시원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확실히 문장의 유려함과 치밀함에 있어서는 무진기행이 절정일 것입니다. 김승옥 작가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의 길로 가고 싶어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무진기행은 서울에서 세속적으로 출세했다고 할 만한 주인공인 `나`가 휴가를 얻어 어머니의 묘가 있고 어린 시절을 보낸 무진으로 내려가 며칠을 지내면서 만난 사람과 겪은 일에 관한 이야기와 과거에 대한 회상을 담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무진으로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영화로 치면 로드 무비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윤이 무진에서 일주일간 머무르는데, 회상 형식을 빌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시공을 넘나들며 서로 뒤섞여 있습니다.

주인공인 ‘나’를 보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했지만 무진의 안개에 둘러싸여 희미하게 보이듯이 삶에 대한 애정이나 자신에 대한 만족감은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결핍이 느껴졌습니다. 인물들이 엮이는 과정에서 현실과 타협하며 일상을 사는 1960년대 현대인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캐릭터, 구성, 사건 등 소설의 모든 장치가 이야기의 표현에 효과적으로 부합되고 제 기능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구어체의 자연스러운 대화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소설 또한 현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세계라면, 그 세계의 대화 또한 마땅히 그 공간 속에서 살아숨쉬는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단편답게 짧고 간결한 분량이지만 무진기행

은 기-승-전-결의 정석을 따라가면서 깔끔한 전개를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인상깊게 남는 작품으로는 무진기행 말고도 중국의 역사의 피를 이어받은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재치있게 꺼내는 '역사'와, 다양한 시점에서 한 인간의 변화와 타락을 서술하는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시대를 말하지 않고도 시대의 음울함을 그려내는 '서울 1964년 겨울', 그리고 다소 도덕주의적인 성관념에 입각해서 씌여진 감도 있으나 그 자체로 훌륭한 드라마를 갖고 있는 '서울의 달빛 0章' 등이 있습니다.

김승옥 작가가 열고 닫는 이 창문(단편소설)은 독자들에게 잠깐이나마 그의 세계 속 찰나를 볼 수 있게 하지만, 그 창을 통해 보여지는 것은 그저 고향으로 떠난 여행이나 지저분한 술집에서 보낸 하룻밤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창으로 보이는 것은 ‘존재’라는 이분법적인 짐이었습다.

우리 인간의 존재를 그렇게 단순히 어떤 범주로 분류해버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단편소설을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스쳐 지나가는 찰나일 뿐입니다. 단편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작은 창문을 열어줄 뿐이고, 창문은 곧 닫힙니다. 우리는 태어나고, 그리고 우리는 죽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이분법입니다. 설령 다른 작품들이 다 소각되고 망각되어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무진기행만 남아있어도

이 분은 충분히 축복받은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 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 P11

어떤 사람을 잘 안다는 것 – 잘 아는 체한다는 것이 그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비난할 수도 있고 적어도 평가하려고 드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에 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33

추억이란 그것이 슬픈 것이든지 기쁜 것이든지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을 의기양양하게 한다. 슬픈 추억일 때는 고즈넉이 의기양양해지고 기쁜 추억일 때는 소란스럽게 의기양양해진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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