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방문자들 - 테마소설 페미니즘 다산책방 테마소설
장류진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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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30대 여성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82년생 김지영’ 출간 이후 페미니즘은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되었으며, 관련 서적의 연이은 출간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여성들의 불평등한 사회적 지위에 대해 세계의 여성들이 여성의 올바른 권리를 되찾고자 노력했지만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으나 여전히 갈 길이 멀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곳에서 여성을 상품화하거나 비인간적인 대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책에는 젊은 20, 30대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실린 작품들로, 소설로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우리 이웃이나 가족에게 일어났을 법한 실체적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단순히 선악 구도로 ‘편’을 가르지 않고 사건 발생 이후의 혼란과 심리적 갈등, 주체와 객체를 분별하기 어려운 희미한 회색 지대를 탐구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불분명한 사건들,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운 사건들에 주인공(그녀)들이 있습니다.

새벽의 방문자들

주인공의 오피스텔에 새벽마다 낯선 남자들이 초인종을 누른다. 주인공은 자신의 오피스텔을 성매매업소로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벽의 방문자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관찰하는데 어느 날 헤어진 전남친도 찾아온다.

베이비 그루피

락그룹 멤버들이 미성년인 소녀들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섹슈얼리티를 자극하는 성적대상으로 취급 하는 이야기다

유미의 기분

성소수자인 고등학교 교사 형석은 수업 도중 무심코 내뱉은 “여자는 꼬리가 아홉이라서 꼬리를 잘 친다”는 말 때문에 유미로부터 지적을 받는다. 유미는 교사들의 성폭력을 포스트잇에 써서 벽에 붙여 ‘스쿨미투’를 주도한 학생이다. 형석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유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학교는 형식적으로 유미에게 사과하지만, 오히려 유미는 고립된다.성폭행을 당하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룰루와 랄라

노동자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멸시를 그녀는 여성 연대(남편을 포함시키면 남녀 연대)를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

누구세요

주인공은 늘 밝히기만 하는 남자 친구 재영과 헤어진다. 직장 상사의 성추행 때문에 사표를 냈다고 하니 화를 내며 가버리고 그게 끝이었다. 문제는 월세 입금 독촉을 받지만 돈이 없다. 데이트 통장에 월급에서 많은 돈을 입금을 한 것이다. 통장 명의는 재영 이름으로 되어 있어 돈을 돌려달라고 하지만 위자료라고 생각하고 못 준다는 것이다. 성적 대상으로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말이 궁금한 나머지 단숨에 읽어 버렸습니다. 성매매, 직장 내 차별, 그루밍, 성희롱, 성적 대상화 등을 소재로 이 시대의 여성들이 겪는 불합리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각 작품의 그저 평범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로는 답답하고 화도 나기도 했지만, 결국 작품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한 인격체로 존중받기를 바라며 서로를 조금만 더 배려하는 모습을 통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소망하는 작가들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제 이야기를 살짝 덧붙여 보자면, 저는 종가집 장녀입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에는 무엇이든지 오빠인 장남 먼저였습니다. 집안 어른들도 명절에 모이면, 한술 더 떠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다는 말도 듣기도 했습니다. ‘여자답게 행동하고 해야지 얌전하고 조신하게’라는 성차별적인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 누군가는 사회가 변해서 여성의 지위가 예전과는 다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리천장은 존재하고, 아직 이 사회에는 ‘여성’이라서 겪어야 하는 부당함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여성인 저는 ‘인간’ 자체로 인정받길 바랬고 대접받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절대 남자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라고, 누군가가 함부로 대하고 깎아내리고 돈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기술이 발전했고 사람들의 시각도 많이 변했다고 생각되는 요즘이니 의식도 그만큼 발전되길 바래봅니다. 많은 생각거리를 던지는 소설이었습니다.

새벽의 방문자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왔다. 여자는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비디오 폰에 달린 모니터로 남자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고 주문을 거는 듯한 태연함, 남에게 들키기 싫은 일을 할 때의 부끄러움, 돌연 술이 확 깨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의 주저함, 그러면서도 어쨌든 곧 벌어지게 될 눈먼 섹스에 대한 설렘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얼굴들. 머뭇거리는 그들의 얼굴이 비디오 폰의 카메라에 정면으로 잡히는 순간, 여자는 휴대폰 카메라로 모니터를 촬영했다. 그들이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리고 나면 찍어둔 사진을 프린트했다
- P31

결국 삶이란,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의 덧셈이나 뺄셈이 아닐까. 했어야 하는 일과 하지 못한 일의 곱셈이나 나눗셈일지도 모르고.
- P52

지긋지긋하다고, 작작 좀 하라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내가 지겨워졌다. 평화와 고요를 원하는 사람에게 얘기 좀 하자며 추근거리기는 싫었다. 어차피 우리는 싸움닭 체질이 아니었다. 도전을 포기하자 관계는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결혼, 거기가 우리의 목적지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전진했을까, 후퇴했을까. 아니면 결혼이란 관계의 제자리걸음인 것일까.
- P62

룰루의 눈 속에서, 조그만 꼬맹이가 조그만 손으로 터뜨린 조그만 폭죽 같은 불빛이 타올랐다가, 사그라졌다. 룰루의 그리움은 나의 고독이 되었다. 우리 것이 되었다. 나는 그 눈부시고 고결한 고통을 받아들였다. 내 뒤에 올 또 다른 여자의 고통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룰루,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당신의 권리예요. 그러니까 계속 싸워줘요. 공장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는 룰루에게 말하게 될 것이다.
- P82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때때로는 절망일지라도, 대체로는 위로와 용기을 주는 노랫소리라고 믿는다. 이 소설 속에서 몇몇 사람은 노랫소리를 들었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당신의 삶 속에서
- P87

초가 아니 진짜로, 하고 말하면서 몸을 돌려 내 앞에 와서 섰다. 교정의 가로등 불빛이 초를 희미하게 비췄다. 초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겨우 입을 열어 그러니까, 너도, 하고 답했다. 열여덟의 초와 지금의 초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쌍꺼풀이 없이도 큰 눈은 물론이고 입꼬리 양쪽으로 붙은 약간의 젖살과 그 주근깨들까지도. 나는 초의 얼굴을 새삼스레 살펴보다 비실 웃음이 터졌다. 잠깐 어리둥절해하던 초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초와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웃었다. 뭐가 웃긴지도 모르면서. 웃음은 잦아든 뒤에도 딸꾹질처럼 입가에 남아 좀체 완전히 멎지 않았다. 초와 나는 여전히 웃음을 좀 흘리면서, 천천히 문을 밀고 찬바람이 부는 바깥쪽으로 걸어 나갔다
- P144

우리는 결코 우리일 수 없었다. 보라는 애써 잊고 있던 장면 하나를 불러온다. 그해 여름, 우리는 함께 걸었고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보라의 곁에는 그가 있고 돌아보면 지나가 있다. 그러나 지나는 틈만 나면 돌아보는 보라를 대놓고 외면한다. 행렬의 밀도가 낮아질 때마다 보라는 긴장을 풀고 생각한다. 내게 상처를 준 건 너희들이잖아. 보라의 상상 속에서 언제나 지나는 그의 은밀한 연인이다. 그들은 그토록 보라를 기만하는 중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보라와 보폭을 맞추어 걷고 같은 내용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 P188

그 종이 한 장 한 장은,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한 놈 한 놈을 떠올리게 했다. 그 노랗고 작은 것들이, 그 보잘것없는 종이 쪼가리가 한데 모이자 크고 넓고 거대한 것이 이루어졌다. 많은 여학생들이 포스트잇으로 이루어진 그 네모난 세계에 연결됐다. 그것이 마치 자유로의 입구라도 되는 양 환호했다. 또한 많은 남학생들이 포스트잇으로 이루어진 그 정체불명의 세계에서 눈을 돌렸다. 그것이 마치 자신들의 내면으로 향하는 입구라도 되는 양 헐, 존나, 대박, 메갈, 꼴펨, 진지충이라는 말을 내뱉고 사라졌다.
- P214

형석은 사과할 자격을 잃어버리지 않는 인간이야말로 자신을 만만히 여기지 않는 이라고 생각했고, 승우는 사과하지 못했다는 것을 평생 기억하는 인간이야말로 누군가를 만만하게 여기지 않는 이라고 생각했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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