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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평점 :
어린 시절 분필로 교실 칠판을 가득히 채우거나 골목 담벼락에 낙서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분필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거나 칠판에 썼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오릅니다. 지금은 학교에서 분필이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손에 분필가루를 묻히던 기억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작은 마을인 앤더베리에 살고 있는 12살의 다섯 명의 친구들은 동네 친구이자 학교 친구로서 소꿉친구로 성장합니다. 1986년 당시 12살인 주인공 에드와 그의 친구들은 각자가 정한 컬러 초크로 자신들만의 비밀표시를 만들어 모임을 갖게 되는데 누군가 각자의 집에 표시를 한 초크를 기준으로 친구들은 숲 속에서 만납니다. 그런데 숲속에서 머리가 없는 여자 시신이 발견됩니다. 특이한 점은 신체의 각 부위가 절단이 되어있고 각각 떨어진 장소에서 발견된 점, 단 하나 머리가 발견이 되지 않은 채 수사는 그녀를 알고 지낸 학교 선생님이 의심받게 됩니다.
책은 1986년의 12살 에드와 그의 친구들의 성장과 함께 2016년이 된 현재 시점의 그들의 이야기를 오고 가며 펼쳐집니다. 유력한 용의자가 사건의 진법임이 밝혀졌지만 현재 그들에게 각각 흰색의 분필로 얼굴로 신체부위가 표시된 편지들을 받게 되면서 잠잠했던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나가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일반적인 추리 스릴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편의 아프고도 슬프고 담담한 시선이 어린 성장소설처럼 읽었습니다. 30년에 걸친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고리를 맺고 있는데, 작은 실수에서 빚어진 일들이어서 더 비극적으로 느껴집니다. 어린 마음에, 치기 어린 장난에, 또 순수한 마음에 한 작은 말과 행동이 걷잡을 수 없는 큰 사건이 되어 이후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뚱뚱이 개브가 미키의 형 션의 자전거를 강에 빠뜨리지 않았다면? 에드의 엄마가 해나 토머스의 비밀을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에드가 댄싱걸의 은반지를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비극은 일라이자의 머리가 사라져 버린 일이 아닐까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현장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면 사건의 진실이 더 빨리 밝혀지지 않았을까요?
저자의 필력이 자신의 인생의 어떤 터닝포인트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곳곳에 스며든 인생의 아이러니함, 그 안에서 겪는 부모와 종교, 권위, 질투, 암묵적인 동조 하에 벌어진 억울한 사람의 이야기들까지, 책은 장편소설로써 시종 에드의 시선을 중심으로 숲 속에서 벌어진 그 사건 뒤에 다섯 친구들이 어떻게 서먹서먹하게 되고 그 이후 각자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이면서 범인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의 극단적이고 예외적이지 않는 보편적인 판단은 한 소녀의 죽음 뒤에 가려진 많은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그들이 악의로 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결국엔 각자가 불행의 사건으로 몰고 간 사람들이었음을 보입니다. 친구가 당한 안타까움에 대한 보복으로, 반려견의 죽음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이유 때문에, 선생님의 아픈 사랑을 조금이나 위로해주려 한 물건이 걷잡을 수없는 파국으로 치달았을 때의 그 소년들은 어렸고 두려웠다는 점, 결국엔 돌고 돌아 30년이 흐른 시점이 되어서야 진정한 범인이 밝혀지기까지의 여정은 반전의 맛을 선사합니다.
가장 크게 아쉽다고 느껴지는 건 시원하게 밝혀내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다는 점입니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반복하면서 긴장감은 생길 정도로, 그러나 힌트는 감춰둔 채 이야기를 전개하며 독자들이 몰입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런 패턴은 책의 초반과 후반에는 몰입도 유지에 아주 효과적이었지만 중반부와 중후반부 즈음에는 지치게 만드는 면도 분명 존재합니다. 스토리 중간중간에 작가가 뭔가를 숨기고 있음을 계속해서 암시하면서도 알려주지 않고 다른 쪽으로 계속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주된 스토리인 초크맨의 정체, 살인 사건의 전말뿐만 아니라 여러 서브 스토리들이 엉켜있기 때문에 집중력이 조금 흐려지는 면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시원하게 다 끝맺음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대충 얼렁뚱땅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소 복잡한 스토리 라인과 일정 부분을 시원하게 풀어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운 책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어린 소년들의 성장기를 통해 어른들의 세계, 사랑에 대한 진실,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무언의 암시를 주는 것 같습니다.
호포에게 거짓말을 하기는 싫었지만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공유할 수 없는 게 있기 마련이다. 아이들에게도 비밀이 있다. 어른들보다 더 많을 때도 있다. 우리 패거리에서 나는 꺼벙이 역할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했고 조금 고지식했다. 나는 잡동사니를 수집할 만한 성격의 아이였다...나는 수집한 잡동사니들을 애지중지했다. 꽁꽁 숨겨서 안전하게 보관했다. 뭔가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아이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데, 나는 그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았고 오직 나만이 뭘 새로 넣거나 뺄 수 있었다 - P49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앞에서도 얘기했다시피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는 법이고,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지르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내게는 그것이 남의 물건을 슬쩍하는 것,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엿같게도 그걸 원래 있었던 자리에 갖다놓으려고 할 때만 꼭 탈이 났다 - P54
사람들은 그런 사건에 항상 호기심을 느낀다. 내가 보기에도 그럴 만한 요소를 전부 갖추고 있다. 특이한 주인공, 분필로 그린 섬뜩한 그림 그리고 소름 끼치는 살인. 우리는 역사에 흔적을 남겼다. 초크맨 모양의 조그만 흔적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씁쓸해한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사실은 윤색됐고 진실은 점점 모호해졌다. 역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이다 - P89
죽음은 우리 같은 어린아이나 우리 주변이 아니라 다른 데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죽음은 추상적이고 먼 일이었다. 나는 아마 션 쿠퍼의 장례식을 통해 서늘하고 시큼한 입김 바로 그 너머에 사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의 가장 놀라운 전략이다. 그의 차갑고 어두컴컴한 소매 속에는 전략이 많이 숨겨져 있다 - P164
흰색 초크맨이었다. 두 팔을 올리고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입을 ‘O‘ 모양으로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었다. 그 옆에 흰색 분필로 조잡하게 그린 개가 있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초크맨을 조심해
- P176
나뭇잎들이 오그라들고 쭈글쭈글해지다 결국에는 힘없이 나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시들시들하게 죽어가는 분위기가 모든 것에 스며들었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신선하거나 다채롭거나 순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온 마을이 자기만의 부연 타임캡슐 안에 갇혀서 잠시 유예됐다 - P255
어른이 된다는 건 환상이다. 따지고 보면 실제로 어른이 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냥 키가 커지고 털이 많아질 뿐이다. 나는 나에게 운전면허가 주어졌고 술집에서 술을 마셔도 잡혀가지 않는다는 데 지금도 가끔 놀랄 때가 있다. 어른이라는 허울을 걷으면, 한 해, 두 해가 태연하게 흘러가는 동안 켜켜이 쌓인 경험을 헤치면 까진 무릎으로 코를 흘리며 엄마, 아빠를 찾는....그리고 친구를 찾는 어린애가 숨어 있다 - P260
예단하지 말 것.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예단을 하는 이유는 그게 좀 더 쉽고 게으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들에 대해 너무 열심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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