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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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택배를 자주 이용하지는 않지만 코로나이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택배를 자주 주문하게 됩니다. 제가 사는 곳은 고층아파트인데, 종종 택배를 배달하시는 기사님을 보면 힘겨워보입니다. 택배가 가득 쌓인 카트를 끌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뒤 한 층 한 층 타고 내려오면서 차례로 배달을 하십니다. 가끔 뉴스에 택배기사님들을 상대로 갑질 아닌 갑질을 해서 논란이 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미스테리한 과거를 갖고 있는듯한 느낌을 물씬 주는 45살의 중년 남성인 주인공은 집도 절도 가족도 없이 행운동에서 택배기사 일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독특한 관점을 가진 주인공은 나름 자신만의 철학과 소신으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이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합니다. 매일 담배 한가치를 빌려가지 않는 여자는 우울증에 걸려 있다며 대화를 청하기도 하고, 경제철학을 배우러 오라는 할아버지는 이상하게 그를 잘 따릅니다. 보디가드를 달고 다니는 동네 바보, 미모를 자랑하는 손녀, 자신을 유혹하는 게이바 직원들 등 심지어 자신의 개인사를 털어놓으며 들어달라고 하는 사람까지 정말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또, 택배업이 서비스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네 사람들은 당연하게 요구하길 멈추지 않습니다. 원하는 곳까지 놔주고 가라는 명령부터 친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건의를 넣겠다는 둥 택배기사들이 현장에서 겪는 적나라한 모습들과 진상 고객들은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 ‘행운동’ 기사는 택배를 전달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사의 일상에 무례하게 침범하거나, 반대로 너무 무심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따뜻한 위로뿐인데요

작가는 평온한 하루 사이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연을 가지고 마주치고 새로운 사연을 만들어 가는지,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에서 벗어나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을 하고 그들의 일상을 묘사했습니다. 택배기사의 현실을 씁쓸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여주면서도 주인공의 정체에 대한 미스터리소설이었습니다.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소재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요즘 그런 책들에 비해, 신선하고 자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상의 소재들과 평범하지만은 않은 인물들의 평탄한 이야기가 작가 특유의 유머가 잘 스며들어있었습니다. 실제로 작가가 택배 일을 하면서 느끼고 경험했을 생생한 현장감과 자신의 삶을 흔들림 없이 걷고 있는 당당한 모습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읽으면서 그가 뭘 하던 사람인지에 대해선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더 좋았습니다. 마지막에 그에 대한 베일이 벗겨지면서 구구절절 설명했다면 실망감이 엄청 컸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모두 ‘침입자들’입니다. 주인공이 인간관계를 피해 살려고 하지만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의 얽힘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처럼, 폐쇄적으로 살던 그들에게 역시 주인공 또한 ‘침입자’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한 단면을 보는 듯, 어쩌면 누군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듯, 그렇게 이 소설을 읽었습니다.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택배기사의 삶에 깊은 공감을 느낀 건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그때의 나는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있었다.12시 정각이었고 막 서울에 도착한 참이었다. 여벌의 옷이 든 가방,9만 8천원이 든 지갑,마흔 다섯의 나이와 텅 빈 시간만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거리는 여름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고, 간혹 한 줌의 행인들이 힘없이 지나곤 했다. 길면 일주일,짧으면 이틀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를 돈을 들고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네개비째를 피운 후 핸드폰을 꺼냈다. 그제야 구직사이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사람을 상대하거나 어울릴 필요가 없는 일이라면 종류는 상관없었다. 남는 것은 육체노동 뿐이었다
- P12

연민에는 책임이 따른다. 책임을 지지 못하면 동정으로 전락하고. 누구에게도 누군가를 동정할 권리가 없다. 그게 내 생각이었다
- P60

하지만 이 일에서 배운 게 있다면 버나드 쇼의 말이 맞다는 거다. 돼지와 뒹굴어서는 안 된다는 것. 함께 더러워질 뿐이고, 심지어 돼지가 그걸 좋아한다는 사실
- P70

종종 있다. 아니 너무 많다. 택배기사를 자기 집 하인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일일이 싸울 수 없으니 보통은 그냥 넘어가지만 오늘처럼 비가 오고 배송이 늦어지는 날은 사소한 일에도 전투태세가 된다. 사람인 이상 어쩔 수가 없다. 혹은 미성숙해서 그렇거나. 부탁이라면 좀 짜증이 나더라도 해주지만 명령조에는 경기를 일으키는 나는 이런 날에는 신경이 더 곤두선다
- P74

고객님 자본주의 논리를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자본주의 논리로 해보죠. 이 택배 배송비가 천백원이에요. 아침에 분류하는 노동비, 배송 노동비, 차량유지비, 유류대, 보험료, 전화비, 클레임과 분실 비용, 제 이윤 등을 빼고 나면 여유분은 아예 없거나 많으면 일 원이나 이 원이 남을지 몰라요. 택배 하나당 말이죠. 그럼 설명 좀 해주세요. 도대체 일 원이나 이 원의 서비스가 어떤 것인지. 케인즈 관점의 거시경제학으로? 아님, 하이에크의 영향을 받은 신자유주의의 논리로?
- P79

육체노동의 장점이 있다면 적어도 퇴근 후에 집까지 일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서비스란 개념이 도입되면서 이마저도 사라졌다. 감정노동이 추가된 것이다. 그 감정의 쓰레기통이 내가 될 이유도 없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받아쳐야 한다면 받아쳐야 한다.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나라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 P81

일은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결국 아무도 만나지 않는 일이라는 게 유일한 매력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쓸데없는 인간들과 엮이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 P87

"같은 보폭과 같은 속도로 움직여야지. 말은 쉽게 들리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게 무척 힘들어. 얘기를 나눌 상대도 일상의 변화도 없어. 매일 똑같은 택배와 고독만 있지. 뭐, 성격만 맞는다면야 구도 행위로 볼 수도 있겠지만."
- P150

다음에 말을 섞은 건 건물 경비와 마스크가 싸울 때였다. 흔한 광경이었다. 갑도 을도 아닌, 병이 정에게 갑질을 하는 건물 안으로 배송을 하러 들어가려는데 환갑이 넘어 보이는 경비가 마스크를 보며 흥분하고 있었다
- P170

끼니를 걱정해야 하면 빈곤, 끼니는 해결되면 가난이겠죠. 가난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어요. 하지만 빈곤이 되면 죽음이라는 공포와 싸워야 해요.
- P186

사회는 집념, 포기하지 않는 노력, 뭐 그런 걸 강요하지만 글쎄요, 제 생각엔 희망이란 게 사람에게 힘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괴롭히기만 할 뿐인 것 같아요. 그럴 땐 포기하면 편하죠. 정말 그래야 할 일은 살면서 한두 가지정도인 것 같아요. 대개의 일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는 뜻이니까요
- P189

사람이란 한계치에 다다르면 나뭇잎 한 장이 얹혀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법이다. 한계치는 사람마다 다르며 죽는 것보다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다. 타인이 그 무게를 어찌 알겠는가? 설명 부부라고 해도 말이다
- P204

현대 교육의 핵심은 야성의 제거에요. 노예에게 야성이 있으면 다루기 힘드니까. 집에서 기르는 개와 마찬가지죠. 먹이를 주고 쥐꼬리만 한 안정감을 쥐여주면 나머지는 원하는 대로 부려 먹을 수 있죠. 교육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아요. 경쟁을 시키고 서열을 주면 알아서 서로를 증오하며 끌어내리고 밟고 올라서기 바쁘죠. 그러면서 태연한 얼굴로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건 자유라고 말하죠. 자유가 어떤 건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죠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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