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딩, 턴
서유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 소설 표지 제목을 보고 나서는 한동안 댄스 동호회에서 만난 두 남녀의 유쾌한 밀당 이야기가 주가 되는 로맨스 소설이라 생각했습니다. 연애 드라마가 연애의 달콤한 감정을 대리 체험하듯 담아내었다면, 이 소설은 두 남녀의 사랑의 온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언급하자면, 30대 남녀의 결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두 남녀는 스윙댄스 동호회에서 만납니다. 첫만남에 찌릿한 감정, 혹은 호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둘 사이를 무디게 만들어 준 '사랑'이란 감정은 어느덧 둘 사이의 만남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둘은 행복의 끝이라 일컬어지는 결혼을 하였습니다. 함께 집을 꾸미고, 대출을 갚아가고, 가끔 토라지면 사과를 하고, 화해를 하는 일상이 반복됩니다. 평범하지만 누구나 다 그럴 것이라는 결혼 생활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어느 한 시점이 결정타가 아니었습니다. 천천히 서로 다르다고 말하는 이혼 사유로 뻔하지만 그 뻔함을 부정할 수 없는 '성격차이'라 불리는 그 틈 사이로 균열이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스윙댄스 동작에 맞추어 추던 시냇물이 바위를 만나 나누어지듯 자연스레 두 사람은 갈라섭니다.

지원과 영진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너무나 미숙했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의 이유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생활의 이유를 모르는 듯합니다. 결혼은 동화책의 결말처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결론질 수 없습니다. 둘다 이 사실을 끝내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혼이란 사랑을 생활로 바꾸는 것입니다. ‘오래 연애하는 것 같은’생활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최종적으로 만나 이혼에 합의하면서 두 사람은 ‘생활의 실체’를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하지만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온 듯 합니다. 그들의 결별은 후련하다기보다는 찜찜한 기분을 남깁니다. 작가 서유미는 냉정하게 ‘쿨한’ 사랑의 종말로 산뜻하게 끝을 맺습니다. 어차피 어떤 사랑도 사소하게 시작하는데 이별이라고 반드시 원수처럼 끝낼 필요 없지 않은가? 상처 없이 깔끔하게 끝내는 결혼도 있지 않는가? 라며 묻고 있는 듯 했습니다.

이제 결혼생활 5년이 넘어가는 지금, 나의 춤, 우리의 무대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신혼 초에는 서로에 대해 잘 몰라서 힘들고 어렵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서로의 목소리만 들어도 감으로 느껴질만큼 서로를 잘 아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나만의 어려움과 힘겨움만 생각했다면 이제는 남편의 어려움과 짐도 보게 됩니다. 꿈같은 신혼시절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욱 안정이 되어가는 듯합니다.

남편에게 말하고 싶습니다.“서로의 반짝이는 순간을 기억하며 이 춤을, 이 무대를 멈추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과 함께, 영원히 홀딩, 턴을 반복하고 싶습니다. 내 곁에 오래 남아 함께 할 사람은 당신이니까요!”

잘 지내는 것 같던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가 깨질 때 상대의 불륜이나 변심, 파산, 폭력, 중독은 선명한 파경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로 명명하게 어려운 이유들이 자잘하게 집 여기저기에 곰팡이처럼 번져버린 경우도 있다. 볼 때마다 닦고 주기적으로 꺼내서 말리는데도 은밀하고 깊숙하게 번져나간 곰팡이를 목격할 때면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리며 손을 놓고 싶어진다. 곰팡이가 관계를 삼켜버리는 것이다
- P47

지원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조각으로 보이는 게 싫고 당신이 본 게 다가 아니니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이나 진심 같은 걸 봐달라고 호소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드러난 일부분만 보고 쉽게 단정 지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관계가 입체로 넘어가지 못하고 선이나 면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었다
- P95

지나온 어떤 순간, 인상적인 장면을 꺼내 후후 불어 맛볼 수 있다는 건 인생이 베푼 행운임에 틀림없다. 그런 면에서 인생에는 언제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우려먹을 수 있는 티백이 필요하다
- P99

인생의 어떤 순간에는 세탁의 시간을 지나는 것 같았다. 코스의 어디쯤에서 물이 차기를 기다렸다가 그 과정을 지나면 다음코스로 넘어간다. 유쾌한 기분이라고 할 순 없지만 더 나빠질 건 없다는 생각으로 몸의 힘을 뺀다. 지금은 거품이 일지만 다음 코스, 그 다음 코스를 지나면 결국 세제가 씻겨 내려갈 거라는 사실에 몸을 맡긴다. 어떤 일이든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지나가리라는 믿음이 필요한 때가 있다
- P114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단순한데 함께 살 수 없는 이유는 구질구질하게 길었다. 그래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사연들을 하나로 묶어 사람들이 성격차이라고 명명하는 것 같았다
- P122

결혼생활 내내 지원은 누군가를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가, 생각했다. 한 사람은 수천 개의 갈래로 나뉘고 수많은 변수로 이루어진다. 그나 그녀를 잘 안다고 생각해도 그 앎 때문에 오히려 관계 속에서 자주 길을 잃고 좌절하게 된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보석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 P130

지원과 영진이 알면서도 자주 잊어버리고 간과하는 것이 있다. 서로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 상대의 치명적인 단점을 바꿀 수 없다는 것. 일시적으로 변하게 하거나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완전히 바꿀 순 없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우선 자신을 바꿔보려고 노력한다. 상대의 단점 때문에 화내거나 싸우는 것보다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그 단점을 외면하거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이다
- P144

결혼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면서 행복해지려고 했던 거라면 이혼에 대한 고민도 앞으로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당사자인 두 사람이 그렇게 하는게 좋겠다고 합의 하는 순간 타당한 일이 된다.
- P147

지원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눈을 꼭 감은 채 한동안 따뜻한 물줄기 아래 서 있자 몸과 마음이 물컹해지며 어떤 부분이 찬찬히 녹아내렸다. 영진이 짐을 싸서 나간 뒤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울음소리가 물소리에 내려앉았다. 딱딱하게 뭉치고 굳어 있던 감정들이 비누처럼 물러지고 풀어졌다. 다 녹아버릴 때까지 울고 싶다고 생각하며 샤워기 아래 서 있었다. 눈물과 울음소리가 배수구로 빠져나갔다
- P152

하지만 상처가 없고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외로워졌다. 그 외로움은 같은 종류의 아픔을 겪은 사람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과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생겨났다
- P164

1년 전인가. 출근길에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확 뛰어들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특별히 힘든 일이 있었다거나 회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 아니었다. 그저 좀 지쳤고 사는 게 고단했다. 전치 4주 정도만 나오면 좋겠다고 바랐다. 일을 그만두지 않고 합법적으로 쉬려면 다치거나 아파야 했다. 병실에 누워 있고 싶진 않았지만 한 달만 주민센터에 안 나가고 마음대로 살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 P227

살다보니 누군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러서 신뢰가 깨지고 그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부수고 머리끄덩이를 잡고 서로 죽일 듯이 싸워야만 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같은 집에 살면서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로의 뒷모습을 보며 적의가 담긴 눈길을 쏘아대는 순간 헤어짐이 시작되는 것이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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