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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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단편들이 많은 부분 여자들(친구, 선배, 엄마의 친구들)간의 우정과 소원해짐, 그리고 재회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 감정에 대한 글들은 나름 잘 쓴 듯 하지만, 비슷한 주제가 반복하다 보니 지루했습니다. 더군다나,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우울하고 어두웠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들에서 특히 좋았던 점은 바로 이들의 불안한 마음을 바라보는 태도였습니다. 꼭 고쳐야한다는 의무나 강요 없이, 이들의 불안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작품 안에서도 인물들이 서로를 무리하며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서술하는 인물 역시 이들에게 어떤 편견 없이 그들의 감정을 감정 그대로 받아들이고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 같아 불편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각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불안정하고, 위태롭지만 그러면서도 단단하고 매력있습니다. 이 책에는 너무 작고 보잘것 없어 보여서 지나쳐 버리고 마는 그런 감정들을 끄집어 표현해내는 섬세함이 있는데 그 섬세함이 주인공들을 더 매력적이게 만들어줍니다.

작가는 특유의 섬세한 표현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인물들에게 공감하게 하고, 그들의 삶을 독자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듯 합니다. 또, 사람 사이에 질투, 증오 등 추한 감정과 사랑, 그리움 등 따뜻한 감정이 오가는 것을 표현하는 것에서 ‘사람’을 생각하는 작가의 인간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글이란, 기교나 논리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소설을 통해서 새삼 깨닫게 됩니다. 글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작가가 가진 사람에 대한, 세상에 대한 진정성 때문일 것입니다.

새삼 소설의 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소설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하는 일들을 마치 내 이야기처럼 경험하고 공감하게 만들어줍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각자 나름의 삶이 있다고 하면 쓰여져 있다고 해도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타인의 삶에 대한 멸시와 혐오의 감정이 좀 줄어들고 좀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냥 쇼코의 가상 친구나 일기장 정도였는데, 쇼코는 그냥 그 일기장에 일기 쓰기를 그만둔 것뿐인데, 일기장 주제에 쇼코의 삶에 개입하려고 했다니.
- P23

꿈. 그것은 허영심, 공명심, 인정욕구, 복수심 같은 더러운 마음들을 뒤집어쓴 얼룩덜룩한 허울에 불과했다. 꼬인 혀로 영화 없이는 살 수 없어, 영화는 정말 절실해, 같은 말들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욕망의 비린내를 맡았다. 내 욕망이 그들보다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이 일이 절실하지 않은 것처럼 연기했다
- P34

가끔씩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면 받지 않거나 건성으로 받곤 했다. 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냥 당연히, 원래 그렇게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내 상황이 나아지고 자리를 잡아서 떳떳해져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할아버지는 건강에 대해 가타부타하지 않았고, 되려 나이가 드니 감기도 잘 안 걸린다고 말했었다.
- P43

헤어지고 나서도 다시 웃으며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끝이 어떠했든 추억만으로도 웃음 지을 수 있는 사이가 있는 한편, 어떤 헤어짐은 긴 시간이 지나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심으로 남는다고
- P90

할머니는 일생 동안 인색하고 무정한 사람이었고, 그런 태도로 답답한 인생을 버텨냈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태도를 경멸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무정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 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 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그게 할머니의 방식이었다.
- P105

세상은 사람에 대한 사람의 사랑을, 제 목숨을 몇 번이고 팔아서라도 사람을 살려내고 싶다는 그 간절한 마음을 도리어 비웃었다. 사람에 대한 사랑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리너 너희 힘없는 인간들은 언제나 조심하고 사는 것이 좋을 거라고, 그 평범한 인간 여덟 명의 목숨 따위가 뭐가 대수냐고, 우리가 법이라고 하면 법이고 빨갱이라고 하면 빨갱이인 거라고, 꿇으라면 꿇으라고, 사람 같은 거 명분만 달아놓으면 쉽게 죽일 수도 있는 거라고, 그러니 입 다물고 말이나 잘 들으라고. 그들은 나라에 의해 살해되었다
- P108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그런 태도가 서서히 그들의 사이를 멀게 했고,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쌓아왔던 마음들도 더이상 그 관계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 P114

두려움은 내게 생긴 대로 살아서는 안 되며 보다 나은 인간으로 변모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었다. 달라지지 않는다면, 더 나아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계에서 소거되어 버릴 것이었다
- P129

"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 P164

침묵은 나의 헐벗은 마음을 정직하게 보게 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누군가와 깊이 결합하여 분리되고 싶지 않은 마음, 잊고 싶은 마음, 잊고 싶지 않은 마음, 잊히고 싶은 마음, 잊히고 싶지 않은 마음, 온전히 이해받으면서도 해부되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아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 무엇보다도 한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 P174

세상 제일 아프고 괴로운 건 나였으니까, 내 눈에는 내 고통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P203

다수의 선한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 세상을 망친다고 아빠는 말했다. 아빠의 말은 맞았지만 그녀는 이런 세상과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 승패가 뻔한 링 위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세상이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수그리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고,자신을 소외시키고 변형시켜서라도 맞춰 살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부딪쳐 싸우기보다는 편입되고 싶었다. 세상으로부터 초대받고 싶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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