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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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교련이란 걸 학교 다니면서 교육을 받은 세대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교련이 우리에게 뭘 가르치려고 했던 건지 참 납득이 안 되더군요

교련 수업 시간에 삼각건으로 팔이 부러졌을 때의 매는 법, 머리를 다쳤을 때 머리에 압박붕대 매는 법, 생화학 상황에서의 대처법 등을 배웠습니다. 실습도 하고, 실제로 삼각건 매기나 머리에 붕대 감기, 다리 다쳤을 때 부목대기, 출혈부위에 끈이나 벨트, 그리고 근처의 나무막대기 등을 이용해서 지혈하는 방법 등을 가지고 실제로 실기시험까지 봤었으니, 지금의 학생들이 보기에는 신기해보이겠죠

붕대감기라는 제목은 진경과 세연이라는 두 친구의 고등학교 때 경험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교련 시간에 둘씩 짝을 지어 머리에 붕대 감는 실기 시험을 봤는데 세연이 매우 긴장한 탓에 진경의 머리에 붕대를 원래 감아야 하는 것보다 한 바퀴 더 돌려 감았습니다. 붕대가 모자라자 당황한 세연은 붕대를 꽉 당겼고 진경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서로에게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그날로 인해 서로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책에서는 각기 다른 세대와 성향을 가진 많은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친구이자 선생님으로, 또는 언니이자 동생으로 서로의 삶에 가까이 맞닿아 있습니다.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은정, 불법촬영 피해자인 미진, 그로인해 집회에 나서게 된 지현, 남편과 이혼 후 홀로 살아가는 윤슬 등. 작품에서 여성들은 각자의 삶을 짊어진 채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진경 딸 율아와 같은 어린이집에 다녔던 서균의 엄마 은정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서균이 8개월 전 교회 수련회에 갔다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뒤 은정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할 단 한명의 친구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은정이 다니는 미용실의 미용사 지현이 있습니다. 은정이 서균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미용실에 왔을 때 가게 안을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서균과 그런 아이를 방치하는 은정을 비난하는 트윗 글을 올렸던 지현은 나중에 아이의 소식을 듣고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그 죄책감은 과거 불법촬영 피해자 친구를 돕다가 지쳐서 연락을 끊었던 데 대한 미안함을 다시 불러옵니다.

다분히 페미니즘 요소가 충분히 담겨있는 소설입니다. 분명 지금 시대가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진 것이 사실이겠지만, 여전히 아닌 부분도 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그 문제를 인식하기도 하고 눈치채지 못하기도 합니다. 작가는 함께 살아가는 여성의 목소리와 그들의 속마음을 담담하게 들려줍니다. 쉽게 읽히지만 그 문제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들끼리의 화합이라기보단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제시하는 듯합니다. 같은 여성이지만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기혼일 수도, 미혼일 수도 있고, 워킹맘일 수도 있고, 전업주부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다르면 함께 갈 수 없겠지만, 그래도 각자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고 말해주는 듯합니다. 진정한 연대는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라도, 자기가 누군지조차 잊은 채 요양원에 계신 엄마에게라도 전화를 걸어 말을 하고 싶었다. 딱 한 명만 있었으면, 은정은 종종 생각했다. 친구가, 마음을 터놓을 곳이 딱 한 군데만 있었으면.
- P20

우정이라는 적금을 필요할 때 찾아 쓰려면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적립을 해뒀어야 했다. 은정은 그런 적립을 해둬야 한다는 생각도,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예측도 하지 못했다. 그런 식의 적립과 인출이 너무도 부자연스럽다고, 노골적인 이해관계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친분을 쌓는 사람들을 남몰래 폄하했다.
- P23

이 거대한 산업의 어디까지가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고, 어디서부터가 여성을 아름다움에 억지로 묶어 자유를 빼앗는 일일까.
- P37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는 그런 분열과 자괴감 때문에 지현은 다른 사람들, 말하자면 바람 같은 사람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 P39

마흔넷, 마흔다섯, 지금 진경이 지나가고 있는 그 나이가 딱 그랬다.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싫었다. 자신도 싫었거니와 그 싫은 자신을 조금이라도 견디며 살려면 영양제를 먹고 운동을 하고 밝고 좋은 것들을 챙기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이 듦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더더욱 싫었다
- P89

세상이 변해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흐름의 중심을 향해 헤엄쳐 갈 나이는 지났다. 뒤로 물러나 물결에 실려 간다. 퇴적된 지층의 일부가 되어. 별다른 기여를 할 수 없으니 목소리를 높여 지분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윤슬에게도 치열하던 시간이 있었고, 이제는 힘주어 살기보다는 영화처럼 삶을 볼 시간이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 P95

서른 살 때는 마흔 살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사는 걸까 생각했어. 그 칙칙함, 꾸물꾸물한 울분을 왜 우리가 떠받쳐줘야 하는 건가 싶었지.나이 든 선배들이 똑바르고 훌륭하면 그렇지 못한 내가 미워서 그 사람들을 질투했고, 서투르면 나잇값이 못 하고 저렇게 서툴다고 흉을 봤어. 그냥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들이 싫었어. 지금 젊은 사람들은 안 그렇겠니?
- P115

아무튼 세상은 무서운 곳이니까 여자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연은 어째선지 조금 마음이 편했는데, 그건 ‘여자’라는 말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블라우스 밑 가슴께에도 족쇄처럼 채워져 있어서, 숨이 막히는 게 자신뿐은 아니라는 생각, 간신히 다른 아이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P126

진경은 거울일 뿐이었다. 진경을 보며 진경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을, 27년 전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 붕대를 들고 서 있던, 단지 완전히 성숙하지 못했고,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어서 엉거주춤 서 있던 어린 자신을, 세연은 한없이 미워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도,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게
- P142

몇 번의 격렬한 논쟁 끝에 채이는 형은과 다시 일상을 같이 하게 되었다. 친구이기는 하지만 자주 싸웠고, 싸우다가 화해하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사이가 되었다. 형은은 채이의 무심함과 종종 비합리로 흘러가버리는 낙관주의를, 아무나 함부로 믿어버리는 순진함을 종종 지적했다. 채이는 형은에게, 나이 많은 사람들은 무조건 불신하는 버릇, 갑작스럽게 분로를 폭발시키며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에둘러 타일렀다. 경혜와 서로 조심스러워 건드릴 수 없던 부분까지도 형은과는 숨김없이 건드리고 비판하고 설득하고 다투다가 풀어질 수 있었다
- P144

정직하게 말하자면, 편입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여성주의라는 이 거대한 흐름에 동참해서, 자신도 그 안에 있다고, 우리는 적이 아니고 같은 편이라고,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 여성은 여성에게 너무 쉽게 엄격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해요 서로를 그렇게 적대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어요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그건 세연의 진심이기도 했다
- P151

너는 가끔 사람들의 눈앞에서 문을 꽝꽝 소리 나게 닫아 버리잖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사람들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말이야. 그럴 때마다 말하고 싶었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좀 기다려 줄 순 없는 거니? 모두가 애써서 살고 있잖아. 너와 똑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전부 다 잘못된 거야? 너는 그 사람들처럼, 나처럼 될까 봐 두려운 거지. 왜 걱정하는 거니, 너는 자유롭고, 우리처럼 되지 않을 텐데. 너는 너의 삶을 잘 살 거고 나는 너의 삶을 응원할 거고 우린 그저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인데.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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