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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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태어난 아이의 경우 한국식 나이로 계산하면 한 살입니다. 예를 들어, 12월생은 탄생 순간 한 살을 먹었으니 해가 바뀌면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두 살이 됩니다. 반면, 외국의 경우 철저하게 생년월일 모두 계산해서 정확히 만 나이로 씁니다.

가끔 우리나라에서 쓰는 나이가 공식성상과 사석에서 다른 것을 두고 많은 외국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곤 합니다.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우 '만 나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 같은 통념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국 대표 지성’이자 ‘우리 시대의 늙지 않는 크리에이터’ 이어령 선생이 무려 10년의 산고 끝에 출판한 책입니다. 채집 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를 분석하며 우리가 생명화 시대의 주역임을 일깨워줍니다. 한국인의 몸에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듣기 힘든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의 유전자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던 그 이야기들 속에 한국인의 집단 기억과 문화적 원형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 자본의 시대를 열어가는 한국인의 이야기 중에서도 우리와 서양의 탄생 문화를 비교한 대목들이 흥미롭습니다.

서양인들은 아이의 나이를 셀 때 엄마 배 속에 있는 시간은 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문화와 문명이 아이를 키운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반면 한국인은 엄마 배 안에 있을 때 이미 한 살이 됩니다. 태아는 자신이 알아서 태반을 만들고, 호르몬을 분비하고, 필터로 걸러내고, 배 속에서 나갈 때를 결정합니다. 부모는 아이의 ‘태명’을 지어서 배 안에 있는 아기와 ‘태담’을 합니다.

또, 한국인은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를 안고 자며, 포대기로 업고 다닙니다. 최대한 엄마와 밀착함으로써 엄마 배 속 환경과 일치시킵니다. 산모가 미역국을 먹는 나라도 한국뿐인데, 이는 태중의 양수가 바닷물과 성분상 비슷해서라고 합니다.

사실 작가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무슨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나이가 차면 대충 원로 취급을 받는 한국 사회의 여러 인물들처럼 그도 그저 그런 사람인가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포착한 한국인의 이야기는 지금에 봐도 꽤나 통찰력이 있고 날카로웠습니다. 조금 낡은 한국의 모습을 다루는 것들도 있고, 지금은 사라진 한국의 풍습에 관한 이야기와 거기에서 유추한 것들을 한국인 정신의 근간이라 칭하는 모습이 약간 의아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진정한 한국인의 본질적 특징에 가까운 것이겠지요

올해에만 3권이 더 나올 예정인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의 1권입니다. ‘로마인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는 ‘한국인 이야기’의 보따리, 다음 보따리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지 벌써 기다려집니다.

아니, 아무 이유도 묻지 맙시다. 이야기를 듣다 잠든 아이도 깨우지 맙시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게 되면 자신이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이제는 아이들에게 들려주려고 합니다. 천년만년을 이어온 생명줄처럼 이야기줄도 그렇게 이어져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인생 일장춘몽이 아닙니다. 인생 일장 한 토막 이야기인 거지요.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선녀와 신선을 만나 돌아온 나무꾼처럼 믿든 말든 이 세상에서는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옛날이야기를 남기고 가는 거지요. 이것이 지금부터 내가 들려줄 ‘한국인 이야기‘ 꼬부랑 열두 고개입니다
- P12

나는 한때 "손가락으로 검색하지 말고 머리로 사색하라"고 젊은이들을 향해 큰소리친 적 있지만 이제는 거꾸로다. "사색하려면 검색하라"이다
- P26

인간과 생명과 자연을 보는 차이가 바로 이 한 살 나이 차이에서 비로된다. 천년만년 다른 문화와 문명 그리고 앞으로 올 미래의 세월에 큰 차이가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최첨단 초음파 기술이라 할지라도 앞 못보는 심봉사를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모태의 생명 공간을 들여다보는 것은 사람 눈의 수정체도, 카메라의 렌즈도 아니라는 것. 그것은 오직 생명의 예지를 지닌 ‘마음의 눈‘ ‘영혼의 눈‘ 이라는 점이다
- P63

걷고 뛰는 두 발의 힘이 오늘의 인간과 그 문화 문명을 만들어 냈다고 하면 비웃음을 살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도 부정 못하는 것은 물건을 만들고 다루는 기술은 손에서 나왔을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 행동의 힘은 발과 다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가정이다. 인간은 직립 보행을 하면서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문화 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손으로 쥐고 잡는 능력 때문에 짐승과 다른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면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긴팔원숭이 같은 유인원들이 먼저 인간으로 진화했어야 옳았다.
- P83

일찍이 이능화 선생이 <조선무속고>에서 지적한 것처럼 (삼신할머니 의)‘삼‘ 은 한자의 삼(三)이 아니라 태(胎)를 뜻하는 우리 고유의 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맞는 말이다. 요즈음 말로도 탯줄을 자르는 것을 ‘삼 가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삼신을 ‘三神‘이라고 해온 것은 ‘생각‘을 ‘生覺‘ , 사랑을 ‘思郞‘ 으로 써온 한자 중독증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삼신의 뜻을 토박이말로 바꿔놓으면 꼬부랑 고개의 꼬부랑 할머니가 된다
- P120

2,000년 전 로마의 정치인 세네카는 스와들링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부모는 아직 유약한 정신을 가진 아기들에게 약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견뎌내도록 강요한다. 그들은 울고 발버둥치려 하지만, 아직 미성숙한 그들의 몸이 곧게 자라지 않고 굽을 까 봐 단단히 천으로 묶어둬야 한다. 그런 다음 차근차근 교양 교육을 시키는데, 만일 이 말을 듣지 않고 거부하면 겁을 주어야 한다‘ 아기를 천으로 꽁꽁 감싸주는 스와들링은 아이가 힘들어해도 강요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겁을 줘서라도 뜻을 이뤄야 한다는 폭압적 부모론이다. 적어도 세네카의 말 속에 아기의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P186

언어학자들은 이 의성어가 가장 발달한 말로 한국어를 꼽는다. 우리가 전 세계에서 가장 의성어를 많이 쓴다는 건 이미 객관적 통계로도 밝혀진 바 있다. 정식으로 사전에 나와 있는 것만 8,000개다. 일본은 2,200개, 독일은 우리의 7퍼센트 수준인 541개이니 말하 것도 없다
- P237

어머니가 밖에 나가면 서양 아이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는 그 방대한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맨 첫머리가 그렇게 시작한다. 한국의 소설에서는 눈 씻고 보려고 해도 그런 이야기를 쓴 소설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한국의 아이들은 ‘나들이‘란 말을 알기 때문이다. 나들이의 집합 기억이 그와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다.
- P305

옛날 옛적 갓날 갓적에"라는 말만 떨어지면 갑자기 세상이 달라진다. 지렁이가 용이 되고 닭이 봉황으로 바뀌는 이야기 세상 말이다. 밭일을 하던 농부가 우렁각시를 만나고 산에 간 나무꾼이 선녀와 산신령과 이야기한다. 마을은 어제의 마을이 아니다. ‘전설의 고향‘은 장꾼들이 쉬어가던 보통 바위를 장수바위로 바꿔놓고 미역 감던 개천을 천 년 묵은 이무기가 사는 용담이 되게 한다.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이 나이를 먹고 난 뒤에도 어린 시절에 놀던 뒷동산처럼 변하지 않는 거다. 옛날이야기는 기억의 둥지 속에서 알을 까고 나온다. 화롯불은 이야기를 낳는 불의 자궁이고 베갯모에 수놓은 십장생은 꿈의 오솔길이다
- P357

임어당은 서양과 중국의 예술을 비교한 아포리즘을 남겼다. ‘이 세상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곡선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죽어 있는 것은 모두가 경직된 직선이다. 자연은 항상 곡선을 탐한다. 보아라. 초승달이 그러하지 않은가. 솜 같은 구름. 꼬부랑 언덕, 굽이굽이 흐르는 냇물이 그렇지 않는가. 한편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 ? 마천루, 철도선로, 공장굴뚝, 모든 게 그렇듯이 언제나 직선적이고 꼿꼿이 솟아 있다.’ … 꼬부랑 고갯길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라 ‘자연=신’이 만든 길이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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