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장의 온도 -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이덕무의 위로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월
평점 :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책만 읽는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일상 속 숨은 아름다움을 발견해 문장에 녹여내는 ‘에세이스트’였습니다.
그런 그답게 책에는 정말 많은 소재가 나오는데, 그것은 인물, 자연, 감각 등 다양합니다. 이웃노인이나 동네 아이들의 모습, 아침저녁의 노을빛 등 일상에 대한 묘사가 생생합니다. 쉽게 넘길 수 있는 대상도 따스한 시선으로 관찰했던 그의 섬세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엮은이 한정주는 이덕무의 문장이 동시대 다른 선비들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고 합니다. 아마도 본인이 처한 환경 덕분이 아닐까? 문장에 뛰어났지만, 양반이 아니니까 틀에 박힌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자신의 관심사를 파고들어 표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단숨에 읽기보다 시를 즐기듯 한편씩 곱씹으며 오랫동안 곁에 두고 조금씩 읽기 좋았습니다. 한자를 잘 알았더라면 한시를 직접 읽으며 이덕무가 의도한 음률 같은 것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이덕무는 스무 살 남짓부터 많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과연 글을 쓴 것처럼 살아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찍 현명해 진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는 것 또한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가 살아가면서 느꼈던 삶의 다양한 온도가 문장에 그대로 드러나있어서, 그만의 고유한 향기와 색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읽다보면 그의 문장에 저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특별하게 정해진 형식이나 기술이 없지만 오래도록 여운이 남습니다.
책에는 문장 자체가 주는 울림 외에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올바른 삶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문장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일상의 가치와 함께 그의 잔잔한 문장에 나도 모르게 위로받게 됩니다. 마음에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게 해주는 그의 문장들은 꽤 긴 여운을 남긴 채, 아직도 맴도는 듯 하네요
글을 읽을 때 그림이 그려지면, 그 글은 진실로 좋은 글이다. 글이란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 P16
쇠 절굿공이도 오래 사용하게 되면 손상되고 닳아서 짧아진다.이로써 시원스럽게 이기는 자 역시 보이지 않는 손실을 입게 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너무 굳세고 강한 것은 믿을 수 없다 - P43
동이를 묻고 물고기를 기른다. 열흘이 지나도록 물을 갈아 주지 않았다. 이끼가 끼어 마치 청동처럼 변해 사삼의 옷을 물들일 지경이다. 금붕어도 온통 연녹색이 되었다. 머리를 늘어뜨리고 비실비실 헤엄치고 있다. 시험 삼아 깨끗한 샘물로 갈아주고 먹잇감으로 붉은 벌레를 던져 주었다. 마치 토끼를 쫓는 매처럼 생기가 돈다. 물 위로 반쯤 몸을 드러내고 서서 사람을 향해 말을 하려고 한다 - P49
이 모두가 지극히 세밀하고 지극히 미미한 것이지만 제각각 그 속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지극히 오묘하고 지극히 변화하는 만물의 원리가 담겨 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의 높고 넓은 것과 고금의 오고 가는 것을 관찰하면 장관이고 기이하지 않은 것이 없다 - P53
정신이 맑을 때 한 송이 꽃과 한 포기 풀과 한 덩어리 돌과 한 사발 물과 한 마리 새와 한 마리 물고기를 조용하게 관찰한다. 즉시 가슴 속에 연기가 무성하게 피어오르고 구름이 가득 일어난다 - P68
약초 밭두둑 난간의 금봉화가 새벽 비에 붉은 색깔이 가셔 버렸다. 어린 게집종이 꽃을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세속의 먼지에서 벗어난 통달한 선비가 이 모습을 보고 눈동자를 활짝 열며 말했다. "패왕 항우가 우미인과 울며 이별할 때 바로 이와 같았을 것이다." - P76
널리 알면서도 편찬하거나 저술하지 못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이나 다름없다. 이미 떨어져 버린 꽃이 아니겠는가. 편찬하거나 저술하면서도 널리 알지 못하는 것은 근원이 없는 샘물이나 다름없다. 이미 말라 버린 샘물이 아니겠는가. - P80
천리마의 한 오라기 털이 하얗다고 해서 미리 그 천리마가 백마라도 단정 지어서는 안된다. 온몸에 있는 천만 개의 털 중에서 누런 털도 있고 검은 털도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이러한 이치로 보건대, 어찌 사람의 한가지 면만을 보고 그의 모든 것을 판단하겠는가 - P82
아무 일이 없을 때에도 지극한 즐거움이 있다. 다만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훗날 반드시 문득 깨치는 날이 있다면, 바로 근심하고 걱정하는 때일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느 관청의 수령이 평온하고 조용한 성품을 갖춰서 이렇다 할 일을 하지 않아 백성들에게 베푼 혜택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후임으로 온 수령이 몹시 사납고 잔혹했다. 그 때서야 백성들은 비로소 예전 수령을 한없이 생각하며 그리워했다. - P140
편의에 안주하는 사람은 큰 고비를 만나면 어찌할 줄 모른다. 자신이 해오던 대로만 하는 사람은 큰 기회가 와도 붙들지 못한다. 임시방편으로 그때그때를 넘기는 사람은 큰 근심거리를 만나게 마련이다 - P145
망령된 사람과 더불어 시비나 진위나 선악을 분별하느니 차라리 얼음물 한 사발을 마시는 것이 낫다. - P151
겉으로만 점잖은 척 단장하고 속마음은 시기와 거짓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은 좋아하려고 해도 한 푼의 가치가 없고 미워하려고 해도 몽둥이로 때릴 만한 가치조차 없다 - P176
어린아이의 모공과 뼈마디는 모두 어른만 못하다. 그러나 유독 눈동자만은 더하거나 덜하지 않다.어린아이의 눈동자를 보라 바로 크게 기이한 조짐이다 - P200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인가 아니면 말이 적은 사람인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면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겠는가? 하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면 구태여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자칫 나를 알아 달라고 구걸하는 추태로 보이지 않겠는가? 조용히 앉아 있다가 다시 만나지 않은 것만 못하다. - P215
원망과 비방하는 마음이 점점 자라나는 까닭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면 진실로 즐겁다 그러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 - P227
마음에 맞는 시절에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고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고 마음에 맞는 시와 글을 읽는다. 이것은 최상의 즐거움이지만 지극히 드문 일이다. 이런 기회는 일생 동안 다 합해도 몇 번에 불과하다. - P239
머리로만 글을 쓰는 사람은 애써 꾸미거나 자꾸 다듬으려 할 것이다. 심장으로만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뜻과 기운을 어떻게 든 새기려고 힘쓸 것이다. 이것은 모두 가식이고 인위다. 그러나 온 몸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몸 구석구석 가득 쌓여 있는 말과 글을 도저히 참거나 막을 수 없을 때 그 말과 글을 그냥 토하고 뱉아낸다. 이것은 모두 자연이고 천연이다 - P301
독서하지 않으면 작게는 정신이 혼미해져 잠이나 자고 노름이나 하게 된다. 더욱이 크게는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재물과 색욕에 빠지게 된다. 오호라!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독서할 따름이다. - P304
글이란 반드시 불온해야 하고 마땅히 시대와 불화해야 한다. 김수영 시인 왈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3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