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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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올리브 키터리지가 사는 메인 주에 있는 크로스비라는 해안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어떤 글에서는 올리브가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지만 올리브가 지나가는 사람 정도로 언급되는 글들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매우 차분하게 서술되지만 각자의 인생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저자인 스트라우트는 일순간에 뒤바뀌는 감정이 자아내는 분위기, 공기의 긴장감 같은 것을

굉장히 섬세하게 잘 살려서 썼습니다. 그리고 단편처럼 구성된 형식이지만 서로서로 때론 긴밀하게. 때론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꽤 큰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누군가를 파헤치려고 쓰지 않고, 누군가를 인위적으로 여러 명의 관점으로 조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각기 올리브를 이렇게저렇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건 올리브를 일부러 드러내려고 하는 서술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나 자기 눈에 비치는(가령 올리브가 같은 공간에 있다거나 지나가는 걸 보았다거나) 일들이 그 사람 중심으로 서술될 뿐인데 그 과정에서 독자는 올리브 키터리지에 대해 예상치 못하게 알게 되는 일들이 생기거나 하는 것입니다. 올리브는 엄격한 학교 선생님이었구나,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학생도 있구나, 덩치가 크구나, 저런 여자와 어떻게 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말하는 이웃도 있구나, 남편 헨리와는 이런 말들을 했구나, 헨리와의 관계에서 이런 위기가 있었구나, 아들 크리스토퍼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졌구나 하고.

이 책은 하나의 시간으로 또는 시간순으로 정리된 것도 아니어서 독자는 뒤죽박죽 파편적으로, 그러나 오히려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한 사람에 대한, 한 마을의 이야기에 대한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마치 드론이 마을 주위를 낮게 날며 관찰 하듯 이 집 저 집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인칭이나 시점이 자주 바뀌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많아서(심지어 잠깐 등장하는 사람들 이름까지 다 나온다) 헷갈리지만, 13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너무 생생하고 매혹적입니다. 그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13편 모두 비슷비슷한 전개로 이루어지는 점, 이야기를 지연시키는 작가의 서술 등은 확실히 읽는 맛을 떨어지게 합니다. 꼭 13개나 썼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400페이지가 훨씬 넘는 분량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 분명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매 이야기가 전하는 삶의 뼈아픈 진실들은 가슴 속에 잔잔한 파문을 남깁니다.

이기적이고, 내가 옳고 남들은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순간,남들의 가치관에 동의하지 못할 때 느끼는 짜증, 화가 생기는 순간 등 외모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편견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집요하게 관찰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차피 인생이란 누군가는 배신하고, 누군가는 사랑에 실패하고,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마저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이 들어 결국 누군가는 떠나보내고, 누군가는 홀로 남겨져도, 그 상실감과 쓸쓸함과 적막함 사이로 새로운 사랑이 피어나서 또 새로운 희망이 찾아올 거라고 하는 것, 그 진부하고 평범하지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이 평범해 보이는 우리들의 얘기지만 그 이면을 파헤치고 들어가 보면, 까칠까칠하고 울퉁불퉁한 삶의 치부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도 그 모든 고통은 견딜만 한 것이고 그 견디어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그래서 그것과 타협하라고 위로하고 있습다.

우리가 느끼는 노후의 삶은 어느 순간 갑자기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한 시간 한 시간의 오늘의 하루가 모여 세월을 만들고, 그 세월이 나를 언젠가는 노년(老年)의 올리브와 같은 시기를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시도하고 늦게 인정 받은 작가의 프로필처럼 이야기가 자연스럽고 묘사에서 내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되는 그 시점에서 다시 시작되는 인생, 그럭저럭 살아내는 매 순간의 삶이 결국은 인생의 희망이라고 올리브를 통해 저자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단순하고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이런 이야기들이 이 소설을 통해 꽤나 깊숙이 가슴에 밝히는 건 그만큼 작가가 능력이 출중해서겠지요! 이야기의 결말과 내용보다 그 분위기에 취해 읽은 소설을 꽤 오랜만에 만난듯 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슬프게 돌아간다. 그리고 새 시대의 여명은 언제나 있다.
- P78

그 순간 케빈은 방금 전 그 느낌은 희망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희망은 마음의 암이었다. 그는 희망을 원치 않았다. 원치 않았다. 이 연약한 초록빛 희망의 싹이 가슴속에서 움트는 걸 더는 참을 수 없었다.
- P84

올리브는 감은 눈 사이로 창 너머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붉은 빛을 본다. 햇살이 종아리와 발목을 따스하게 덮는 게 느껴지고, 손바닥 밑으로 햇살이 드레스의 부드러운 표면을 따사로이 감싸는 게 느껴진다. 참으로 잘 나온 드레스를. 커다란 가죽 핸드백에 챙겨 넣은 블루베리 케이크 한 조각을 생각하니(곧 집에 가서 마음 편히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다. 좋다. 이 불편한 거들을 벗어던지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좋다.
- P115

이 말을 하는데, 갑자기 뭔가를 되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측량할 수 없는 인생의 어떤 상실이 커다란 바윗덩이처럼 들어올려지고, 바위 밑에서-데이지의 푸른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예전의 위안과 상냥함을 발견한 듯이.
- P163

하먼이 지금 알지 못하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인생은 뼈와 마찬가지로 서로 얽혀 직조되며 어긋난 뼈는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 P187

누가 뭐래도 삶은 선물이라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수많은 순간이 그저 찰나가 아니라 선물임을 아는 것이라고.
- P227

세상에서, 이 이상하고 불가해한 세상에서 그녀는 자신이 대체 누구라고 생각했던 걸까? 올리브는 옆으로 돌아누우며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당기고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켰다. 튤립을 심을 것인지를 곧 결정해야 할 것이다. 땅이 얼어버리기 전에.
- P293

"그녀는 삶이 두려운 늙은 여자일 뿐이다. 요즘 올리브가 아는 거라곤 해가 떨어지면 잘 시간이라는 사실뿐이다.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낸다는 그 말. 올리브는 확신하지 못한다. 거기에도 여전히 파도는 있지, 올리브는 생각한다"
- P314

저 아래에서 물수제비 뜨기에 여념이 없던 에디 주니어를 생각한다. 그 느낌을 올리브는 다만 기억할 수 있을 뿐이다. 돌멩이를 집어서 힘을 조절하여 바다에 던질 여력이 있는 젊음을. 아직 그 짓을 할 만한, 망할 돌멩이를 던질 힘이 있는 젊음을.
- P325

죽는다는 말 그렇게 함부로 쓰지 마라, 얘야. 어떤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진짜로 죽어가고 있어. 그것도 끔찍하게. 그런 사람들은 너 같은 입장이라면 기뻐할 걸. 약혼자에게 버림받은 것쯤이야. 그런 사람들에게 모기 한 번 세게 물린 거나 다름없지
- P328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몇 해 전, 충치를 때우면서 치과 의사가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돌리는데, 외로움이 너무 깊어서인지 그것이 마치 죽도록 깊은 친절인 것처럼 느껴져 올리브는 샘솟는 눈물을 숨죽이며 삼킨 적이 있었다. ("키터리지 부인, 괜찮으세요?" 치과 의사는 물었다.)
- P403

매일 아침 강변에서 오락가락하는 사이, 다시 봄이 왔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봄이, 조그만 새순을 싹틔우면서.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봄이 오면 기쁘다는 점이었다. 물리적인 세상의 아름다움에 언젠가는 면역이 생기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사실이 그랬다. 떠오르는 태양에 강물이 너무 반짝여서 올리브는 선글라스를 써야 했다.
- P461

봄은 싱그러웠고, 그건 거의 습격이었다.
- P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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