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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은 무(無)라는 점은 자극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보다 , 기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흥신소에서 탐정일을 하다 퇴직한 주인공 ‘기 롤랑’은 자신에 대한 일체의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자신에 대한 존재 증명을 상실해 버린 그는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을 찾는 것처럼 자신의 과거에 대해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한 장의 귀 떨어진 사진과 부고를 단서로 그는 바의 피아니스트, 정원사, 사진사 등 자신과 관련된 기억을 한 가지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나면서 점점 자신의 기억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기억 속에서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과
대면합니다
그 과정에서 받은 사진들을 토대로 자신이 차례로 프레디 하워드 드 뤼즈, 페드로, 페드로 맥케부아, 지미 페드로스테른 등의 이름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생각하며, 그와 드니즈라는 여성, 프레디와 게이 오를로프라는 여성 등 남녀 네 사람이
므제브로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후 망수르라는 사진 작가를 통해 드니즈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게 됩니다. 과거의 단서들을 추적하면서 자신일지도 모를 이름들을 듣게 될 때마다 정말 자신이 그 인물이었다고 확신하며
과거의 파편들을 하나둘씩 맞춰나갑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여러가지 이름 중 어느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경마기수인 앙드레 빌드메르를 만나서 페드로 맥케부아라고 불렸던 기 롤랑의 과거가 일정부분 밝혀지게
됩니다. 그는 드니즈, 게이 오를로프, 프레디와 함께 므제브로 갔으며, 그곳에서 기 롤랑과 드니즈 둘이
스위스 국경을 넘으려다 이들을 도와주겠다는 두 명의 인물에게 속아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후 기 롤랑은 기억찾기의 마지막 시도를 해보기로 하고,’어두운
상점들의 거리,2번지’를 찾아나서며 끝을 맺습니다.
우울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문장, 프랑스의 낯선 지명, 등장인물의 이름 때문에 쉽사리 읽히지 않았습니다. 특히 더 읽기 어려운 부분은 주인공이 자신의 기억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사실을 나열한 듯한 방식을 쓴다는 것입니다.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기억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입니다. 사진 몇 장과 주변인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자신의 과거를 확신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기억이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날이나 일을 기억해야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세월호 사건과 같이 힘들고 아픈 기억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억과 시간은 이런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조금씩 잊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의도적으로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조차 잊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에서 하나 둘씩 잊어가는 것들이 쌓이다
보면 우리는 또 다른 의도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잃게 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것들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 다른 것들을 잃게 되는 것 말입니다.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 버린다. 미(美)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 P75
나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혹시 그는 나를 알아볼 것인가? 매번 나는 같은 희망을 품고 매번 실망한다. - P87
그 여자가 나에게 이 질문을 어찌나 강요하는 듯한 어조로 물어왔는지 나는 처음으로 절망감에, 아니 절망감보다도 더한 감정, 모든 노력, 모든 유리한 점, 모든 선의에도 불구하고 넘을 수 없는 장애물과 부딪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느껴지는 그런 충격에 사로잡혔다. - P121
골목들과 대로들의 저 미궁속에서 어느날 드니즈 쿠드뢰즈와 나는 서로 만났던 것이다. 거대한 전기 당구대 위에서 때떄로 서로 마주쳐 부딪치기도 하는 수천수만 개의 작은 당구공들처럼 파리 시내에서 오가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따라가는 저 도정들 가운데서 서로 마주치는 도정들. 그런데 그것으로부터 이제는 아무것도, 심지어는 하나의 반딧불이 지나가면서 남기는 저 가느다란 빛의 줄무늬조차도 남은 것이 없는 것이었다 - P156
어제 저녁에 그 거리들을 훑어 지나가며 나는 그 거리들이 전과 다름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들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건물들도 거리의 폭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 시절에는 빛이 달랐었고 다른 무엇이 대기 속에 떠돌고 있었다… - P170
여러 가지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난 후(나는 신부님에게 내가 사설탐정 노릇을 했었노라고는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원천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고 한 당신의 말은 옳았습니다 - P183
이 도시 안에서, 발걸음을 서둘러 걷고 있는 그 모든 그림자 같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가 서로 길을 잃은 채 헤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 P190
그녀는 반 알렌이 그녀에게 주는 원본에 따라 작업을 하거나 바느질을 했고 나는 장의자에 누워서 회고록들 중 어떤 것이나 아니면 그 여자가 그토록이나 좋아했던 마스크 총서의 탐정소설들을 읽었다. 그 저녁들은 내가 경험한 유일한 안도의 시간, 우리가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탈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환상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 P221
그 소녀는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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