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의 신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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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촉천민은 공공도로에서 걸으면 안 되고, 발자국을 지워야 되고,말할 때는 입을 가려야 한다고. 브라만 계급이나 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이 부딪히거나, 발자국을 밟거나,오염된 숨결이 닿아 불결해지지 않도록. 신분에 따른 차별이 철저하므로 누가 누구를 사랑해야 되는지 또한 정해져 있습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파라반’이라는 불가촉천민이라는 대해서 다룬 소설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론으로 아는 것과 소설을 통해서나마 실상을 보는 것의 차이가 매우 컸습니다. 그들이 견뎠어야 할 비인간적인 삶의 모습이 비로소 가슴에 와닿더군요

처음에는 작가의 자전적 성향이 짙은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누구인지조차 분명치 않았습니다. 암무와 그녀의 가족들, 암무의 쌍둥이 자녀인 쌍둥이 라헬과 에스타, 그리고 벨루타까지, 그들은 ‘작은 것들’이란 점에서 모두 주인공이기도 했습니다.

내용은 신분차이로 이룰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읽을 수록 드러나는 것은 1960년대의 인도의 모습과 역사였습니다. 계급을 부정하는 공산당원들조차 카스트제도를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치이념을 내세우고, 그들의 사랑이 정치사건화 되면서 암무네 가족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아픔을 겪게 됩니다. 경찰의 폭력을 고스란히 목격하는 아이들은 시대의 아픔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연약한 존재들의 무기력함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문장마다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나며, 연약한 존재들의 아픔과 시대적 슬픔이 매우 잘 어우러져 있는 책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건축을 전공한 작가는 소설을 참 정교하게 설계했습니다. 시처럼 독창적인 언어로 입혀진 문장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소설 단 하나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가라는데, 상 받을만 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맨 앞에는 존 버거의 인용문이 나옵니다. “하나의 이야기가 마치 유일한 이야기인양 이야기되는 일은 앞으로 다시는 없을 것이다.” 이 말은 곧, 이야기마다 복잡한 배경과 여러 관점이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말과 감정 표현을 않는 이상한 에스타'처럼 보이는 하나의 이야기는 '이혼한 엄마 암무와 쌍둥이 동생 라헬을 잃은 불행한 아이'라는 이야기이자 '사랑하는 벨루타 아저씨가 죽도록 맞는 걸 목격하고 그의 앞에서 거짓 증언' 해야 했던 이야기이자 '큰 카스트 제도에서 짓밟힌 엄마와 아저씨의 작은 사랑' 이야기니까요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초라해지는 큰 것들이 아닌, 절대 변하지 않는 작고 약한 것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본질적으로 '작은 것들의 신'밖에 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의 단면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우리의 인생이 펼쳐지는 장인 ‘역사’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작은 것’들에 의해 발전하고 성숙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우리에게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려고 했나 봅니다.

 

작은 사건들. 평범한 것들은 부서지고 재구성된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갑자기 그것들은 한 이야기의 빛바랜 뼈대가 된다
- P53

깃발을 높이 들고 분노로 팔근육이 불끈 솟았던 사람이 그였기를 바라게 되었다. 주의 깊게 쓴 쾌활함이라는 가면 아래에 그녀가 너무나도 격분하는 독선적이고 질서정연한 세계에 대항하여 살아 숨쉬는 분노가 감춰져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녀는 그 남자가 벨리타였기를 바랐다
- P244

암무는 크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무서운 거미줄을 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손님들에겐 매력적이고 세련된 사람으로 처신했고, 손님들이 어쩌다 백인일 때는 거의 아첨에 가깝게 행동했다. 그는 고아원과 나환자 진료소에 기부를 했다. 자신을 교양 있고 관대하며 도덕적인 사람으로 대중에게 알리고자 상당히 애썼다. 그러나 아내와 아이들뿐일 때면 엄청나게 의심 많고 흉포하고 교활하게 변했다. 그들은 구타를 당했고 모욕을 당했으며, 훌륭한 남편과 아버지를 두었다고 친구와 지인들에게 부러움을 받아야만 했다.
- P251

더 자라면서 암무는 이 차갑고 계산적인 잔인함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부당함을 용서하지 않는 고결한 판단력을, 그리고 ‘누군가 큰 사람’에게 평생 괴롭힘을 당해온 ‘누군가 작은 사람’에게서 나타나기 마련인 고집스럽고 무모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다툼이나 대립을 피하기 위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런 것을 찾아 뵙고 어쩌면 즐기기까지 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 P252

뜨거운 오후인데도 ‘인생‘이 ‘끝났다‘는 그 차가운 느낌. 자신의 집이 먼지로 가득찼다는 기분. 공기가, 하늘이 나무가, 태양이, 비가, 빛이, 그리고 어둠이 모두 천천히 모래로 변하는 것 같은. 그 모래가 그녀의 콧구멍을, 폐를, 입을 채우리라는. 게가 모래사장을 팔 때 남길 것 같은 빙글빙글 도는 소용돌이 모양을 남기며 그녀를 잡아당기는.
- P310

"너희들 때문이야!" 암무는 소리를 질렀었다. "너희들만 없었다면 난 여기 있지도 않았어!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난 여기 있지도 않았을 거야! 자유로웠을 거라고! 너희들이 태어난 그날 고아원에 버렸어야 했는데! 너희는 내 목에 매달린 맷돌이야!"
- P349

"하지만 동지, 그들을 대신해 동지가 혁명을 시작할 수는 없어요. 자각시킬 수만 있을 뿐이죠. 그들은 그들만의 투쟁을 시작해야 해요. 그들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해요"
- P385

그날 아침 일어난 일에 우연은 없었다. 우발적인 것도 없었다. 노상강도도 개인적인 보복도 아니었다. 한 시대가 그 시대를 살고 있던 이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킨 것이었다
- P422

자신의 소멸이 유일한 출구인 터널에 들어서려 한다는 것을 그가 알았더라면 돌아섰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어쩌면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
- P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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