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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인생을 흔드는 계기가 되는 지점이 존재합니다. 때로는 고통으로, 때로는 인상깊은 한마디 말로 남겨지는 그 지점은 그렇게 그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고 송두리째 바꾸어버리기도 합니다. 인생의 그 지점이 좋지 못한 것에서 좋은 것으로의 선회를 지시해준다면 좋겠지만, 때로 그렇게 상처로 남겨진 인생의 지점은 한 사람의 인생을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상처의 연속으로 만들어놓기도 합니다.
1953년 루마니아에서 출생 후, 세계 제2차대전을 경험하고 1987년 독일로 망명한 작가 헤르타 뮐러는 전쟁속에서 박탈당한 삶의 공포, 그리고 죽음과 인생에 대한 고찰을 문학으로 승화시켰고, 그 예술성과 독창성, 문학성을 인정받아 200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17살 동성애자 소년 레오가 소련의 강제수용소에서 보낸 5년을 그린 이 소설은 주인공의 감정의 변화를 시적이고 아름답게 포착해 내고 있습니다. 실제상황에 기초하여 쓰여졌기 때문에 섬뜩하고 공포스러운 수용소에서의 순간들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그녀의 필력은 정말 대단함을 느낍니다. 한 문장 문장이 깊이감 있는 은유와 비유로 가득해 마치 서사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 책은 배고픔의 연대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배고픈 천사'로 대변되는 극도의 허기가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삽질 1회=빵 1그램. 배고픈 천사는 숨결을 그네뛰게 한다고 표현됩니다. 여기서 ‘숨그네’라는 이 책의 제목이 인간의 생명, 즉 삶(숨)이 그네를 타는 것처럼 끊임 없이 흔들리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처음에 주인공이 러시아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이 그리 힘든 과정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그것을 그렇게 힘든 일처럼 어려운 일처럼 적지 않아서, 하지만,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열일곱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겪은 일 치고는 정말로 엄청난 고난의 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수많은 비유와 은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문장들은 어딘가 몽롱한 느낌마저 주는데,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기력조차 없는 절망과 고통의 끝을 잘 표현해주었습니다.
5년이라는 시간을 흘려 보낸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과연 별 문제가 없이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인간이라는 자체가 가장 잔인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에서도, 유럽에서도 전쟁아닌 전쟁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피해를 당했던 약소국 민족들이 얼마나 많았고 그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극도의 공포와 불안, 이성의 부재 속에서도 살아있기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갔던 수용소의 사람들과 레오의 이야기를 통해 참으로 다양한 삶의 단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현실에 안주에 버리고 나태한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끝없는 자기합리화로 변명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반성해봅니다.
나는 지금까지도 배고픔을 상대로, 내가 그로부터 벗어났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더는 굶주리지 않아도 되었을 때부터 나는 글자 그대로 삶 자체를 먹는다. 먹을 때면 음식의 맛에 포위된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이후로 육십 년 동안, 나는 굶주림에 대항해 먹는다 - P29
한꺼번에 쏟아져내리므로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위가 조여든다. 그 느낌은 점점 올라와 입천장에 닿을 것 같다. 숨그네가 공중을 한 바퀴 돌고, 나는 헉헉거린다. 배고픔이 괴물이듯 그런 이빨빗바늘가위거울솔은 괴물이다. - P37
우리는 수용소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시체를 치우는 법을 배웠다. 사후경직이 시작되기 전에 죽은 이들의 옷을 벗긴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그들의 옷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아껴둔 빵을 먹는다. 그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면 죽음은 우리에게는 횡재다. - P136
영하 273도는 절대 영도니까요, 내가 말한다. 더 내려갈 수는 없어요. 오늘은 웬 과학 타령이냐. 그가 말한다. 잘못 센 건 아니고. 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말한다. 273이라는 숫자는 스스로 삼가거든요. 절대영도는 가설이잖아요 - P222
사람들은 매일 식당에서 배고픈 천사가 부부를 조종하는 모습을 보았다. 법무사는 파수꾼처럼 아내를 찾았다. 아내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팔을 뻗어 그녀의 수프 그릇을 제 것 옆으로 당겨놓았다. 아내가 잠시라도 눈을 떼면 아내의 수프 그릇에 숟가락을 넣었다. 그녀가 눈치채면 이렇게 말했다. 숟가락만 넣었다 뺐어. - P246
향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내용이 없어지고 구체적이 고향과 전혀 상관이 없어지므로 연기를 내며 타다가 결국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쪽이다 - P260
내가 돌아왔을 때 반가움보다 놀라움이 컸고, 집 안에 달갑지 않은 안도감이 퍼졌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살아 있음으로써 그들의 추모 기간을 기만한 것이었다. - P303
로베르트에게 나는 새로운 객체일 뿐이었다. 몸을 지탱하려고, 아니면 내 무릎에 뭔가를 놓으려고 가구인 듯 나를 만졌다. 그리고 내가 자기 서랍이라도 되는 양 내 주머니에 모피를 쑤셔 넣었다. 나는 서랍인 듯 가만있었다. - P307
나는 풀려난 몸으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었고 자기를 기만하는 증인이 되었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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