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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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적확한 표현으로 해야할 말을 하는 작가. 인간의 내면에 대해 이리도 솔직하고 과감하게 말할 줄 아는 작가. 각각 뚜렷하고 가면마저 투명한 군상 이야기. 은희경 작가의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왜 이 작가를 이렇게 좋아하나 매번 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새의 선물’,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이니 꽤 오랜만에 그녀의 신간을 읽게 되었습니다.

인물 심리묘사가 가득한 여리여리한 감정을 건드리는 내 기억 속 은희경 그대로다. 기숙사 같은 건 살아본 적도 없고, 70년대에 대학을 다니지도 않았지만, 작품 속 등장인물이 된 듯 소설에 푹 빠져 읽었습니다. 은희경 작가의 실제 이야기인지 내 이야기인지 소설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푹 빠져들었죠

1977년, 한 여대의 기숙사에서 만난 여성들의 섞임과 다름의 이야기이자, 서로 다른 기억과 각자의 인생이야기입니다. 한정된 공간안에서 벌어지는 관계에 대한 미묘하고도 복잡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학교 기숙생활의 경험은 없지만 그 시절 주인공인 것처럼 이야기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40년 전 1977년 지방에서 올라온 김유경은 서울 여자 대학교에 입학 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됩니다. 네 명이 한방을 쓰는데 국문과 1학년 김유경이 배정 받은 322호는 3학년 최성옥, 2학년 양애란, 1학년 오현수가 있습니다. 최성옥과 절친인 송선미의 417호는 2학년 곽주아, 1학년 이재숙, 불문과 김희진. 두 방 사람들은 종종 모이기도 합니다. 최성옥과 친구인 산업미술과 송선미의 방은 417호로 식품영양학과인 이재숙, 불문과 김희진, 현모양처가 되겠다는 곽주아가 한 방을 써 서로 왕래를 하며 지냅니다. 나중에 김희진이 소설가가 되어 기숙사에 있었던 일들을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데뷔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가장 오래된 친구인 김희진이 기숙사에 있었던 인물들을 소설로 썼지만 나(김유경)은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대학원을 수료하고 취직했을 때 자신의 상사였던 김희진은 구설수에 오른 후 소설가로 데뷔하였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연락이 끊이지 않고 이어오며 함께 술을 마시며 밥을 먹으며 지내온 기간이 벌써 40년이 되었습니다.

시대가 다르고, 배경이 다르더라도,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미래의 어느 순간에, 나와 한 시기를 공유했던 사람들은 지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저를 포함한 여성들이 은희경 소설에 그렇게 열광하는 이유는 분명 그녀가 작가로서 무한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녀의 소설은 세심한 관찰과 심리묘사, 완벽한 구성으로 높은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으며 경쾌하고 밝은 문체, 소설적 반전, 농담과 해학으로 순간순간 즐거움을 줍니다. 또한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탈의 시도가 여성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므로 무엇보다 소설 읽는 즐거움을 주기도 합니다. 벌써부터 그녀의 다음작품이 기대가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기계발서, 경제경영서만 읽기에도 바쁜 시대가 되었습니다. 소설이나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사치에 지나지 않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문학작품(소설)을 계속 읽게 되는 이유는 소설은 실패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인간이란 시키는 대로만 정해진 대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불편한 질문들을 통해 조금 다르게 살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일이겠죠. 늘 정답이라 여겼던 것을 조금 다른 입장에서 보게 되고 이를 통해 삶의 가치를 생각해 보는 것이 계속 소설을 펼치게 하는 이유가 되는 듯 합니다.

며칠 사이 깨친 사실이지만 공동생활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고립이었다. 정보를 얻지 못하면 뒤처지고 다수에 끼지 못하면 손해를 봤다. 이곳은 숨을 곳이 없는 공동 공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립은 차별보다 더 눈에 띄었다.
- P47

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가진다. 약점은 연약한 부분이라 당연히 상처 입기 쉽다. 상처받는 부위가 예민해지고 거기에서 방어를 위한 촉수가 뻗어 나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이 어떻게 취급당하는가를 통해 세상을 읽는 영역이 있다. 약점이 세상을 정찰하기 위한 레이더가 되는 셈이다.
- P112

약점을 숨기려는 것이 회피의 방편이 되었고 결국 그것이 태도가 되어 내 삶을 끌고 갔다. 내 삶은 냉소의 무력함과 자기 위안의 메커니즘 속에서 굴러갔다.
- P181

시간이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곁을 스쳐 가며 갖가지 슬픔과 기쁨의 무늬를 새기지만 결국은 모두를 소멸로 이끄니까.
- P199

기숙사는 거대한 깔때기처럼 이야기가 모이고 섞인 뒤 흐름을 만드는 곳이었다. 모두가 공동 관심사를 가진 청춘의 밀집 지역인 데다 저녁 9시 이후에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한 공간에 있으며 언제든지 서로 찾아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출신지와 같은 과와 같은 고교 출신과 같은 방끼리 말이 넘나들다 보면 수많은 교집합이 생긴다. 이야기는 서로 뒤섞이고 보완되면서 빠르게 공유의 물살을 타고 흘러갔다.
- P217

훈육과 세뇌에는 탈출구가 없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그 틀의 궤적에 부딪히고 상처입고 위축되며 계속해서 눈치껏 나를 속이며 살아야 하는 걸까.
- P245

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량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일생을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도 나에게만 유독 빛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내 인생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
- P278

짓궂은 운명에 휘둘린 게 아니라 회피라는 선택의 한 기착점이었을 뿐이었다.
- P300

김희진은 여전히 욕망과 그 박탈에 예민했고 깨어지는 순간에도 소란스럽게 남에게 고통을 전시하며 에너지를 얻었다.
그리고 잊혀져가는 소설가가 된 김희진(꼭 성을 붙여서 불러줘야 주인공과의 관계가 명확해진다)이 붙들려고 하는 그때 그 시간, 자기만의 장면들은 나ㅡ김유경이 기억하는 파편들의 틈새를 메워주는가, 아니면 깨트리고 벌어지게 만드는가.
- P325

그런 식으로 자신의 사는 모습을 드러내 모이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안 보이는 대다수는 어딘가에서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오래전 국사 강사의 말을 조금 바꿔보자면 행동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불만스러운 세상에 적응하려고 애쓰면서 말이다. 나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 P331

인간들은 다 자기를 주인공으로 편집해서 기억하는 법이거든.
- P333

기억이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만나 차이라는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 사람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돌아온다"라는 말처럼.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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