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탕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7
이승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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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증에 고통받던 한중수는 ‘아무 계획도 없이 낯선 곳을 향해 훌쩍 떠나라’는 정신과 의사 J의 조언에 형기를 마친 듯이 진짜로 떠납니다. 유년 시절 소설 ‘모비 딕’ 미쳐 바다를 떠돌다 배가 정박한 항구 캉탕에 ‘피쿼드’란 이름의 선술집을 열고 정착해버린, J의 외삼촌 거주지 캉탕에 한중수는 도착합니다. 한중수와 J의 외삼촌 ‘핍’, 그리고 실패를 글로 쓰는 선교사 타나엘이 캉탕에서 이야기는 펼쳐집니다.

홀수 장은 3인칭으로, 짝수 장은 1인칭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독특한 구성이었습니다.

한중수는 캉탕에서 오로지 걷고 보고 쓰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일을 하지 않습니다. 걷다가 본 것들을 습니다. 쓰는 행위는 단순히 언어로 표현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여 지는 것에 말할 수 있는 것도 쓰는 행위가 됩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고통과 과거를 묻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인물들은 모두 우리와 닮아 있습니다. 독자들은 절망 속에서 좌절하는 인물, 그런데도 다시 일어나는 인물 등 많은 인물들 속에서 자신과 닮은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결국에는 그 인물을 위로합니다. 그 인물을 위로하는 동시에 독자자신도 위로하게 됩니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작가는 그동안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인간의 양면성을 냉철히 분석하는 글을 써왔습니다. 이번 작품도 그런 작가의 세계관이 분명하게 투영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부재하게 했거나 부재 상태로 놔둔 세 인물은 언어를 잃어버리려 캉탕에 모이지만, 결국 저자는 자기 언어를 복원하며 상실을 견디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바다 자체가 거대한 배인 사람에겐 삶이 곧 여행이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듯합니다.

 

나는 아무 데도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 무능한 사람이다. 허용된 것이 아니라 내버려두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P18

정차할 때까지는 이 세상에서 내리지 않는다.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바다는, 이 세상은 어디로 가는 중일까?
- P27

낯선 언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자기를 객체로, 남으로, 낯선 이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있던, 익숙한 세계로부터 자기를 숨기는 행위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숨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 P66

우리가 걸어서 거기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으면, 걸은 만큼 거기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가 두 다리로 부단히 걸어 그 시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단한 걸음에 의해 그 시간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여섯 시간을 걸었다. 나는 오늘 여섯 시간만큼 나를 밀어낸 것이다.
- P134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안에 있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것이 또 인생이다.
- P192

핍은 『모비 딕』에 나오는 겁쟁이 흑인 소년의 이름이다. 손을 삐어서 노를 저을 수 없게 된 노잡이를 대신하여 보트에 탄 그는 고래를 쫓던 도중 바다에 빠진다. 그런 일이 전에도 있었기 때문에, 물에 빠진 그를 구하느라 다시 또 고래 잡는 걸 포기하고 싶지 않은 그의 상사는 그를 구해주지 않는다. 보트는 그를 물속에 내버려두고 달린다. 불쌍한 핍은 무정하고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린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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