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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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오정, 오륙도, 마흔 다섯살이면 정년, 56살까지 직장에 다니면 '도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적 정년은 예순 살이지만, 조기 퇴직을 종용하는 기업의 문화 때문에 일찍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는 아무리 능력 성과 평판이 탁월해도 50세 전후면 보직 해임되기도 합니다. 이들에겐 두 가지 선택이 주어집니다. 위로금을 받고 퇴사하거나, 계약직으로 전환해 몇 년 더 일하는 것입니다. 둘 다 거부하면 평소 일과는 다른 업무가 부여됩니다.

이 작품은 수십 년간 일에 대한 열정과 회사에 대한 충성을 바치고도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로 부터 비참하게 버림받은 중년 노동자의 이야기입니다. 통신 공기업에 입사해 26년간 현장 팀에서 수리와 설치를 담당하던 주인공은 저성과자로 분류돼 재교육 직전 상사로부터 퇴사를 권유 받습니다. 주인공에게 아직 부양해야 할 고등학교 자녀와 홀어머니가 있고 노후를 대비해 마련한 변두리 다세대 주택 구입의 빚도 남아 있습니다.

매일 같은 작업을 반복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노하우를 익히고 실력이 늘어가는 것. 주인공에게 직장과 일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 대가로 그가 회사에 기대했던 것은 “존중과, 감사, 이해와 예의 같은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회사의 사직 요청을 거절하자 돌아 온 것은 모욕이었습니다. 회사는 지역의 거점센터로 영업 일을 하라며 그를 쫓아냈고 26년간 통신 설비 설치와 수리를 담당한 기술자에게 인터넷 가입 영업을 지시했습니다. 회사는 그에게 가장 소중한 일을 뺏음으로써 모욕을 줬던 겁니다.

결국 주인공은 회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약속을 받고 송전탑 건설을 대행하는 자회사에 편입되어 이름도 없이 78구역 1조 9번으로 불리며 송전탑 건설에 앞장서다가 이를 막는 마을 주민들과 갈등하다 파국을 맞습니다.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일과 삶의 분리 없이 평생직장의 신화를 만들어온 베이비붐 세대가 떠올랐습니다. 한때 산업 역군이라 불렸던 분들이 은퇴연령에 가까워지면서 자의든,타의든 일을 그만 두게 됩니다.

그저 ‘당연히 열심히 해야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먼 이야기라서, 나의 윗세대의 이야기라서 멀게만 느껴졌지만, 결국 열심히 일만해서는 행복하게 살 수는 없는 시대가 된 듯합니다. 회사를 ‘자신의 일부이자 전부’라 여기고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회사 인간’이 설 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게 되겠죠

씁쓸한 현실을 반영한 작품이지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가 까마득하게 길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잠이 들 무렵이면 하루가 또 이처럼 순식간에 지나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16

회사를 그만 두지 못하는 이유가 다만 경제적 어려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지, 26년간 회사와 자신을 이어주던게 겨우 얄팍한 월급 통장 하나뿐이라고 여기는지 그는 되묻고 싶었다. - P33

긴 시간 회사를 통해 자신이 얻은 것과 배운 것, 바라고 원한 것, 이루고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순간들을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회사에 속해 있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그 시간들 모두를 부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회사에 쏟았던 시간과 노력이 다만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할 자신도 없었다 - P85

그러니까 가까운 사람들 틈에서 너무나 쉽게 갈등을 만들고, 무엇이 미움과 불만을 부풀리는지 아는 영악하고 지능적인 회사의 실체를 비로소 목격한 기분이 들었다. - P159

작은 불안의 조짐이 감지되면 그것은 곧장 공포감으로 몸집을 키웠고 거기에 휩쓸려버리는 거였다. 그가 맞서고 있는 것도 실은 실체도 없이 수시로 자신을 휘젓고 다니는 그런 감정들일지도 몰랐다. - P168

다만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지 그래서 마침내 닿게 되는 곳이 어디인지.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거기까지 이르러야만 이 기이한 집착과 이상한 오기를 모두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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