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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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짧은 10편의 소설들로 이루어진 단편소설집입니다. 읽기 쉽고, 각각의 내용도 간단합니다.책에 수록된 10편의 단편 중 7편이 수십년 전 과거의 사건을 추억하는 형태로 서술됩니다.

소설들에서 인상적인 점은 작중화자의 현재가 상대적으로 배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이런 식의 소설은 과거의 경험이나 사건이 현재의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영향으로 인해 선택을 하게 된다는 식입니다.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이 병렬적으로 배치되고, 과거의 극복 혹은 잔존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저 과거의 경험 혹은 사건에 대해 복기하는 것에 그칩니다. 현재의 상태나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나’에게 미친 영향들은 상대적으로 생략되거나 삭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과거의 사건을, 상처를, 자신을, 꽤 시간이 지난 ‘나’의 상태에서 생생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되살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작중의 화자처럼 독자들은 자신의 삶 속 그늘을 추적하게 됩니다. 소설 속 사건과 상처에 비추어 비록 형태나 양상은 다를 지라도 자신의 과거에 서늘하게 남아있는 기억을 또렷이 되살리는 시도를 하는 것이죠. 소설 속 내용 자체가 주는 여운이나 감동보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을 매개로 열리는 독자 ‘나’의 이야기입니다.

책의 내용에 참 잘 맞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빛은 물질을 비추고, 그 뒤에 그림자를 만듭니다. 빛이 인간관계이고, 물질이 인간이라면 그림자는 비밀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편소설이라는 특징 때문에 각각의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의 히스토리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대화를 통해 그들의 성격,행동을 유추하면서 읽다보면, 그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이 하나둘씩 드러납니다. 잔잔하기도 하고 감성적이기도 하고, 과장되지 않게 일상의 일을 담담하게 풀어가는 문체도 좋았습니다.

매우 짧은 분량이지만 그것들이 하나하나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은 다른 것들보다 크고 깊은 울림이 느껴지는 책이었습니다.

 

p93 우리는 강의실 밖에서는 얘기라곤 나눠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미 핏속부터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친구 분들, 농담을 주고받기가 쉬운 나이 많은 남자들,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앞에 두고 부끄러워하는 모습 때문에 무해한 존재가 되는 그런 남자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이었다.

p108 이제 로버트와 나는 더 이상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들 삶의 내밀한 사정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 우리를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우리가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추억하기조차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유년의 순간들. 우리가 나누는 이런 대화에는 자유가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하는 얘기는 절대 그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p119 돌이켜보면, 그날 밤 이후 내가 우울증에 빠졌다고 여겨질 수 도 있겠으나, 나는 서서히 형성되어가고 있던 내 삶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게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어머니는 의사의 아내였고, 이제 큰 이변이 없는 한 나 역시 의사의 아내가 될 터였다

p129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p180 그리고 그럴 때마다, 발을 디디는 곳을 보지 않았던, 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우리의 대책 없음에, 우리의 눈먼 행동에 아직도 몸이 떨려온다

p240 삶은 계속되지만 달라졌다. 더 물러졌고, 더 지루해졌다. 즐거움은 덜해졌고 고통은 그 구렁텅이의 깊이가 한없어진 듯하다. 그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을까 늘 경계를 해야 한다. 그날 오후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나는 누나가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그 구렁텅이의 가장자리에서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 빠질 마음을 먹지는 않으나, 그것의 존재로 인해 늘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구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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