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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ㅣ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90년대 목포. 입학식이 막 끝난 한 여자고등학교의 풍경은 그 시절 여느 학교의 그것과 다르지가 않습니다. god나 조성모에 열광하는 소녀들이 있고, god나 조성모처럼 하고 다니는 소녀들도 있지요. 그런 중에 '열광'쪽 아이들이 '하고 다니는'쪽에 호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투박하게 말하자면, 단발머리 여고생들이 짧은 머리 언니들에게 러브레터를 쓴다는 상황이랄까요.
주인공 준희가 바라보는 인희는, 말하자면 러브레터를 받는 쪽입니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 이미 그녀를 알았던 준희의 눈에는 인희가 허세만 가득한 사람으로 변한 것만 같아 영 마뜩치가 않습니다. 게다가 준희에게는 이미 단짝인 규인이 있어 다른 사람들이야 어쨌든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준희와 규인, 둘은 여러가지를 함께할 수 있지만 그 중에 불이 꺼진 음악실 소파에 누워 서로를 껴안고 있는 것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모습을 발견한 선생님은 사색이 되었고, 다음 날 교내에는 '누워 있지 말라'는 공고가 붙었지만 말이죠.
행동거지가 세련된 규인은 친구들과 몰려 다니면서 폼을 잡는 인희를 싫어합니다. 규인에 따르면 인희 같은 사람들이 '진짜 동성애자'에게 피해를 준다고 합니다. 인희 같은 애들은 동성애 역시 칼머리에 힙합 바지처럼 관심을 끌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 진짜는 아니라면서 말이죠. 규인과 준희가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동안, 다른 소녀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바로 성에 관한 이야기 말입니다. 아이돌 이야기, 아이돌을 대상으로 팬픽 쓰기, 그 팬픽에 들어갈 동성애 이야기를 쓰기 등을 하느라 소녀들은 바쁩니다.
2학년이 되어 규인과는 다른 반으로 갈라진 준희 앞에, 새로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연극반 선배 민선입니다. 민선은 준희에게 '토끼 같다'며 설렘을 안기고, 준희는 그런 민선에게 용기를 내 편지를 쓰지요. 며칠 뒤 민선이 답장을 줍니다. 둘이 주고 받은 편지에는 '반했어요'라든가 '여자지만 선배가 좋아요' 라는 말 같은 것은 쓰여 있지 않지만, 오히려 쓰여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애틋합니다. 이것은 과연 성적 관념을 초월한 사랑일까요, 아니면 일찌기 규인이 지적했듯이 그저 관심을 끌고 싶은 치기어린 욕구일까요? 그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에, 소녀들의 일상은 빠르게만 흘러갑니다.
작가의 말에서 이 이야기가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소설적인 부분이 많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서사의 다이나믹도, 만화 같은 캐릭터도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이 이 소설의 약점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쭉쭉 넘어 갑니다.
비단 아이돌을 흉내내고, 저희끼리 제법 심각한 얼굴로 사랑 이야기를 나누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야설을 써보며 킬킬대고, 선생님을 연모하고, 그 사랑에 좌절하는 경험을 해봤던 모든 이에게, 이 이야기는 '나만의 이야기'로 점철됩니다. '항구'가 단지 저자의 고향인 목포를 가리키는데서 그치지 않고 한 때 우리가 정박했던 어느 곳, 갖가지 소동이 일어났던 어떤 곳을 가리키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네요. 어느샌가 우리가 떠나온,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어느 지점을 가리키는 것만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