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경제 - 복잡계 과학이 다시 만드는 경제학의 미래
마크 뷰캐넌 지음, 이효석.정형채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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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과학자들이 거듭되는 연구와 사고 끝에 많은 법칙들을 만들어 내고 활용하고 있다. 물론 수많은 사색과 연구가 바탕이 되어 있어야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뉴턴의 사과나무라든지 케쿨레의 꿈과 같이 순간의 영감들이 많은 법칙을 만든 기폭제가 되었다는 일화들이 종종 뒷이야기로 전해지곤 한다. 이렇듯 전혀 과학스럽지 않은 일들이 과학에 이용될 수 있다면 자연과학도 다른 학문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누구나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한 시도를 한 결과가 바로 마크 뷰캐년의 『내일의 경제』이다.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에 있는 몇몇 아이디어와 개념을 더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경제와 금융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저자는 “물리학은 상호 작용하는 많은 조각이나 부분들이나 요소들이 어떻게 전체 시스템에서 놀랍도록 집단적인 패턴이나 행동을 초래하는지 이해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 그 조각이나 부분들, 요소들이 전자나 원자일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거의 아무것이나 될 수 있다. (p.38)”는 전제아래 전자나 원자 대신 경제와 금융을 대입하여 설명하고 있다.

 

 갑자기 나타나는 토네이도의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을 근거로 일시적인 혼란이 있더라도 스스로 수습한다고 하는 시장의 평형에 찬물을 끼얹으며, 최근의 서브프라임 사태를 비롯하여 그동안의 주가의 흐름 및 많은 경제학자들의 전망 및 분석들을 제시한 후 그것들을 다양한 물리학에 접목하여 보고 있다. 그중에서 주가의 대폭락 전후에 많은 전조들이 보이는 것 등의 시장상황을 지진과 비교해보는 부분은 인상 깊었다.

 

 ‘복잡계 과학이 다시 만드는 경제학의 미래’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복잡계 과학, 경제학 등 쉽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최근 음악시장을 휩쓴 콜라보레이션과 같이 과학과 경제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내일의 경제를 다른 시각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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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 -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을 여는 법 데이비드 호킨스 시리즈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문진희 옮김 / 판미동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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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행복에 관하여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행복하기 위해 종교에 의지하는 면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종교적 지도자들이 말하는 깨달음에 관하여 많은 관심만 가지고 있을 때에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가 지은 『나의 눈』을 접하게 되었다. 다른 것보다 띠지의 “지금까지 깨달음을 이렇게 알기 쉬운 언어로 풀어 놓은 책은 없었다”라는 문구에 이끌려 깨달음을 관하여 조금이나마 알고 싶은 생각에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집어 들게 되었다.

 

  그러나 깨달음을 쉽게 알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더 행복한 뉴스가 넘쳐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예전에 인문학책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겁도 없이(?) 『도덕경』을 집어 들고 무작정 읽은 적이 있었는데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뛰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되었다. 덕분에 『도덕경』은 아직까지도 그냥 글씨만 한번 읽어본 채 책장에 당당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부끄러운 과거지만 호킨스 박사의 『나의 눈』도 비슷한 경험을 주었다.

 

  편집자는 "독자들의 자아와 참나 모두를 위해서 쓴 글이며, ‘이원성과 비이원성 양극의 초원’이라는 전통적으로 깨달음에 큰 장애였던 것에 관한 내용은 이해가 쉽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 책을 덮을 때쯤이면 그 의문이 절로 해소될 것이다. (p. 12)"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내공이 부족한지 수양이 부족한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부족한지(아마도 마지막의 경우가 가장 유력한 것 같다) 책을 덮어도 이해보다는 큰 장애만 남은 기분이었다.

 

  저자의 전작인 『의식 혁명』에 관한 설명이 많이 할애되어 있어 전작을 읽지 않은 상태여도 저자의 핵심이론인 인간의 의식 수준과 운동역학에 관해서 어느 정도 알 수는 있었으나, 그 이론을 토대로 쓰여진 책이어서 그런지 그것이 이해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의식수준에 대한 로그값에 대해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론이라면 바로 그것인데도 말이다.

 

 그렇지만 모든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렴풋이 대충알고는 있는 것 같은 그러한 내용들을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도 많이 있었는데, “앎의 상태를 ‘마음이 없는’ 수준이며, ‘공(void)’이나 ‘무(nothingness0’와 같지 않다. ‘공(空)’이나 ‘무(無)’라는 용어들은 형상을 지칭할 때 쓰는 용어다. 궁극은 형상이 없고 한계가 없으며 위치성도 없는 영역이며 따라서 모든 것의 전체성이 항상 현존하는 영역이다. (p. 177)”고 정의하는 것이나 근본적 지금(radical now)에 대한 물음에 “모든 시간이 다 그렇듯이 ‘지금’조차도 덧없는 환상입니다. 단순히 어떤 것을 주시한다고 해서 ‘지금’이라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실체가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이나 ‘그때’도, ‘과거’나 ‘미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 ‘지금’이 사라진다면 항상의 무한함이 그 자리에 들어설 것입니다. (p. 428)”라고 대답하는 부분은 다소 난해한 정의들을 나름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서로 다른 언어 형태들은 그 가르침들을 낳은 문화를 반영한다고 하면서 모든 영적인 부분의 최고점인 신, 있음(is-ness), 불성, 그리스도, 화신, 진리, 깨달음, 참나, 크리슈나, 실상, 앎, 하나임, 절대, 전부임, 총체, 신성, 등의 의미들의 차이점이 없다고 하는 대답이었다. 많이 파생되어 왔지만 결국은 각뿔 모양의 한 점, 꼭대기를 향한 여정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있는 나로서는 많은 공감이 가는 대답이었다.

 

 언젠가 제3의 눈이라고 불린다는 송과체에 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다양한 이유로 그 기능이 축소되어 있지만 그것이 발달한 이는 심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저자가 말하는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는 하나의 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글로 읽어도 이렇게 어려운데 깨달음에 다다르려면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저자도 많이 인용한 붓다의 가르침을 인용해본다.

 

“그 누구도 섬기지 말라, 오로지 참된 가르침들만을 따르도록 하라 - 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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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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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이맘때가 되면 출판계나 독자들의 시선은 지구 반대편으로 가곤한다. 한림원의 발표로 인해 이미 출간된 책이 재조명되거나 아예 새로운 옷을 입고는 다시 세상에 나오거나 소개가 미흡한 작가의 경우 이에 보상이라도 하듯이 관련 서적들이 양산되기도 한다. 노벨문학상 타이틀이 둘러진 작가의 작품은 그것만으로도 다소 난해한 이야기라도 꾹 참고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자신의 취향과는 조금 어긋나더라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익혀두는 유행어라든지 유행가 같이 한동안 회자되는 작가이므로 읽어 두어야 하는 것같이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년 이맘 때 즘엔 주위에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난(?)까지 감수하면서 노벨상 작가의 책을 한번씩 잡게 된다. 그러한 심리가 작용해서인지 올해는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을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오르한 파묵의 다른 책에 비하여 분량이 많지 않은 것도 고르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아직까지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많이 접해보진 못했으니까 그나마 빨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란 얄팍한 계산에서 나온 거지만 이번 예상은 완전히 틀렸었다. 일주일 가까이 씨름하면 읽은 책이므로...

 

 오르한 파묵의 또 다른 소설 「고요한 집」의 등장인물인 역사학자가 기록보관소에서 발견한 이야기라고 시작하는 「하얀 성」은 주인공이 베네치아에서 나폴리로 가는 길에 터키함대의 공격을 받고 이스탄불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1인칭으로 주인공이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풀어가고 있는데, 과학에 관심이 많은 호자라는 사람이 나를 노예로 삼았는데 놀랍게도 생김새가 나와 똑같이 닮아 있었다. 이렇게 국적도, 살아온 방식도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면서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이야기이다.

 

 동서양, 고금을 통틀어 가장 난해하면서 근원적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여서 그만큼 더디게 읽히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소설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은 많이 있으나 동양과 서양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지정학적인 이점을 충분히 활용한 오르한 파묵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인 것 같았다. 덕분에 나도 한 동안 답도 나오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았다. 그러한 잡생각(?) 때문에 더디게만 읽어간 것은 흠이었지만...^^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해도 희미한 꼬리조차 잡히지 않는 ‘나는 왜 나인가’란 물음보다 터키함대의 공격을 회상하면서 주인공인 ‘나’가 회상하는 “지금에 와서는, 선장이 그렇게 겁에 질려 버리면서부터 애 인생이 조금씩 달라져 왔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결정된 인생은 없다는 것을, 모든 이야기는 실상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우연히 경험했던 것들이 사실은 필연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다. (p. 17-18)”는 소설 초반의 글이 더욱 기억에 남는 아직은 어려웠던 소설 「하얀 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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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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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음악학자, 영화감독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작품을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긴 알고 있는 현대 이탈리아 작가로는 움베르토 에코가 거의 유일하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돌 가수같은 깜직한 사진 한 장을 공개하고는 은둔생활을 한다는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같은 인물이 아니기에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책을 읽기 전에 작가에 대해 대강 파악하면 처음 접하는 작가라도 조금은 알아가기 쉽지 않을까 해서 찾아본 것인데, 웬걸 역시 어렵다. 삶에 대한 통찰을 한 권의 책에 집약해서 그런지 쉽지는 않은 이야기이다. (에코를 비롯해서 이탈리아 작가들의 글은 왜이리 어려운지...휴~) 그래도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잘 되라고 하는 소리는 잔소리로 들리기 쉬우니 어렵고 생각거리가 많은 이야기도 분명 삶에 좋은 이야기가 되겠지.

 

「이런 이야기」는 시작하는 곳에서 끝나는 길을 꿈꾸는 울티모의 삶을 어린시절부터 전쟁에 참전했던 시절, 연인인지 아닌지 아직도 아리송한 엘리자베타의 일기 등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과연 거장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울티모를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을까?

 

1. 길에 대한 꿈을 꾸게 되는, <울티모의 어린 시절>

  울티모는 병약한 아이였다. 고비를 맞을 때마다 세례를 받았기에 세 번이나 세례를 받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금빛그늘의 분위기를 지닌 특별한 아이로 자랐다. 그런 울티모에게 아버지 파르리는 본업인 소를 모두 팔고 자동차 정비를 업으로 삼기로 선언한다. 마침 자동차 시대의 태동기였고, 여러 레이스가 펼쳐지고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귀족 일부의 취미생활로 여겨지던 때였다.

  파르리는 울티모와 토리노에서 트럭 판매원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어찌보면 우리가 하는 일이란 그저 남들이 다 끝내지 못하고 남겨둔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마무리할 일을 시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p. 92)”라는 말을 한다. 아들과의 시간을 늘이는 것이 이야기를 하는 방법이기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온 말이지만, 일을 시작하고는 남겨둔 일을 마무리하는 것 또는 마무리할 일을 시작하는 것이라는 말이 묘하게 여운이 남았다.

  파르리는 그의 파트너가 되는 담브로시오 백작을 만나고 그와 함께 자동차 경주를 보러 간다. 그곳에서 아이는 자동차의 소음과 냄새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다.

  아이가 보이게는 길이 자동차들을 길들이는 것이지 자동차들이 길을 길들이는 게 아니었다. 그런 이치를 터득한 아이의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의 인생이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인간은 어떤 사람이 되기 전에 이미 그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p. 73)

어떤 사람이 되기 전의 그 사람이 된 어린시절의 울티모였다.

 

2. 자신의 길이 생기는, <카포레토 회상록>

  제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었다. 참호안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만 했던 그런 곳에 울티모가 있었다. 탈영으로 총살된 아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한 수학자의 회상록 속에서 울티모는 죽음을 목격하고 전쟁에서 이기기를 바랐지만 전쟁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울티모는 마지막에 자신의 계획을 밝힌다. 아무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자신만의 도로를 건설하는 것을 말이다.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굽이 한 굽이 차례대로 담을 경주로를 만들기 위해 살고 있다고 한다.

  울티모의 꿈이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대목이긴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참호속에서 막내의 죽음을 목격하는 부분이었다. 아군이 고통스러워 하는 막내의 마지막 숨을 끊는 모습을 본 울티모는 “한 사람이 죽으면 얼마나 많은 것이 함께 사라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p. 148)”고 한다. 울티모의 말마따나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애석한 일이다.

 

3. 생각지도 못한 반전, <엘리자베타>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오래 사는 것 같아도 사실은 안 그래.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는 시간은 그 긴 세월의 작은 부분일 뿐이야. 다시 말해서 자기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를 알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시가에만 진정으로 살았다 할 수 있어. 그런 시기에 사람들은 행복해. 나머지 세월은 기다리거나 추억하는 시간이야. 기다리거나 추억하는 때에는 슬프지도 행복하지도 않아. 슬퍼 보이기는 하지. 하지만 그건 그저 기다리고 있거나 추억하고 있기 때문이야. 기다리는 사람은 슬프지 않아. 추억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그냥 멀리 있는 것뿐이야. (p. 264)

  엘리자베타의 일기로 이루어진 장이다. 잠시 엘리자베타와 울티모는 같은 일을 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울티모가 엘리자베타에게 한 말이 「이런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깊었다. 훗날 울티모를 찾아간 엘리자베타는 파르리에게도 같은 내용의 말을 듣는데, 아무래도 복습효과를 노린 작가의 의도인 것 같았다.

  엘리자베타의 일기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녀의 일방적인 말밖에 들을 수 없지만, 나중에 울티모를 통해서 밝혀지는 나름의 반전이 쏠쏠했다.

 

4. 울티모의 꿈을 실현하는 엘리자베타, <에필로그>

  울티모는 노수학자에게 자신만의 경주로를 만들고 두 팔의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돌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거라고 자신의 계획을 말했었다. 그 꿈을 이루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서킷을 여기에 만들거라고 그의 동생의 통해 알 수 있었다. 울티모가 그녀에게 남긴 서킷그림과 같은 서킷을 오랫동안 찾아다닌 엘리자베타는 늪지대에 만들어진 그의 서킷을 복구하고는 자신만의 레이스를 펼친다. 각각의 굽이가 하나의 몸짓으로 녹아들고 있음을 느끼고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았음을 알고는 서킷을 부숴버림으로써 「이런 이야기」의 이야기가 막을 내린다.

  

  무엇보다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옆집 할아버지께 재미난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가 어려운 숙제를 하나 받은 느낌이랄까? 자신의 길을 꿈꾸던 울티모의 삶도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자신감과 의리로 헤쳐 나가던 파르리의 직업관도 자신만의 목적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엘리자베타의 삶도 흥미로웠지만 울티모의 말을 듣고 쓴 엘리자베타의 일기속의 의문,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났을까? 나는 언제쯤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될까? 아니, 이미 진정으로 살아 있었던 적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게 언제였을까? (p. 265)’이 두고두고 곱씹게되는 「이런 이야기」였다.

 

  끝으로 번역된 책에서 잘 찾아보기 힘든 '비거스렁이(p. 52)', '갈마드는(p. 165)', '기연가미연가(p. 173)', '생급스러워서(p. 223)' 등의 조금은 생소한 재미난 말 등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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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식탁 - 독성물질은 어떻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나
마리 모니크 로뱅 지음, 권지현 옮김 / 판미동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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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한 언론인이 쓴 ‘독성물질은 어떻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나’의 부제가 붙은 「죽음의 식탁」은 농약에서부터 식탁위의 플라스틱 용기까지 어떻게 독을 품고 있는 물건들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고 쓰는 물건이 되었는지 파헤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당히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책이다. 기업의 최대 목표는 이윤이기에 또한 그러한 기업들로 인해 생활이 윤택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불편한 책임은 틀림없다. 그래도 저자가 세운 목표대로 ‘적어도 탄탄한 논리로 무장해서 능력껏 행동하고 더 나아가 우리 건강을 지배하는 게임의 법칙을 바꿀 수 있게 하기’위해서는 꼭 한번 읽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아는 것이 곧 힘이니까.

 

 다큐멘터리 제작자답게 「죽음의 식탁」은 한편의 다큐멘터리 같았다. (한편이라고 하기엔 분량이 제법 많지만 말이다.^^;) 프랑스 내외의 많은 피해 사례를 중심으로 그들의 힘든 싸움을 먼저 이야기를 하고 산업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끄집어내고 있다. 농약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다이옥신, 아스파르탐, 비스페놀A 등 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물질들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파헤쳐 간다. 특히나 새로운 화학물질을 만든 기업이나 그 기업이 후원하는 연구소, 그것을 규제해야하는 공권력의 기관 등이 거미줄처럼 얽혀 소비자들을 위협하는 장면이 글만 읽어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최근 농약이 선거 후보들의 토론에서 언급이 되어서 그런지 농약에 대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2006년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예방 매뉴얼의 내용인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의 신경계는 근본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곤충의 신경계를 공격하기 위해 개발된 살충제는 인간의 신경계에도 급성 혹은 장기적으로 독성 효과를 일으킬 수 있음이 분명하다. (p. 147)”라는 부분은 농약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살충제는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에 생각을 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았다. 또한 우리가 건강에 아무런 문제없이 평생 동안 매일 섭취할 수 있는 화학물질의 양이라고 정의된 일일섭취허용량이 왜 만들어 졌는지에 대한 연구 자료가 비밀 속에 숨어야 하는지도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저자가 인용한 <뉴욕타임즈>의 유연휘발유에 대한 기사이다.

“일반 대중에 대한 위험이 특정 불가한 상황이므로 화학자들은 제품 생산을 중단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이것은 이 사안을 감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는 완전히 다른 과학자의 시각이며, 과학자의 판단이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합리적인 판단이 것만은 분명하다.” 이에 저자는 과학자들이 독립적이고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규명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한 문제이므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합리적인 사람들인 과학자들을 믿고 안심할 수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것이 이 두꺼운 책을 만든 이유가 될 것 같았다.

 

 분명 많은 제품들이 우리의 삶을 좀 더 편하게 해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최소한 어떤 독성이 있고 어떻게 사용 혹은 사용 중단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이윤이 아닌 건강과 목숨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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