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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평점 :
처음부터 솔직히 말하자면, 『슬픔의 물리학』을 다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읽는 동안 몇 번이나 길을 잃었고, 한 장을 넘기고서야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익숙한 줄거리의 흐름을 기대한다면 이 책은 꽤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화자의 기억과 가족사, 신화와 상상이 뒤섞이고, 이야기는 한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책을 덮은 뒤에도 몇몇 장면과 문장은 오래 남았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끝까지 걸어 본 슬픔의 미로. 그 안에서 내가 붙잡은 것을 기록해 둔다.
책은 비문과 프롤로그로 시작해 아홉 개의 장을 지나 에필로그에 닿는다. 「슬픔의 빵」, 「유기에 반대하며: M 사건」, 「노란 집」, 「시한폭탄」, 「초록색 상자」, 「이야기를 사는 사람」 같은 장 제목은 서로 이어지는 듯하면서도 하나의 줄거리로 단정하게 묶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 구성이 불친절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읽다 보니 파편적으로 이어지는 형식이 기억의 움직임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은 대개 순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한 장면은 다른 장면을 부르고, 개인의 기억은 가족과 시대의 기억으로 번져 간다. 이 책의 흩어진 이야기들도 그런 식으로 서로를 불러낸다.
화자는 타인의 슬픔을 통로 삼아 그 사람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배경은 20세기 후반 사회주의 말기의 불가리아에 놓여 있지만, 이야기는 한 시대에 머물지 않고 여러 사람의 기억과 동유럽의 역사를 오간다.
첫 문장부터 이 낯선 감각이 선명하다.
“나는 1913년 8월의 끝자락에 남성 인간으로 태어났다.” (11쪽)
한 사람의 몸에 갇힌 ‘나’가 아니라, 타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며 여러 삶을 통과하는 ‘나’. 내게는 이 문장이 화자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선언처럼 읽혔다. 다만 이것이 작가의 의도와 맞는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자주 그랬듯, 나는 하나의 해석에 도착하기보다 질문을 품고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내가 이 책에서 겨우 붙잡은 손잡이는 미노타우로스였다. 신화 속에서 우리는 이카로스를 안타까워하고 테세우스에게 공감한다. 아리아드네와 미노스 왕에게도 마음을 건넨다. 그러나 미궁 속 괴물에게는 좀처럼 연민을 보내지 않는다. 저자는 그 점을 이렇게 짚는다.
“그에게는 슬픔이 있다. 어떤 동물에게도 없는 슬픔이.” (23쪽)
그리고 미노타우로스에게 아무도 목소리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영웅의 이야기에서 그는 쓰러뜨려야 할 괴물일 뿐이지만, 시선을 바꾸면 어두운 미궁에 버려진 존재가 된다. 제목에 들어 있는 ‘유기’라는 말도 그제야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이 소설은 버려진 것, 말해지지 않은 것, 목소리를 얻지 못한 것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신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 가족의 비밀과 한 나라의 역사에도 겹쳐지며, 책 전체에 서늘하고 애틋한 정서를 만든다.
가족을 다루는 대목에서 오래 머문 문장이 있다.
“비밀과 거짓말의 긴 사슬이 우리를 정상 가족으로 만들어 주었다. 다른 모든 가족과 똑같이.” (83쪽)
정상이라는 말이 때로는 말하지 못한 것들을 덮어 둔 결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서늘했다. 누구나 조금씩 비밀을 감추고, 말하지 않는 일에 기대어 가족의 모습을 유지한다면 ‘정상’이라는 기준은 얼마나 단단한 것일까.
속담과 관련된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죄지은 자가 쫓기지 않아도 도망친다는 말과 달리, 쫓기면 결백한 사람도 도망칠 수 있다는 화자의 감각에는 억압적인 체제 아래 살아온 사람의 경험이 배어 있는 듯했다. 개인의 가족사와 사회의 역사가 이 책에서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화자는 한때 모든 것의 안으로 들어가고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며 그 능력을 잃은 뒤에는 상실을 보상하듯 무언가를 모으려 한다.
“한때 나는 모든 것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 무능력해진 나는 상실에 대한 작은 보상으로 모든 것을 모으고 싶어졌다.” (187쪽)
그가 모으려는 것은 오래도록 기념될 만한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죽고, 썩고, 부서지기 쉬운 것들이다. 곧 사라질 것을 기억하고 보존하려는 마음이다.
그래서 이 책의 조각난 형식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부서지기 쉬운 것들을 담으려면 매끈하게 다듬어진 하나의 이야기보다 조각난 기록이 더 어울릴 수 있다. 흩어진 장면들은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 둔 작은 기억처럼 느껴졌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힘에 관한 대목도 흥미로웠다. 이야기는 죽음이 기다리는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길이 될 수 있다. 화자가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까닭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야기란 도피처이면서, 잠시나마 구원을 유예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문장은 언어에 관한 것이었다.
“단어가 없다고 해서 두려움이 무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더 높이 쌓여 훨씬 더 견딜 수 없이 짓누른다.” (33쪽)
이름을 붙이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는 대신 쌓여 간다. 표현하지 못한 슬픔이나 두려움을 품고 살아 본 사람에게는 이 문장이 유난히 깊게 와닿을 것 같다.
책은 언어를 얻는 순간 무언가를 잃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갓난아이는 아직 천국의 비밀을 알지만 그것을 표현할 말을 모른다. 언어를 얻을 때쯤이면 그 비밀은 이미 잊힌 뒤다. 말을 배우는 일은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말로 옮길 수 없는 것을 잃는 일이기도 한 걸까.
책의 제목을 직접 떠올리게 하는 대목은 후반부에 나온다. 화자는 슬픔을 물리학의 언어로 탐구해 왔다고 말한다. 슬픔은 가스나 전기처럼 고정된 형태나 부피가 없고, 그것을 담는 그릇과 공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하지만 무색무취한 비활성 기체와는 다르다. 슬픔에는 색과 냄새가 있다. 세상의 색과 냄새를 갈아입는 ‘카멜레온 가스’와 같다는 표현이 이어진다.
이 대목을 읽으며 제목이 단지 인상적인 수사가 아니라, 이 소설이 오래 붙들고 있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은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가. 무엇이 그것을 담고, 무엇이 그 모양을 바꾸는가.
그릇이 한 사람의 몸일 수도, 한 가족일 수도, 한 나라일 수도 있다면 슬픔은 그 크기와 형태에 맞춰 달라질 것이다. 이 소설이 개인의 기억과 가족사, 국가의 역사를 오가는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끝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여전히 많다. 제비 가족을 위해 일부러 불을 켜 두었다가 파리와 나방의 죽음에 마음이 걸리는 장면(148쪽)은 문장 자체는 읽혔지만, 책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선명하게 잡지 못했다. 파리를 죽이든 코끼리를 죽이든 똑같은 살해가 아니냐는 질문도 충분히 따라가지 못했다. 불가리아와 동유럽의 역사적 배경을 더 알고 읽었다면 한층 풍부하게 다가왔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런데도 책을 덮고 나니 어떤 정서가 몸에 남아 있었다. 타인의 슬픔을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일. 누구도 목소리를 주지 않았던 존재에게 귀를 기울이는 일. 줄거리를 또렷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마음만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 권의 책을 통과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슬픔의 물리학』은 슬픔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 파편적인 형식으로 보여 주는지도 모른다. 오래 남은 문장들을 모아 두었으니 언젠가 다시 읽을 때는 지금과 다른 길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