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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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솔직히 말하자면, 『슬픔의 물리학』을 다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읽는 동안 몇 번이나 길을 잃었고, 한 장을 넘기고서야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익숙한 줄거리의 흐름을 기대한다면 이 책은 꽤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화자의 기억과 가족사, 신화와 상상이 뒤섞이고, 이야기는 한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책을 덮은 뒤에도 몇몇 장면과 문장은 오래 남았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끝까지 걸어 본 슬픔의 미로. 그 안에서 내가 붙잡은 것을 기록해 둔다.

 

책은 비문과 프롤로그로 시작해 아홉 개의 장을 지나 에필로그에 닿는다. 「슬픔의 빵」, 「유기에 반대하며: M 사건」, 「노란 집」, 「시한폭탄」, 「초록색 상자」, 「이야기를 사는 사람」 같은 장 제목은 서로 이어지는 듯하면서도 하나의 줄거리로 단정하게 묶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 구성이 불친절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읽다 보니 파편적으로 이어지는 형식이 기억의 움직임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은 대개 순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한 장면은 다른 장면을 부르고, 개인의 기억은 가족과 시대의 기억으로 번져 간다. 이 책의 흩어진 이야기들도 그런 식으로 서로를 불러낸다.

 

화자는 타인의 슬픔을 통로 삼아 그 사람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배경은 20세기 후반 사회주의 말기의 불가리아에 놓여 있지만, 이야기는 한 시대에 머물지 않고 여러 사람의 기억과 동유럽의 역사를 오간다.

첫 문장부터 이 낯선 감각이 선명하다.

 

“나는 1913년 8월의 끝자락에 남성 인간으로 태어났다.” (11쪽)

 

한 사람의 몸에 갇힌 ‘나’가 아니라, 타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며 여러 삶을 통과하는 ‘나’. 내게는 이 문장이 화자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선언처럼 읽혔다. 다만 이것이 작가의 의도와 맞는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자주 그랬듯, 나는 하나의 해석에 도착하기보다 질문을 품고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내가 이 책에서 겨우 붙잡은 손잡이는 미노타우로스였다. 신화 속에서 우리는 이카로스를 안타까워하고 테세우스에게 공감한다. 아리아드네와 미노스 왕에게도 마음을 건넨다. 그러나 미궁 속 괴물에게는 좀처럼 연민을 보내지 않는다. 저자는 그 점을 이렇게 짚는다.

 

“그에게는 슬픔이 있다. 어떤 동물에게도 없는 슬픔이.” (23쪽)

 

그리고 미노타우로스에게 아무도 목소리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영웅의 이야기에서 그는 쓰러뜨려야 할 괴물일 뿐이지만, 시선을 바꾸면 어두운 미궁에 버려진 존재가 된다. 제목에 들어 있는 ‘유기’라는 말도 그제야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이 소설은 버려진 것, 말해지지 않은 것, 목소리를 얻지 못한 것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신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 가족의 비밀과 한 나라의 역사에도 겹쳐지며, 책 전체에 서늘하고 애틋한 정서를 만든다.

 

가족을 다루는 대목에서 오래 머문 문장이 있다.

 

“비밀과 거짓말의 긴 사슬이 우리를 정상 가족으로 만들어 주었다. 다른 모든 가족과 똑같이.” (83쪽)

 

정상이라는 말이 때로는 말하지 못한 것들을 덮어 둔 결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서늘했다. 누구나 조금씩 비밀을 감추고, 말하지 않는 일에 기대어 가족의 모습을 유지한다면 ‘정상’이라는 기준은 얼마나 단단한 것일까.

 

속담과 관련된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죄지은 자가 쫓기지 않아도 도망친다는 말과 달리, 쫓기면 결백한 사람도 도망칠 수 있다는 화자의 감각에는 억압적인 체제 아래 살아온 사람의 경험이 배어 있는 듯했다. 개인의 가족사와 사회의 역사가 이 책에서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화자는 한때 모든 것의 안으로 들어가고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며 그 능력을 잃은 뒤에는 상실을 보상하듯 무언가를 모으려 한다.

 

“한때 나는 모든 것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 무능력해진 나는 상실에 대한 작은 보상으로 모든 것을 모으고 싶어졌다.” (187쪽)

 

그가 모으려는 것은 오래도록 기념될 만한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죽고, 썩고, 부서지기 쉬운 것들이다. 곧 사라질 것을 기억하고 보존하려는 마음이다.

 

그래서 이 책의 조각난 형식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부서지기 쉬운 것들을 담으려면 매끈하게 다듬어진 하나의 이야기보다 조각난 기록이 더 어울릴 수 있다. 흩어진 장면들은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 둔 작은 기억처럼 느껴졌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힘에 관한 대목도 흥미로웠다. 이야기는 죽음이 기다리는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길이 될 수 있다. 화자가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까닭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야기란 도피처이면서, 잠시나마 구원을 유예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문장은 언어에 관한 것이었다.

 

“단어가 없다고 해서 두려움이 무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더 높이 쌓여 훨씬 더 견딜 수 없이 짓누른다.” (33쪽)

 

이름을 붙이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는 대신 쌓여 간다. 표현하지 못한 슬픔이나 두려움을 품고 살아 본 사람에게는 이 문장이 유난히 깊게 와닿을 것 같다.

 

책은 언어를 얻는 순간 무언가를 잃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갓난아이는 아직 천국의 비밀을 알지만 그것을 표현할 말을 모른다. 언어를 얻을 때쯤이면 그 비밀은 이미 잊힌 뒤다. 말을 배우는 일은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말로 옮길 수 없는 것을 잃는 일이기도 한 걸까.

 

책의 제목을 직접 떠올리게 하는 대목은 후반부에 나온다. 화자는 슬픔을 물리학의 언어로 탐구해 왔다고 말한다. 슬픔은 가스나 전기처럼 고정된 형태나 부피가 없고, 그것을 담는 그릇과 공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하지만 무색무취한 비활성 기체와는 다르다. 슬픔에는 색과 냄새가 있다. 세상의 색과 냄새를 갈아입는 ‘카멜레온 가스’와 같다는 표현이 이어진다.

 

이 대목을 읽으며 제목이 단지 인상적인 수사가 아니라, 이 소설이 오래 붙들고 있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은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가. 무엇이 그것을 담고, 무엇이 그 모양을 바꾸는가.

 

그릇이 한 사람의 몸일 수도, 한 가족일 수도, 한 나라일 수도 있다면 슬픔은 그 크기와 형태에 맞춰 달라질 것이다. 이 소설이 개인의 기억과 가족사, 국가의 역사를 오가는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끝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여전히 많다. 제비 가족을 위해 일부러 불을 켜 두었다가 파리와 나방의 죽음에 마음이 걸리는 장면(148쪽)은 문장 자체는 읽혔지만, 책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선명하게 잡지 못했다. 파리를 죽이든 코끼리를 죽이든 똑같은 살해가 아니냐는 질문도 충분히 따라가지 못했다. 불가리아와 동유럽의 역사적 배경을 더 알고 읽었다면 한층 풍부하게 다가왔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런데도 책을 덮고 나니 어떤 정서가 몸에 남아 있었다. 타인의 슬픔을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일. 누구도 목소리를 주지 않았던 존재에게 귀를 기울이는 일. 줄거리를 또렷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 마음만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 권의 책을 통과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슬픔의 물리학』은 슬픔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 파편적인 형식으로 보여 주는지도 모른다. 오래 남은 문장들을 모아 두었으니 언젠가 다시 읽을 때는 지금과 다른 길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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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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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 『가호』를 읽었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친숙하지만, 소설은 여전히 조금 난해하게 느껴지는 편이다. 이번에도 기대와 경계가 함께했다. 그런데 소개 문구에서 눈길을 끈 대목이 있었다. 하루키의 장편소설 가운데 처음으로 여성이 단독 주인공을 맡았다는 점이다. 소년 주인공이 익숙했던 작가가 여성 인물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했다.

 

『가호』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신이나 초월적인 존재가 베푸는 ‘가호(加護)’를 떠올렸다. 하지만 여기서 가호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가호는 자기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이렇게 설명한다.

 

“여름(夏) 돛(帆)이라 쓰고 가호라고 읽습니다.” (40쪽)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과 달리, 가호는 일 년 중 가장 추운 2월에 태어났다. 소아과 의사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그녀는 타인과 거리를 두는 데 서툴다. 소설 중반에는 가호의 그런 성정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 나온다.

 

어쩌면 나는 의무감이 너무 강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의무감으로 뭔가를 즐기는 체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당연히 즐길 수도 없었다.

천성적으로 타인과 거리를 두는 요령을 잘 모르는 것이리라. 가호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겉으로 즐거운 듯 행동하면 주위에서는 만족하고 나를 평범한 인간으로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그렇게 내 위치가 결정되면 그다음부터는 그것이 깨지지 않게 지켜나가면 된다. (98쪽)

 

가호는 특별한 능력이나 극적인 면모를 앞세우는 인물이라기보다, 주변에서 만날 법한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낯선 사건들 속에서도 그녀의 반응을 따라가게 된다.

 

이야기는 불쾌한 소개팅 자리에서 시작한다. 식사가 끝날 무렵, 상대 남자는 가호의 얼굴에 대해 무례한 말을 던진다.

 

“그쪽처럼 얼굴이 별로인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이 별로라는 사실이 그쪽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마 그런 게 궁금했을 거예요.” (11쪽)

 

첫 장면부터 불편하다. 가호는 그 불편함을 삼키듯 넘긴다. 타인과 거리를 두는 법을 잘 모르는 그녀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다 말하는 개미핥기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개미핥기는 가호에게 무사시사카이로 이사해야 한다고 권하고, 개미핥기 부부와 재규어, 흰개미 여왕, 수호천사까지 차례로 나타난다. 현실적인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환상인지 가늠하기 어려워진다. 이 낯선 전개는 하루키 소설 특유의 난해함을 한층 키운다.

 

 

전개가 낯설어도 가호라는 인물에게는 정이 간다. 어머니에게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가호가 무사시사카이를 떠나 본가로 향하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은 소설 전체에서 가장 조용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가호는 잠시 아버지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 눈의 움직임을 쫓았다. 긴 세월에 걸쳐 운전이 몸에 밴 사람답게 눈을 움직인다. 신중하고, 주의 깊고, 그러면서도 여유롭다. 가호는 그 눈의 움직임을 곁에서 바라보는 것이 어릴 적부터 좋았다. 아버지는 꾸준히 늙어 갔지만 눈의 움직임만큼은 지금도 끄떡없다. (132쪽)

 

운전이 몸에 밴 아버지의 눈을 딸이 가만히 좇는다. 기이한 존재들이 잇달아 나타나는 이야기 한가운데에 이런 일상의 온기가 놓여 있어, 오히려 환상적인 장면들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을 듯하면서도 한발 비켜서 있는 인물로 가호의 삼촌이 있다. 삼촌은 가호에게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건 그렇고 아마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을 거야. 진정한 이야기란 눈에 보이는 형태로든 감춰진 형태로든 반드시 어떤 유용성을 포함한다고. 요컨대 실익 없는 이야기는 시시하다. 재미없다. 무가치하다는 뜻 아닐까.” (165쪽)

 

이 말을 읽고 나면 『가호』가 품은 ‘숨겨진 유용성’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책을 읽는 동안 그 답을 분명하게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개미핥기 부인의 말이 이야기를 다른 방향에서 비춘다.

 

당신은 당신의 세계 속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개미핥기 부인은 그렇게 말했다. 아마 그렇게 말했지 싶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여러 가지 것들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의 세계의 중심점, 요컨대 나를 향해 모여든다고 말했다. (213쪽)

 

누구나 자기 삶이라는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는 뜻일까. 이 대목을 읽으며 결국 소설이 건네는 질문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내 삶이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가볍게 시작해 묵직한 질문을 남기는 이야기였다.

 

하루키는 모녀 관계와 여성의 시선에 초점을 맞췄다고 밝힌 바 있다. 가호의 능동적인 움직임은 관조적인 소년의 성장을 그려온 전작들과 다른 인상을 준다. 다만 모녀 갈등이 풀리는 방식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갈등이 충분히 깊어지거나 변화하기 전에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세계관이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회귀와 빙의, 환생을 떠올리게 하는 환상적 소재가 하루키의 소설에 등장할 줄은 몰랐다. 이계의 존재들이 잇달아 나타나는 속도감은 흥미롭지만, 각 존재의 의미가 충분히 쌓이기 전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듯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에서 기대하는 무게감에 비추어 보면 『가호』는 다소 가볍게 읽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기이한 사건들 사이에서 가호의 일상과 가족의 온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 삶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갈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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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충 사육 준수 사항 ㅣ 안전가옥 오리지널 48
김혜영 지음 / 안전가옥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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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벌레가 한데 붙은 제목도 낯선데, 뒤에 ‘준수 사항’까지 붙어 있다. 공문서처럼 건조한 제목이 오히려 불길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해 여름, 전 국민이 같은 빵에 열광했다. 그게 빵이 아니라는 건 아무도 몰랐지만.”이라는 책 소개 문구도 궁금증을 키웠다. 김혜영 작가가 ‘괴물을 사랑한다’고 소개한 문장까지 더해지니,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지 알고 싶어졌다.


주인공 정한은 트럼펫으로 생계를 꾸리지 못한 채 빚에 쫓겨 귀농한 청년이다. 야심 차게 시작한 딸기 농사마저 실패한 그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는 소금빵을 닮은 식용 애벌레, ‘빵충’을 키우는 사업이다.


마침 전국에는 빵충 디저트 열풍이 불고, 정한은 뜻밖의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사육 농가가 늘면서 공급 과잉과 가격 폭락이 찾아온다. 경쟁과 규칙 위반까지 얽히며 상황은 점점 예상 밖으로 흘러간다.


빵충 사육의 세계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 판매할 수 있는 것은 번데기가 되기 전의 유충뿐이고, 번데기를 발견하면 보고해야 한다. 빵충을 밖으로 내보내거나 성충으로 변태하게 두어서도 안 된다. 왜 이런 규칙이 필요한지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드러난다.


규칙을 감독하는 관료적인 인물들과, 각자의 사정으로 귀농해 사업에 뛰어든 농가 사람들도 이야기를 채운다. 이들은 특별한 영웅이나 절대적인 악인이 아니다. 실패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준수 사항’은 배경 설정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 전체를 움직인다. 독자는 규칙을 읽는 순간부터 어떤 항목이 먼저 깨질지 기다리게 된다. 규칙이 구체적일수록 위반의 순간은 더 무섭게 다가온다.


특히 한 사람의 규칙 위반이 개인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 전체로 번지는 구조가 흥미롭다. 이 규칙은 사육장을 지키는 약속이면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맺은 사회적 계약처럼 읽히기도 한다. 제목 자체가 이야기의 설계도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정한은 영웅과 거리가 먼 인물이다. 재능이 없지는 않지만 큰 성공을 거두기에는 부족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서른 즈음에 음악으로 생계를 꾸리지 못하고 사회에서 제 몫을 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웃음과 씁쓸함을 함께 안긴다.


귀농도 ‘진짜 나’를 찾는 낭만적인 여정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정한은 자신이 실패한 청년 농부가 되었음을 깨닫고, 애초에 이것이 온전한 선택이었는지 묻는다. 밀려난 끝에 도착한 곳에서 다시 삶을 꾸려야 하는 현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 현실감 덕분에 이후의 파국도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한의 선택이 아주 특별한 사람의 결정이 아니라, 절박한 상황에 놓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선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한이 도착한 마을은 평화로운 전원 풍경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마을에 자리 잡았으니 발전 기금을 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고, 정한은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큰돈을 내기로 한다. 이장은 마을에서 거절하면 적이 생길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건넨다.


현금 영수증도 끊을 수 없는 돈이 사라지는 장면은 우스우면서도 서늘하다. 이후 정한은 멧돼지 출몰처럼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알려 주지 않은 일을 겪고 실망한다. 도시를 떠나 도착한 곳에도 경쟁과 텃세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 풍자 덕분에 소설은 괴물 이야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농촌 현실을 바라보는 이야기로 읽힌다.


이러한 빵충 사육은 정한에게 단순한 돈벌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제대로 된 수입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집이나 차가 아니라 ‘해명할 필요 없는 삶’이었다.


경쟁과 증명이 끊이지 않는 세계에서 밀려난 사람에게,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하루는 큰 위안이 될 수 있다. 정한이 그 안에서 소속감과 안도감을 얻을수록, 그 삶이 무너질 때의 낙차도 커진다. 독자는 정한의 안도감에 공감하면서도 불안해진다.


소설은 자연에서 난 것과 인간의 의도가 더해진 것을 대비한다. 보기 좋고 맛있는 것에는 인간의 욕망과 선택이 들어간다는 생각이, 소금빵을 닮은 벌레라는 설정과 만나며 섬뜩한 의미를 얻는다.


달콤한 풍요는 어디까지 자연스럽고, 어디부터 인간의 욕심일까. 빵충 사업의 성공을 따라가다 보면 이 질문이 남는다. 풍요를 만들어 내는 과정과 그 대가를 누가 감당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빵충 사육 준수 사항』을 읽고 나면 절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이 어떤 선택까지 하게 될지 생각하게 된다. 정한은 눈앞에 나타난 마지막 기회를 붙든다.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쉽게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 이 소설을 더 불편하게 만든다.


공포의 근원은 괴물 자체라기보다 괴물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욕망과 침묵에 있다. 성공의 기회 앞에서 무엇을 감수하는지, 그 대가는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묻는 이야기다. 규칙을 어긴 사람뿐 아니라, 의심할 기회 앞에서 편안한 쪽을 택하고 못 본 척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빵과 애벌레를 결합한 발상이 흥미롭고, 웃음과 풍자에서 긴장과 공포로 넘어가는 장르 전환도 인상적이었다. 다만 후반부의 변화가 급격하게 느껴져 앞부분과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었다. 호러 묘사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그럼에도 평범한 사람들이 욕망과 침묵 속에서 어떻게 괴물을 만들어 가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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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무늬
백희성 지음 / 북로망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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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성 작가의 『기억의 무늬』는 사람을 얼굴이 아니라 감각과 흔적으로 기억하는 청년의 이야기다. 안면인식장애를 지닌 주인공이 부모의 죽음에 얽힌 오래된 사건을 다시 좇는다는 소개에 끌려 책을 펼쳤다. 작가의 전작 『빛이 이끄는 곳으로』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도 한몫했다.


파리의 패션학교에 다니는 스물두 살 카미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대신 목소리와 걸음걸이, 옷감의 질감과 냄새 같은 감각으로 사람을 구분한다. 세 살 때 부모가 살해되는 현장을 목격한 뒤 생긴 안면인식장애, 그리고 그날 손끝에 남은 옷감의 촉감은 카미가 오랫동안 간직해 온 단서다. 19년이 지나 카미는 그 기억을 붙들고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이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안면인식장애를 앓고 있어 사람들의 눈, 코, 입이 마치 물결처럼 흔들려 보일 뿐이다.”


카미를 읽으며 데이비드 발다치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 나오는 에이머스 데커가 떠올랐다. 둘 다 남다른 지각 방식을 지녔고, 가족의 죽음이라는 상처가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진실에 다가가는 방식은 정반대다. 모든 것을 잊지 못하는 데커가 기억을 되짚어 논리적으로 추리한다면, 카미에게 남은 것은 세 살 때의 파편적인 촉감이다.


데커의 기억이 수사의 무기라면 카미의 촉감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증명할 수 없는 믿음에 가깝다. 한 사람은 기억으로, 다른 한 사람은 감각으로 진실을 좇는다. 두 인물을 나란히 떠올리며 기억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다르게 펼쳐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


『기억의 무늬』가 독특한 점은 눈이 아닌 손끝으로 사건을 읽어 간다는 데 있다. 카미는 얼굴과 표정보다 옷과 가구에 남은 흔적을 단서로 삼는다. 패션학교를 배경으로 직물과 옷에 관한 묘사가 이어지는데, 특히 소설의 첫 문장이 오래 남았다.


“천은 수만 가닥의 실이 짜여 태어난다. 그리고 그 천들을 잇대어 옷을 완성하는 것은 바늘이 끌고 간 가느다란 실의 흔적이다.”


옷이 실의 여정을 따라 완성되듯 사건의 진실도 흔적을 따라 드러난다는 암시처럼 읽혔다. 제목의 ‘무늬’ 역시 옷감에 새겨진 결인 동시에, 기억과 시간이 겹쳐 만들어 낸 흔적처럼 느껴졌다.


카미는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의 표정이 어떠냐고 물은 적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카미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좋을 때와 나쁠 때 슬플 때조차 얼굴에 변화가 거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 가슴은 분명 감정에 따라 요동친다. 단지 얼굴로 표현되지 못할 뿐이었다.”


상대의 얼굴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도 얼굴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설정이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이 작품에서 안면인식장애는 추리를 위한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타인을 알아본다는 것은 무엇인지,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은 어떻게 전해질 수 있는지 묻는다.


신입생 시절 봉사활동을 떠올리는 장면도 인상 깊다.


“가장 행복한 순간 그들은 세상에 소란을 끄고 조용히 내면의 침묵과 마주했다. 외부의 빛이 차단된 곳에서 비로소 등불이 켜지는 것이었다.”


보는 감각이 닫힌 자리에서 다른 감각이 열릴 수 있다는 생각은 카미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처럼 느껴졌다.


소설에서 가구와 직물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사건의 단서이자 기억을 담아 두는 그릇이다. 건축가 출신인 작가의 시선은 공간과 사물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아기 침대와 엄마 의자, 커튼 같은 물건이 사건의 의미를 바꾸는 장면들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아이에게 옷을 입히듯, 엄마의 향기를 입히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천 조각을 조그맣게 잘라 아기 침대와 엄마 의자 사이에 끼워놓고 봉인해 두었던 것이다.”


범인을 찾는 여정은 한 가족의 사랑과 상실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오래된 가구가 간직한 것은 나무의 무게만이 아니라 누군가 가족을 지키려 했던 마음이다. 사물이 사랑의 흔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정서를 잘 보여 준다.


카미의 안면인식장애와 촉각 중심의 추리는 참신하다. 부모를 잃은 어린 시절의 사건을 다시 파헤쳐 가는 과정에도 관심이 갔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의 긴장감이 기대보다 약하게 느껴졌다. 가족을 둘러싼 사랑과 상실의 감정은 잘 살아 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미스터리의 분위기가 옅어지는 점은 아쉬웠다.


소설을 다 읽은 뒤에는 내가 사람을 무엇으로 기억하는지 생각했다. 얼굴이나 목소리일 수도 있고, 손에 닿던 감촉이나 옷에 배어 있던 냄새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카미의 안면인식장애를 독특한 추리 장치로만 보았지만, 읽을수록 이 설정은 ‘타인을 안다’는 말의 의미를 묻는 질문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믿곤 한다. 하지만 얼굴은 한 사람의 일부일 뿐이다. 옷을 고르는 취향과 걸음의 속도, 손에 밴 습관에도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쌓여 있다.


카미의 세계는 불완전해 보이지만, 그가 흔적을 읽는 방식은 오히려 정직하게 느껴졌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감정에 따라 다시 짜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흔적에만 머무르지 않으려는 카미의 모습은 기억을 읽는 일이 결국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일임을 보여 준다. 기억의 무늬를 읽는 일은 과거를 붙드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와 화해하는 과정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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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호
성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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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서적을 제공받가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성해령의 소설에서 성공한 사람을 찾아보긴 어려울 것이다. 독립은 요원하고 우정은 실패하며 사랑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실패가 산적한 서사를 위해 소설가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마술은 고통의 서사를 치유의 서사로 교체하는 것이다. (290쪽)

 

『대부호』를 읽고 나서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해설의 이 문장이었다. 해설이 짚은 대로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끝내 이기지 못한다. 집을 구하고 가족을 돌보고 친구를 떠올리는 일상 속에도 해피엔딩이 들어설 자리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그 실패를 화해나 위로로 서둘러 봉합하지 않는다. 그 덮지 않음은 불편하면서도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만드는 긴장으로 남는다. 여덟 편의 단편 가운데 특히 인상 깊었던 작품은 「임장」, 「하악」, 「나방파리」였다. 선망과 가족, 우정이라는 서로 다른 관계를 다루는 세 작품은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모인다. 가까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정말 그 사람을 알고 있는가.

 

먼저 「임장」의 주인공 ‘나’는 자기 집을 마련하려는 마음으로 부동산 임장 모임에 참여하고, 그곳에서 모임을 이끄는 민연 언니를 선망한다. 일에 능숙하고 말이 분명한 민연을 동경하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그를 찾아 나섰다가 믿기 어려운 장면과 마주한다. 소설은 그 이후의 일을 직접 확인하도록 독자에게 남겨 둔다. 내게 오래 남은 문장은 화자가 반지하에 살던 친구의 집 냄새 때문에 친구와 멀어졌던 기억이었다.

 

친구에게 절교 편지를 쓰면서도 집에 가기 싫다는 진짜 이유는 말하지 못하고, 친구의 말투와 버릇이 싫다는 다른 이유를 적었다는 고백이다. “어떤 거짓은 진실의 반대가 아니라 대체일 수 있다”는 문장이 서늘한 것은 거짓말을 한 사람이 특별한 악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계급의 차이는 냄새라는 감각으로 옮겨지고, 그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사람은 말투와 버릇을 핑계로 삼는다.

 

임장 모임 역시 그런 번역이 일상이 된 공간처럼 보인다. 평수와 입지와 가격을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서는 서로의 처지를 냄새 맡듯 가늠한다. 남의 집을 평가하는 위치에 선 사람은 동시에 자기 처지의 열세를 선명하게 느끼기도 한다. 화자가 민연을 선망하는 방식도 다르지 않다. 선망은 상대를 정확히 보는 일이 아니라 자기 결핍을 상대에게 비추는 일일 수 있다. 그러므로 선망하던 사람이 사라질 때 흔들리는 것은 민연의 정체만이 아니다. 상대를 안다고 믿었던 ‘나’의 시선도 함께 흔들린다.

 

민연의 집을 치우며 마주한 쓰레기가 “생명보다 더 치열하게 부패하고 있었다”는 표현은 이 소설의 냄새와 이어진다. 숨기고 싶어 치우려 한 것이 사라지기는커녕 더 강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감각이다.

 

「하악」은 마흔 살 여성 자인이 발달장애인 동생 태인과 조카 서린을 만나러 가는 하루를 따라간다. 자인은 낮에는 북쪽으로, 저녁에는 남쪽으로 이동하며 돌봄의 시간을 지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조금씩 깨닫는다. 가족애라는 말이 가장 먼저 지워 버리는 감정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가족 소설이다. 자인은 동생을 두고 자신이 한 번도 원한 적 없던 동생이라고 생각한다.

 

이 구절이 정직하게 다가온 것은 돌봄이 흔히 헌신과 성장의 이야기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자인에게 동생은 선택하지 않은 몫이며, 자신이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축복의 목록에 놓인 존재다. 그렇다고 자인이 동생을 미워하기만 하는 것도, 사랑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양가적인 마음을 해소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작품의 힘이다. 해설이 말한 치유의 서사로의 교체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작품이라고 느꼈다. 자인은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선망과 열패감을 동시에 느낀다. 축복을 많이 받으며 자란 서린을 만나는 장면에서 그 감정은 창밖 서울의 불빛으로 표현된다. 빼곡한 불빛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삶이라는 사실, 살아가는 데 이렇게 많은 빛이 필요하다는 사실 앞에서 자인은 혼자 아득해진다.

 

그 순간의 감정은 단순한 부러움을 넘어선다. 사는 일 자체가 이만큼의 힘을 요구한다는 것을 몸으로 실감하는 듯하다. 가장 가까운 가족 사이에도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하악」의 서늘함이라면, 그 거리를 헤아리게 하는 단위는 창밖의 불빛이다.

 

「나방파리」는 서로의 처지에 깊이 이입하며 친구가 되었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멀어진 두 사람의 이야기다. 화자 일영은 종희 언니의 어린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받고, 오래 눌러 두었던 관계의 단절과 죄의식을 다시 마주한다. 제목 속 나방파리는 아주 작은 힘에도 짓이겨지는 미물이다. 오랜 친밀함도 그만큼 쉽게 으스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가장 아프게 다가온 장면은 종희가 일영에게 자신의 고통을 말하며 일영의 두통은 진짜가 아니었다고 몰아붙이는 대목이다. 검사 결과가 깨끗했다는 사실은 고통이 가짜였다는 말로 바뀌고, 카페의 손님과 점원이라는 자리는 ‘진짜 사는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가르는 선처럼 작동한다. 이 장면은 사과나 해명이 아니라 고통의 위계를 선언하는 순간이다. 누구의 고통이 진짜인지를 객관적으로 판정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사이이기에 더 정확히 찌를 수 있다는 점이 아프다. 일영은 무슨 말이든 하려다 입술만 깨물고 호텔방을 나선다.

 

그 모습에서 「임장」의 절교 편지가 떠올랐다. 「임장」의 화자는 하지 못한 진짜 말을 다른 거짓으로 대체했고, 일영은 해야 할 말을 입 안에 가둔다. 방식은 달라도 두 사람은 끝내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관계를 잃었다. 아들의 부고는 이미 끝난 줄 알았던 관계가 죄의식의 형태로 남아 있음을 드러낸다. 세 작품을 겹쳐 읽으며 공통으로 보인 것은 말하지 못하는 일, 계급과 처지의 비대칭, 그리고 그런 일이 일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진다는 점이었다. 「임장」에서는 진실이 거짓으로 대체되고, 「하악」에서는 감정이 가족애의 언어에 눌리며, 「나방파리」에서는 말이 입술 사이에서 사라진다. 반지하 집의 냄새와 축복받지 못한 사람의 열패감, 카페 점원과 손님의 거리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같은 비대칭을 드러낸다. 임장 모임과 돌봄의 하루와 호텔방은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들의 불편함은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다. 독립은 요원하고 우정은 실패하는 세계에서 「임장」은 자기 집을 향한 욕망을 독립의 불안과 겹쳐 놓고, 「나방파리」는 우정의 실패를 구체적인 장면으로 보여 준다. 「하악」은 가족이라는 단단해 보이는 관계도 그 운명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말한다. 성해령은 실패를 위로로 바꾸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자기 안의 선망과 열패감, 그리고 작은 악의를 돌아보게 한다. 가까운 사람을 안다고 믿는 마음은 어쩌면 상대를 보는 일보다 자신의 결핍을 그에게 비추는 데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대부호』는 그 익숙한 믿음을 조용히 흔들며, 우리가 서로에게 끝내 알 수 없는 존재로 남을 가능성을 오래 생각하게 하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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