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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4년 5월
평점 :
자기 주장이 강한 이에게 주로 하는 조언으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을 뜯어보면 재미있는 점이 있다. 국어사전상으로 ‘객관적’이라는 말은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본다는 것은 상황을 파악하는 것으로 이 파악하는 것 자체가 주관적이고 자기 중심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객관적으로 본다는 말은 자기 중심적을 탈피해서 상환을 파악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설을 읽을 때에는 이러한 경향이 누그러지는 것 같다. 소설읽기는 작가와 독자가 같이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독자는 소설 속 주인공보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과 인물의 일부만 보여줌으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가들이 있다 미나토 가나에도 그런 작가들 중 한 명이다. 이 작가는 각 장 마다 화자를 달리 함으로써 한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한다. 『일몰』에서도 사건을 그렇게 풀어간다. ‘에피소드’와 ‘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각각 말하는 이가 다르게 등장한다.
‘에피소드’에서는 하세베 가오리라는 신진 영화감독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반면 ‘장’으로 이루어진 곳에서는 미히로라는 필명으로 각본을 쓰는 가히 치히로가 등장한다. 그 둘을 연결하는 하나의 사건은 15년 전 일어난 사건을 영화화하기 위해 하세베 가오리가 가히 치히로에게 각본을 의뢰하면서 부각되는 ‘사사츠카초 일가족 살해 사건’이다. 이는 한 은둔형 외톨이 청년이 고등학생인 여동생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질러 부모까지 죽게 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 청년은 사형선고를 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이 사건을 영화화해보고 싶다는 하세베 가오리의 제안을 가히 치히로가 받아들이며 사건이 재조명된다.
가오리는 치히로와의 만남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죽은 후에 주위 사람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말만으로 다테이시 사라라는 사람이 규정되는 건 불합리하잖아요. (75쪽)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주위 사람들이 말이 아닌 자신의 시각으로 죽은 사라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모습, 한 꺼풀 벗긴 얼굴을 찍어 유명해진 가오리의 말이기에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치히로는 고향이 사사츠카초 일대여서 학창시절 그 사건을 보고 겪으며 자란 케이스이다.
위에 언급한 대로 각 에피소드와 장에서는 가오리와 치히로가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가오리는 어릴 적부터 엄한 엄마에게 자라면서 굴곡진 가정사가 있었다. 어린 가오리가 조금의 실수라도 하면 날씨에 상관없이 베란다로 쫓아냈는데 그곳에서 옆집에 자기 또래의 누군가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말은 나눠보지 않았지만 그 또래를 사라라고 짐작한 가오리는 훗날 그 사건을 듣고는 사라라는 인물을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살아가고 있는 무명의 각본가인 치히로에게는 언니가 한 명 있다.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언니는 유럽으로 유학을 간 것으로 나오면 치히로가 휴대폰으로 연락도 자주 한다. 그런 그녀도 이야기가 이어지자 어두운 과거거가 사사츠카초 사건과 같이 드러난다.
가오리와 치히로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가오리가 겪어 나온 과거와 치히로가 겪은 어두운 삶의 밑바닥이 서로 연관이 이어진다.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서로 이어지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미나토 가나에 소설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몰이라는 말이 제게는 재생의 상징입니다.”
재생이라는 말은 적든 많든 허물어진 다음에 쓰는 말이기에 주인공인 가오리와 치히로가 겪은 어두운 절망의 밑바닥이 더 어둡고 쓸쓸하게 그려지는 것 같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의 품을 떠나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가오리의 다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러니, 살아야 한다.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336쪽)
이야기가 진행 될수록 사건의 중심이 된 사라라는 인물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도 소설을 읽는 재미였다. 책 뒤표지의 ‘사실과 진실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 다테이시 사라이기 때문이다. 각 에피소드와 장을 시작하기 전의 어두운 그림도 이야기의 전개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오랜만에 잘 짜여진 미스터리 소설을 읽은 기분이 든 『일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