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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작(多作)의 작가만큼이나 과작(寡作)의 작가의 대표작을 꼽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다카노 가즈아키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예외가 된다. 적지 않은 소설을 발표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에게 그의 대표작은 『제노사이드』이다. SF와 미스터리요소가 가득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몰아치는 가운데 소위 국뽕이라 불리는 애국심도 한 스푼 가미가 되어 있는 소설이어 긴 이야기임에도 빠져들게 만드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일본에서도 발표되지 않은 단편집을 한국에서 먼저 발표했다. 단편집이기에 수록된 단편 소설을 이미 발표가 되었을 거지만 단편집으로 발표는 아직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보게 된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이지만 기대했던 『제노사이드』보다는 전작인 『건널목의 유령』쪽에 가까운 단편집이었다. 총 6편으로 구성된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를 차례대로 살펴보면 이렇다.
(1) 발소리
13년 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주인공 사와키는 동창 다니무라에게 일자리를 부탁하기 위해 만났다 그에게 뜻밖의 부탁을 받는다. 다니무라가 귀가할 때마다 이상한 발소리가 자신을 따라온다는 것이다. 겁에 질린 그는 그 정체의 확인을 부탁한다. 다니무라가 들은 발소리가 단순한 환청인지, 실제로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따라오는 것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니무라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그의 귀갓길 중 하나인 공원에서 의문의 발소리를 듣게 되는 사와키는 이 기묘한 현상을 파헤치기로 결심하고 점차 불안과 긴장감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발소리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마주친 형사에게서 얼마 전 근처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이윽고 예상치 못한 진실이 드러난다. 살인 사건이라는 미스터리에 유령이나 초자연적 요소를 활용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2)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
표제작인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는 젊은 여성의 실종과 사망 사건을 다루는 미스터리 소설이다. 이야기는 한적한 지역의 사찰 묘지에서 실종된 젊은 여성이 시신으로 발견되며 시작한다. 피해자는 쓰키시마 미야코로 광고회사에 근무했던 스물아홉의 회사원이다. 사건을 맡은 형사 후루키는 특별한 물증도, 명확한 동기도 찾지 못해 수사에 어려움을 겪는다. 후루키는 피해자의 연인인 요네무라 구니히코를 주요 용의자로 보고 심리적 압박을 가하지만, 결정적인 단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그러던 중 요네무라는 피해자인 미야코가 발견된 곳으로 참배를 가고 싶다는 요청을 후루키에게 건넨다. 마지막으로 사건현장에서 그를 압박해보고 싶었던 후루키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 둘은 사건이 일어난 한 적한 사찰로 길을 떠난다.
반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사찰 주변에서는 유령을 봤다는 목격담이 잇따라 등장한다. 젊은 커플들이 유령을 봤다며 소란을 피우고, 사찰 내부는 점점 혼란에 빠진다.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은 단순한 도시괴담처럼 보이지만, 이야기는 죽은 자의 ‘한(恨)’과 미련,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로 확장되며 뜻밖의 단서가 발견되며 사건이 해결된다.
(3) 세 번째 남자
주인공 마리코는 꿈속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남자의 생생한 모습에 의문을 품는다. 생생한 꿈의 기억에 남편은 전생의 기억이 아닐까란 말을 하고 그 말을 들은 마리코는 더욱 혼란스럽다.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던 중 마리코는 지인의 소개로 전생을 본다는 사에키 요코라는 여성을 만난다. 하지만 방안에서 단 둘이서 만난 자리에서 요코는 방안에 세명이 있다는 말로 그녀에게 더욱 혼란을 준다.
꿈에서 본 남자는 실제로 과거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인물로 그가 사망한 날은 마리코가 태어난 날과 같았다. 마리코는 점차 그 남자의 마지막 순간과 유언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이 유언을 남자의 유족에게 전하려고 노력하는데, 그 과정에서 사고의 진실과 자신이 왜 이 꿈을 꾸게 되었는지 서서히 밝혀진다.
이야기는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주인공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꿈속 '세 번째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반전과 함께 마무리된다. 작품은 기억, 전생, 타인의 삶과 죽음이라는 소재를 미스터리하게 풀어내며, 마지막에 이르러 요코가 언급한 세 번째 남자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 의미가 따뜻하게 다가와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 중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4) 아마기 산장
본격적으로 유령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이즈반도 아마기 산맥 가장자리에 위치한 외딴 산장을 배경으로, 주인공인 기자 하먀미에게 유령 저택을 조사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옴으로 시작되는 미스터리 소설이다.
하야미는 부동산 업자인 친구로부터 기묘한 사연이 얽힌 산장을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 산장은 원래 제국대학 해부학 교수의 소유였으나, 7년 전 교수의 행방이 묘연해진 뒤 최근 실종 선고가 내려진 상태이다. 하야미는 산장에 얽힌 과거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현장을 조사하며, 그 과정에서 유령을 봤다는 목격담과 불길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전쟁을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때를 배경으로 하기에 이야기는 지금의 현실과 거리가 있는 내용도 많이 있다. 게다가 산장에는 과거의 전쟁 범죄, 특히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731부대와 관련된 만행이 중요한 단서로 등장한다. 산장에 머물렀던 인물들, 특히 실종된 교수의 과거 행적과 그가 저질렀던 잘못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단순한 유령 미스터리를 넘어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죄의식까지 다룬다.
(5) 두 개의 총구
미스터리 소설에서 단골로 쓰이는 소재 중 하나는 다중인격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로부터 내려왔기에 적지 않은 역사도 자랑한다. ‘두 개의 총구’는 이중인격을 가진 무차별 살인자와 같은 건물에 갇힌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이시야마 겐타는 연휴에 학교의 왁스를 칠하는 일을 하고 있다. 2인 1조로 일을 하던 중 아저씨는 회사에 잠시 다녀온다고 마무리를 맡긴다. 일을 마무리하던 중 인근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라디오에는 무차별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뉴스가 나오며 건물안에서 나오지 말라는 당부도 들린다. 건물에 갇히게 된 이시야마지만 하필이면 범인도 그가 있던 학교로 숨어든다.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 범인은 사실 이중인격(다중인격)을 가진 인물이다. 주인공은 살인자와 자신이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극한의 공포와 긴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두뇌 싸움과 심리전을 벌인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 폭력은 비단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는 사항이다. 이러한 문제를 현실적으로 다루면서,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어둠과 폭력성,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 심리의 묘사가 깊이 있게 다루어 진다.
(6) 제로
제로는 앞선 5편의 단편보다 초자연적인 현상은 줄이고 SF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있는 소설로 2054년 미국 뉴멕시코의 해변에서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 남자는 기억상실증 환자가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기관으로 인도되어, ‘제로’라는 새 이름을 얻고 현실에 적응해 간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강한 갈망에 휩싸여,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게 된다. 물질을 소립자 단위로 분해했다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실험에 지원하는 것인데 이를 이용하면 미래로 갈 수 있다는 설명을 듣는다. 하지만 제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미래가 아닌 과거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다.
SF적인 요소가 강한 덕분인지 ‘제로’는 다른 단편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분량도 다른 소설보다 적은 것도 그 느낌을 더해 준다.
(7) 마무리
『죽은 자에게 입이 있다』의 뒤표지에 이런 글이 있다.
‘객관적 사실에서 한 발짝 물러날 때, 불가사의한 세상은 그 진상을 비로소 드러낸다.’
객관적 사실에서 물러선다는 것이 초자연적인 소재로 이어질지는 몰랐다. 인간이 사건을 일으키고 그 사건을 인간이 해결해나가는 미스터리에 익숙해서인지 나에게 큰 재미로 다가오진 않은 단편 소설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 모든 것이 흥미롭게 이어지는 글을 보여준다. 원하던 내용은 아니어서 아쉽기는 하나 다카노 가즈아키의 다음 소설을 충분히 기대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문장은 세 번째 남자에서 찾았다.
인간이란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을 치면서도 어째선지 불행해질 만한 일만 저지르는 법이죠. (1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