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디 할머니 - 소설가가 사랑하는 박완서 단편 베스트 10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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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의 소설은 이상할 만큼 오래 남는다. 읽는 동안에는 피식 웃게 만드는 장면이 많은데, 책을 덮고 나면 그 웃음이 어느새 서늘한 질문으로 바뀌어 있다. 쥬디 할머니역시 그랬다.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다른 시대와 다른 인물을 그리고 있지만,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모인다. 우리가 평온하다고 믿는 일상은 얼마나 쉽게 균열을 드러내는가.


이번 단편집에서 특히 오래 마음에 남은 작품은 표제작 쥬디 할머니애보기가 쉽다고?, 부처님 근처였다. 세 작품은 노년, 돌봄, 전쟁이라는 서로 다른 소재를 다루지만, 모두 평범한 삶 속에 숨어 있는 외로움과 상처를 들춰낸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표제작 쥬디 할머니는 처음에는 조금 우스꽝스럽다. 미국에 사는 손녀의 사진을 크게 걸어두고, 세련된 노년을 연출하려 애쓰는 할머니의 모습은 허영심 많은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 허영은 외로움을 감추기 위한 마지막 울타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식이 보고 싶어 일부러라도 앓아눕고 싶다는 고백은 웃음을 단숨에 멈추게 만든다. 특히 외국식 이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세태를 비틀며 보여주는 풍자는 지금의 SNS 문화와도 묘하게 겹쳐 보였다. 보여지는 삶을 애써 꾸미는 사람들의 모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애보기가 쉽다고?는 은퇴 후 손주를 돌보게 된 한 남성을 통해 돌봄 노동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사람이 가족 안에서는 너무도 쉽게 '아이 보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과정은 웃기면서도 씁쓸하다. 육아를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처럼 여기지만, 그 노동을 떠맡은 사람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진다. 박완서는 그 과정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내면서도 가족 안에서조차 돌봄이 얼마나 쉽게 당연한 희생으로 소비되는지를 날카롭게 짚어낸다.

 

세 작품 가운데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긴 것은 부처님 근처였다. 전쟁이 남긴 상처를 다루지만 거창한 비극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초값을 흥정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슬픔 역시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시간을 보여준다. 특히 세월이 흐르며 상처를 기억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현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은 오래 마음을 붙들었다. 잊는다는 것이 반드시 치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박완서 작가는 조용하지만 강한 문장으로 들려준다.

 

세 작품을 함께 읽으며 느낀 것은 박완서 작가가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균형감이었다. 그는 인물을 쉽게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냉정하게 재단하지도 않는다. 허영도 보여주고, 속물적인 모습도 드러내며, 때로는 이기적인 마음까지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독자는 끝내 그들을 미워할 수 없다. 누구나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이 작품들이 수십 년 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노년의 외로움, 가족 안에서의 돌봄, 시대가 남긴 상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마음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쥬디 할머니는 오래된 작품집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을 비추는 이야기처럼 읽혔다.

 

박완서 작가는 독자에게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웃으며 읽기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마음이 묵직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을 관찰하는 날카로운 시선과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이해가 함께 살아 있는 작품. 그래서 이 단편집은 읽고 난 뒤에도 여러 날 동안 문장과 장면들이 마음속을 천천히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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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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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이후 무려 10년 만에 천명관 작가가 새로운 장편소설을 내놓았다. 제목은 아코디언. 오래 기다렸던 신작인 만큼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가 컸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작품은 예상보다 훨씬 비정하면서도 오래 마음을 붙드는 소설이었다. 1950년대 전쟁 직후 서울을 배경으로 삶의 가장 밑바닥까지 밀려난 앵벌이 아이들의 생존기를 그리는데, 읽는 내내 작가가 시대를 얼마나 치밀하게 복원하려 애썼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단순히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전후 서울의 공기와 냄새, 거리의 소음까지 생생하게 되살려낸 작품이었다.

 

소설은 첫 장면부터 독자를 차가운 현실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

 

"버스 정류장엔 찌그러진 깡통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한 소년이 죽은 개처럼 엎드려 있었다. 하늘엔 회색 구름이 짙게 드리웠고 바람이 찢긴 가루눈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6)

 

첫 문장만으로도 이 소설이 어떤 온도로 흘러갈지 직감하게 된다. 낭만도 미화도 없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버텨야 하는 아이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내던진다. 그 소년이 바로 주인공 동이다. 피란길에서 어머니와 헤어진 동이는 '양 목사'가 운영하는 앵벌이 조직으로 흘러 들어간다. 종교의 이름 아래 자행되는 착취와 폭력은 초반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줌이 마려우면 그 자리에서 싸도 좋고 배가 고프면 눈을 뭉쳐서 먹어도 좋아. 하지만 도망갈 생각은 꿈속에서라도 하지 마라. 우린 항상 널 지켜보고 있으니까." (9)

 

이 한마디만으로도 아이들에게 허락된 세계가 얼마나 잔혹한지 충분히 전달된다. 이어지는 호밀죽 한 그릇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풍경은 그 시대의 빈곤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이야기의 전환점은 제목이기도 한 아코디언이 동이의 손에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낡은 악기 하나는 구걸을 거리 공연으로 바꾸고, 동이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하지만 천명관은 여기서 흔히 기대할 법한 성장 서사나 기적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길바닥의 앵벌이가 하루아침에 미군 클럽의 악사가 된다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 (156)

 

동이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조차 믿지 못한다. 그만큼 밑바닥의 삶은 사람의 가능성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더 인상적인 것은 이후의 장면이다.

 

"다만 아코디언을 치는 게 더 이상 흥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지루하고 고단한 노동일 뿐이었다." (157)


음악은 아이들을 단숨에 구원하는 마법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노동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 냉정한 시선이야말로 이 작품을 더욱 현실적으로 만든다.

 

동이 곁에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맑은 목소리를 가진 연이, 비상한 기억력과 판단력을 지닌 거북이, 능청스러운 미키, 그리고 조직을 탈출해 소매치기가 된 깜상 같은 아이들이 함께한다. 모두 결핍을 안고 살아가지만 누구도 단순한 피해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저마다 살아남기 위한 방식을 찾아가는 존재들이다.

 

특히 깜상을 바라보는 동이의 시선이 오래 남았다.

 

"깜상은 앵벌이 조직을 탈출해 자신의 인생처럼 텅 비어 있던 소매 안에 무언가를 채워 넣었다." (79)

 

비록 고무로 만든 가짜 팔이라도,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다. 이 작품에서 자유란 완전한 해방이 아니라 그런 불완전한 선택조차 가능해지는 순간을 의미하는 듯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장면은 동이가 글을 배우는 과정이다.

 

"동이는 간판을 읽는 것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인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것은 문자의 힘이었다." (80)


폭력과 굶주림 속에서도 세상을 조금씩 읽어내기 시작하는 아이의 모습은 작품 속에서 드물게 만나는 따뜻한 순간이었다.

 

고래에서 보여준 신화적이고 환상적인 서사와 달리 아코디언은 철저히 리얼리즘을 선택한다. 전차가 오가는 거리, 미군 클럽, 상이군인, 실업자가 넘쳐나는 서울의 풍경은 마치 실제 기록을 읽는 듯 생생하다.

 

"젊은 상이군인 한 명이 달리는 전차에 뛰어든 것은 온종일 비가 내리는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55)

 

동이에게 동전을 건네던 상이군인의 마지막은 이 소설 전체가 얼마나 냉혹한 현실을 응시하는지 보여준다. 값싼 위로나 감상은 끝내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코디언이 절망만을 이야기하는 소설은 아니다. 작품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럭키 서울', '목포의 눈물', '베사메 무초' 같은 노래들은 단순한 시대적 장식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붙드는 마지막 온기처럼 느껴졌다.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누구의 동정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삶을 연주하는 사람이 된다.

 

읽는 내내 자연스럽게 올리버 트위스트가 떠올랐다. 착취와 폭력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도 아이들은 서로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 연대가 있었기에 이 긴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갈 수 있었다. 특히 후반부의 문장들은 이 작품이 끝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길 위에서 긴 겨울을 보낸 앵벌이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혹독한 추위도, 아무리 끔찍한 고통도 언젠간 모두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229)

 

하지만 곧이어 새로운 시련이 찾아온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희망을 낙관으로 포장하지 않는 작가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서로에게 말한다.

 

"우리가 언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지 나도 몰라. 하지만 우린 또 살아서 여기를 걸어 나가게 될 거야." (244)

 

결국 아코디언은 절망 속에서도 서로를 살리는 소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현실은 차갑고 세상은 아이들에게 너무 잔인했지만, 그 속에서도 아름다운 화음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동이와 아이들은 끝내 증명해 보인다.

 

읽는 동안 마음이 결코 편한 소설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오래도록 작품 속 아이들의 얼굴과 아코디언 선율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전쟁 이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삶을 이토록 생생하게 복원해낸 소설은 흔치 않다. 그래서 아코디언은 단순한 시대소설을 넘어, 인간이 끝내 포기하지 않는 생의 의지를 들려주는 한 편의 긴 연주처럼 오래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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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묘생
나응식 지음, 애슝 그림 / 김영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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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르다 보면 내용보다 먼저 표지에 시선이 머무는 경우가 있다. 나응식 수의사와 애슝 작가가 함께 만든 오늘 묘생도 그런 책이었다. 상자 속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민 두 마리 고양이의 모습이 묘하게 발길을 붙잡는다. 표지를 벗기면 집사 윤이의 품에 안겨 있는 고양이들이 나타나는데, 그 순간 이 책은 단순히 읽는 책이 아니라 바라보게 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묘생은 보호소 출신 고양이 미미의 시선으로 기록된 일기 형식의 에세이다. 미미는 새로운 가족을 만나고 새로운 집에서 생활하며 하루하루를 기록한다. 얼핏 보면 귀여운 고양이의 성장기처럼 보이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이 작품이 이야기하는 것은 고양이보다도 관계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미는 처음부터 사람을 믿지 않는다. 낯선 공간과 낯선 사람 앞에서 경계하고 망설인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작은 기대도 품고 있다. 보호소를 떠나 새로운 집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설렘은 오히려 인간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때 느끼는 감정과 닮아 있다. 그래서 미미의 이야기는 고양이의 이야기이면서도 우리의 이야기처럼 읽힌다.

 

책이 특히 좋았던 이유는 고양이의 행동을 단순히 귀여운 장면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자 속에 들어가 안정을 찾는 행동, 발톱을 긁으며 영역을 표시하는 습관, 먹이를 숨기려는 본능 같은 것들이 왜 나타나는지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오랫동안 동물을 진료해 온 나응식 수의사의 경험이 글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독자는 고양이를 더 이해하게 되고, 동시에 자신의 본능적인 감정까지 돌아보게 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미미가 안전한 집에 살면서도 여전히 먹이를 숨기고 싶어 하는 본능과 싸우는 장면이었다. 머리로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몸은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비슷하다. 이미 괜찮아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전의 상처 때문에 망설이고 경계할 때가 있다. 미미의 고민은 고양이만의 고민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고민처럼 느껴졌다.

 

윤이와의 관계, 그리고 함께 사는 고양이 치치와의 관계가 조금씩 깊어지는 과정도 무척 따뜻하다. 미미는 단번에 마음을 열지 않는다. 조금 가까워졌다가 다시 거리를 두고, 익숙해질 만하면 다시 경계한다. 그런데 그 모습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늘 직선으로 성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도 하고, 다시 다가가기도 하면서 천천히 쌓여 간다. 오늘 묘생은 그런 관계의 속도를 조급하게 재촉하지 않는다.

 

애슝 작가의 그림 역시 큰 매력이다. 동글동글하고 따뜻한 그림체는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짓게 만든다. 하지만 단순히 귀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글이 설명하지 않는 감정의 결을 그림이 채워주고, 그림 속 정지된 순간에 글이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이 책은 글과 그림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읽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것은 '관계의 속도'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종종 관계가 빠르게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미는 자기만의 속도로 천천히 마음을 연다. 오늘은 오늘만큼, 내일은 내일만큼. 그렇게 조금씩 신뢰를 쌓아 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관계란 어느 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다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100여 년 전, 나쓰메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통해 고양이의 눈으로 인간 사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 오늘 묘생은 또 다른 고양이의 눈으로 관계와 신뢰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고양이의 시선은 여전히 인간을 이해하는 흥미로운 창이 되어 준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물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결국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담담하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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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
아오사키 유고 외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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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라는 제목만으로도 쉽게 지나치기 어려울 것이다. 아오사키 유고, 이치조 미치, 시라이 도모유키 등 현재 일본 미스터리계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헌정하는 단편집을 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대감이 커졌다. 보통 이런 헌정 앤솔러지는 원작에 대한 애정 표현에 머무르거나 팬 서비스 성격이 강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책은 달랐다. 참여 작가들은 단순히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세계관이나 캐릭터를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자의 개성과 장기를 살려 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 자체를 새롭게 변주한다. 그래서 이 작품집은 헌정집인 동시에 독립적인 본격 미스터리 단편집으로서도 충분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즐거웠던 부분은 같은 거장을 향한 헌사임에도 각 작품이 전혀 다른 색깔을 보여준다는 점이었다. 어떤 작품은 정교한 논리와 트릭으로 승부하고, 어떤 작품은 인간관계의 미묘한 균열을 추리의 핵심으로 삼으며, 또 어떤 작품은 장르 자체를 비트는 메타적 시도를 보여준다. 일곱 편을 읽고 나면 마치 서로 다른 장인이 만든 퍼즐 상자 일곱 개를 차례로 열어본 듯한 만족감이 남는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작품은 아오사키 유고의 , 밧줄, 로프였다. 체육관의 살인에서 보여주었던 논리적 추론의 매력이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사건은 강도 살인과 시체 유기 사건으로 시작되지만, 작가는 사소해 보이는 단서들을 치밀하게 연결하며 진실에 접근한다.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당황한 범인이 새시를 통해 시체를 밖으로 운반한 것 같습니다. 야스미 씨 후두부에 묻어있던 흙과 아파트 정원의 흙이 일치했습니다.” (17)


흙 한 줌, 작은 흔적 하나까지 논리의 고리로 연결하는 과정은 본격 미스터리 특유의 쾌감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제목이 결말에 이르러 하나의 단어로 회수되는 순간은 감탄을 자아낸다.


동아줄” (63)


짧은 단어 하나에 트릭과 제목, 그리고 작품의 의미가 모두 응축되는 솜씨가 인상적이었다.


이치조 미치의 클로즈드 클로즈는 학원물을 무대로 한 정교한 알리바이 미스터리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사건 설명이 사실은 치밀하게 설계된 단서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만드는 구성이 돋보인다.


사건 발생은 지지난주 금요일, 비 오는 날이었어. () 부원은 35, 결석은 감기로 못 나온 2학년 한 명뿐.” (78)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들이 결말에 이르러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경험은 본격 미스터리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다. 동시에 이 작품은 단순한 퍼즐 풀이에 머물지 않고 청소년기의 우정과 관계 변화라는 정서적 측면도 놓치지 않는다.


인생에는 여러 단계가 있고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인간관계도 변화해요.” (156)


논리적 추론의 차가움 속에서도 따뜻한 여운이 남는 이유다.


가장 독창적인 작품으로는 시라이 도모유키의 블랙 미러를 꼽고 싶다. 이 작품은 알리바이라는 미스터리의 고전적 장치를 정면으로 뒤집는다.


에이지는 연기를 했다. 커피가 뜨거워서 그런 척하며 일부러 컵을 떨어뜨린 것이다.” (214)


이 짧은 문장만으로도 독자는 등장인물의 모든 행동을 다시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작품의 핵심은 다음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다.


알리바이를 깨려면 먼저 알리바이가 있어야 한다.” (229)


알리바이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알리바이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발상이 무척 신선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반가웠던 것은 본격 미스터리가 여전히 건강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최근 미스터리 장르가 스릴러나 심리극 중심으로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도 이 작품집은 오직 논리와 추리, 그리고 독자와의 정정당당한 두뇌 싸움에 집중한다. 무엇보다 원작자를 향한 후배 작가들의 존경과 애정이 작품 곳곳에 배어 있어 장르 팬으로서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작품에 등장하는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모처럼 생각해 낸 설정이니 서둘러서 소비하지 않고 소중하게 써 나가고 싶어.” (405)


이 문장은 단순히 한 작가 지망생의 다짐이 아니라, 아리스가와 아리스라는 거장의 유산을 성급하게 소비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어가려는 후배 작가들의 태도처럼 느껴졌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는 거장을 향한 헌사이자 현재 일본 본격 미스터리의 수준을 보여주는 쇼케이스 같은 작품집이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팬이라면 물론이고, 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도 좋은 입문서가 되어줄 수 있다. 책장을 덮고 나니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본격 미스터리는 여전히 살아 있고, 앞으로도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에 의해 계속 진화해 나갈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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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6 소설 보다
김채원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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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의 소설보다시리즈는 계절마다 동시대 작가들의 단편을 소개하며 지금 한국문학의 흐름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기획이다. 소설보다: 2026에는 김채원의 별 세 개가 떨어지다, 위수정의 귀신이 없는 집, 최예솔의 서해에서가 수록되어 있다. 제목에 담긴 ''이라는 계절은 흔히 시작과 희망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 책 속의 봄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겨울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자리,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관계 사이에서 인물들은 조심스럽게 다음 계절을 향해 걸어간다.

 

세 작품은 소재와 분위기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흔들리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결로 묶인다. 이들의 삶에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 관계 속의 미묘한 거리감, 자신조차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서서히 스며든다. 그래서 이 작품들을 읽는 경험은 사건을 따라가는 독서라기보다 인물의 마음속에 머무는 독서에 가깝다. 무엇이 일어났는가보다 지금 어떤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바라보게 만든다.


별 세 개가 떨어지다에서 김채원은 상실과 삶의 지속성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별이 떨어진다는 이미지는 어떤 끝이나 단절을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그 별들이 지나간 뒤에도 하늘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소설은 아픔을 과장하지 않고, 삶을 낙관적으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상실 이후에도 사람은 살아가고, 웃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조용히 응시한다. 그 절제된 시선이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반면 귀신이 없는 집은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미묘한 긴장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제목부터 역설적이다. 귀신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 오히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의식하게 된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다가가면서도 완전히 가까워지지 못하고, 편안함을 말하면서도 불안을 감추지 못한다. 위수정은 말과 감정 사이의 틈, 관계의 표면 아래 숨겨진 흔들림을 세밀하게 그려내며 현대인의 불안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최예솔의 서해에서는 세 작품 가운데 가장 밝은 온도를 품고 있다. 하지만 그 밝음은 가벼운 낙관이 아니라 스스로의 부족함까지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나온다. "망하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135) 는 작품 속 문장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오래 마음에 남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때로는 어딘가 어설퍼도 괜찮다는 긍정이 작품 전체를 감싼다. 흐릿하고 경계가 모호한 서해의 풍경 역시 그런 정서와 잘 어울린다.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다정한 쉼표를 건넨다.

 

소설보다시리즈의 또 다른 매력은 작품 뒤에 실린 작가 인터뷰다.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과 의문들이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기도 하고,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넓어지기도 한다. 창작 과정에서의 고민과 작가의 생각을 함께 읽다 보면 단편 한 편이 주는 밀도가 더욱 깊어진다.

 

세 편의 소설을 모두 읽고 나면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완전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도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고, 누구도 모든 답을 알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관계를 이어가고, 마음 둘 곳을 찾고,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소설보다: 2026은 그런 과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독자에게 조용한 공감과 위로를 건넨다. 화려한 사건보다 마음의 결을 따라가는 소설을 좋아한다면, 그리고 지나가는 봄의 풍경과 감정을 조금 더 오래 붙잡아 두고 싶다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작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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