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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 - 한국과학문학상 대표작가 앤솔러지
김초엽 외 지음 / 허블 / 2025년 6월
평점 :
SF 전문 출판사 허블이 한국과학문학상 10주년을 기념해 펴낸 앤솔러지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는, 지금 한국 SF 문학의 가장 앞줄에 서 있는 다섯 명의 작가가 한데 모여 만든 작품집이다. 허블 편집부는 이들에게 “지금 가장 쓰고 싶은 이야기”, “솔직하게 마음이 가는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했고, 다섯 작가는 모두 “죽음 너머의 세계”, “그곳에 남은 사랑”이라는 비슷한 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이 책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단절 위에서 다시 피어나는 사랑, 존재, 기억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다섯 편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김초엽 〈비구름을 따라서〉 — “그녀는 어쩌면 다른 세계로 건너갔을지도 몰라”
<비구름을 따라서〉는 죽은 룸메이트 이연의 이름으로 도착한 한 통의 추도식 초대장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보민은 처음엔 장난으로 여겼지만, 초대장이 집 안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고 날짜가 바뀌는 순간 이상함을 감지한다.
이야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두 사람이 ‘노바 파우치’라는 보드게임을 통해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며 친밀해졌던 시절로 이어진다. 이연의 추도장에 모인 보민과 이연의 지인들의 대화 속에서, 이연이 죽은 것이 아니라 ‘반투막 너머의 세계’로 건너간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시된다. 이는 결국 죽음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비구름과 햇볕이 공존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지막 장면은, 죽음조차 끝이 아닌 세계로 이어지는 따뜻한 여운을 남긴다.
천선란 〈우리를 아십니까〉 — 좀비가 된 이후에도 남아 있는 사랑
〈우리를 아십니까〉는 좀비가 지배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존엄사를 준비하던 한 여성이 간호사에게 물려 감염되고, 혼수 끝에 깨어나 스스로 좀비가 된 자신을 인식한다. 기억의 파편 속에서 그녀는 아내가 남긴 녹음기를 통해, 자신을 지키며 살아남으려 했던 사랑의 기록을 듣는다. 이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단순한 호러나 생존담이 아니라 사랑의 지속 가능성을 그리기 때문이다. 이미 인간성을 잃은 몸에서도, 아내를 그리워하고 장풍이라는 거북이와 교감하며 바다로 향하는 화자의 모습은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언어임을 말해준다. 작가가 직접 밝힌 것처럼 ‘좀비에게 느껴지는 고독’ 속에서 느껴지는 세상이 끝난 뒤에도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려는 마음이 소설이 던지는 가장 인간적인 메시지로 다가온다.
김혜윤 〈오름의 말들〉 — 언어의 벽을 넘어서
〈오름의 말들〉은 외계 생명체 ‘오름’과의 언어적 교류를 시도하는 언어학자 정희정과 암호학자 이류의 이야기다. 오름은 달팽이처럼 생긴 전기 생명체로, 인간의 언어 대신 전기적 신호로 의사를 전달한다. 희정은 오름과의 소통을 위해 수학, 이진법, 심지어 스포츠 클라이밍까지 동원한다. 그는 이 외계생명체에게 산을 뜻하는 제주 방언 ‘오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언어가 단순한 신호를 넘어 감정의 형태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정부의 개입과 상업화 시도로 오름이 상품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자, 희정은 인간이 진짜로 ‘소통’을 원한 적이 있었는가 묻는다. 김혜윤 작가는 작가 노트에서 지기만 하는 싸움이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싸움을 언급한다. 희정과 류의 싸움이 그렇게 보였다.
청예 〈Amo Ergo Sum〉 —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문장을 변주한 제목이 인상적이다. 〈Amo Ergo Sum〉은 철학적이고 실험적인 SF다. 주인공 오필리아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복제 기술을 이용해 자신들의 복제체를 창조하는 실험을 시작한다. 이 실험은 “사랑이 존재의 증명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복제체가 깨어나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복제된 인간이 원본과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그 감정이 진짜 사랑일 수 있을까란 질문이 계속 따라다닌다. 이 철학적 질문을 따라가며, 결국 사랑의 불완전함 속에 존재의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난해하지만, 사유의 깊이와 감정의 밀도가 공존하는 작품이다. 읽고 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해진다.
조서월 〈I’m Not a Robot〉 — “나는 로봇이 아닙니다”라는 슬픈 선언
〈I’m Not a Robot〉 인간성과 기계성의 경계에 선 철학적 이야기다. 폐허가 된 미래의 사막 외곽, 노인 프랭크와 고장난 로봇 랜슬롯이 함께 살아간다. 프랭크는 로봇 수리공이자 웹에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글을 올리기 위해 매번 CAPTCHA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즉, 자신이 로봇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인간의 존재가 점점 기계화되는 현대 사회의 모습으로 읽힌다. 죽음을 앞둔 인간과 감정을 배우려는 로봇의 관계는, 서로의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프랭크가 “그대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 말할 때, 그 문장은 인간과 로봇, 사랑과 의무의 경계를 동시에 녹여낸다. 프랭크가 세상을 떠나고도 랜슬롯이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는 결말은 사랑조차 프로그래밍될 수 있을까라는 냉정한 질문을 남긴다.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는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모여 이루는 감정의 성좌 같다. 각기 다른 작가의 언어와 세계관이지만,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죽음 이후에도 꺼지지 않는 사랑이 자리한다. 김초엽이 말하는 따뜻한 상상, 천선란의 고독한 연민, 김혜윤의 윤리적 사유, 청예의 철학적 탐구, 조서월의 인간성 탐색이 모두 “사랑이 인간을 완성시킨다”는 하나의 문장으로 모인다. 이 책은 단순히 SF 장르의 재미를 넘어 “우리는 왜 여전히 사랑하고, 왜 그리워하며, 왜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