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궁금할 땐 뇌과학 -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뇌에 관한 11가지 흥미로운 질문
호르헤 챔.드웨인 고드윈 지음, 이영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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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같은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믿지만, 사실 우리 몸은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피부세포는 한 달마다, 장의 세포는 며칠마다 새로 태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나는 나라고 말한다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왜 지금의 나로 존재하는가라는 오래된 철학의 질문에 뇌과학이라는 언어로 답하려는 시도가 내가 궁금할 땐 뇌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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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저자 호르헤 챔은 과학과 만화를 연결하는 다리 같은 사람이다. 그가 그려 넣은 짧은 만화와 삽화들은 복잡한 개념들을 단숨에 친숙하게 만든다. 덕분에 브로카 영역’, ‘편도체같은 낯선 단어들도 어느새 마음속에 자리를 잡는다. 과학책이라기보다 한 편의 흥미로운 이야기책처럼 읽힌다.


책은 언어, 감정, 중독, 인공지능, 죽음까지 인간의 여러 얼굴을 뇌의 시선으로 탐색한다특히 사랑과 혐오의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사랑을 느끼고 혐오를 느끼는 이유가 단순히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뇌의 구조와 작동 방식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도 신선했다감정이 생존을 위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설명은, 우리가 느끼는 미묘한 감정들조차 자연이 설계한 복잡한 기계장치의 일부임을 일깨운다.


읽는 동안 손원평의 소설 아몬드가 떠올랐다. 그 책 속에서도 편도체의 결함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이 등장했다. 내가 궁금할 땐 뇌과학은 그 편도체가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 왜 어떤 감정이 생존과 연결되는지를 이해하게 만들어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단연 중독을 다룬 여섯 번째 장이다.


책을 읽다 보면 중독이 단지 의지의 약함이 아니라, 뇌의 보상 시스템이 교란된 상태라는 사실이 명확히 보인다.


저자들은 말한다.


중독은 시냅스의 구조와 기능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뇌의 나머지 부분에 파급 효과를 일으킨다. 심지어 당신의 성격이나 정체성까지 바꿀 수 있다.”


스마트폰 화면을 습관적으로 넘기고, 자극적인 영상을 반복해서 보는 나의 모습이 곧 뇌의 반응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의식하지 못한 채 쾌락과 불안의 경계를 오가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미 가벼운 중독의 세계 속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궁금할 땐 뇌과학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뇌가 얼마나 넓고 복잡한 미지의 영역인지를 보여준다.


체중의 2%밖에 안 되는 뇌가, 하루 에너지의 20%를 소모한다는 사실은 참 묘하다그 작고 복잡한 기관 안에 우리가 라고 부르는 정체성과 기억, 감정과 생각이 모두 담겨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책의 시작과 끝에 반복되는 칼 세이건의 문장이 있다.


우주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의 것이다.”


이 말에서 우주로 바꿔 생각해 보아도 무방해 보였다.

뇌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의 것이다.”

결국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자기 안의 우주인 를 이해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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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키메라의 땅 1~2 세트 - 전2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김희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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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더 이상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우리는 자연을 설계하려 든다.” 이 한 문장이 이 소설을 가장 잘 요약해주는 문장이라 느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키메라의 땅은 인간이 만든 신의 실험실, 혹은 진화의 또 다른 분기를 그려낸 장대한 서사다. 파리 자연사 박물관의 지하에서 시작된 한 과학자의 실험은 결국 인류의 종말과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씨앗뿌리줄기가지열매로 구성된 여섯 개의 장은 마치 한 생명의 성장과 순환을 닮았다.


주인공 알리스 카메러는 변신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과학자다.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고 다른 종을 지배한다고 믿는 인류의 오만에 회의하며, 그녀는 인간과 동물의 DNA를 결합한 새로운 존재를 만든다.


하늘을 나는 인간 에어리얼’, ‘땅을 파는 디거’, ‘바다를 헤엄치는 노틱이 세 혼종은 인류 이후의 새로운 가능성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창조의 금단선을 넘어선 실험이기도 하다.


알리스가 이 실험을 통해 묻는 질문은 단순하다.

진화는 자연이 하는가,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과학이 신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윤리적 물음을 다시 꺼내놓는다.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에서 알리스와 그녀의 동료 시몽은 지하 생존자 공동체 뉴 이비사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세 혼종과 그녀의 딸 오펠리가 태어나고, 인간과 혼종이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생존의 본능과 종족 간의 차이는 다시 갈등을 낳는다. 어른들이 만들어온 종교적 대립과 폭력은 다시 아이들에게 되풀이된다. 결국 혼종들 사이에도 균열이 생긴다.

소설의 중반부는 디스토피아적인 묘사 속에서도 인간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과학으로 설계된 세계조차 결국 다름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성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베르베르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를 드러낸다.


시간이 흐르고, 세 종족은 각자의 문화를 형성한다. 알리스는 그들을 관찰하며 스스로를 창조자로 자처하지만, 세 종족의 분열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전쟁이 일어나고, 알리스는 자신이 만든 세계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불의 원소샐러맨더 혼종 악셀은 새로운 희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또 다른 변이의 시작일 뿐이다.


불꽃을 품은 작은 불빛이.”


그녀가 악셀을 창조하면서 그렇게 말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진화의 희망이 아니라 자연을 거스른 인간의 집착처럼 들린다.


마지막 장 열매에서 알리스는 80세의 노인이 된다. 그녀가 만든 세상은 여전히 갈등 속에 있고, 혼종들은 인간을 가두며 자신들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한다. 키메라의 땅은 단순히 SF적 상상력을 넘어, “진화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다윈의 자연선택설과 라마르크의 변이론이 교차하며, 인간이 창조된 존재에서 창조하는 존재로 넘어갈 때 생기는 윤리적 혼란을 보여준다. 솔직히 말하면 읽는 내내 불편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야말로 이 작품의 진짜 의도일 것이다. 인류의 오만, 과학의 윤리, 생명의 순환이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생명의 사슬 속에서, 인간은 여전히 자신이 정점에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키메라의 땅은 그 믿음이 얼마나 위태로운 착각인지 천천히 증명해간다.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이 혼종들을 창조한 건 잘한 일이야.”


알리스의 마지막 독백은 과학자의 확신이라기보다, 인간의 자기합리화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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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 - 한국과학문학상 대표작가 앤솔러지
김초엽 외 지음 / 허블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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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전문 출판사 허블이 한국과학문학상 10주년을 기념해 펴낸 앤솔러지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 지금 한국 SF 문학의 가장 앞줄에 서 있는 다섯 명의 작가가 한데 모여 만든 작품집이다. 허블 편집부는 이들에게 지금 가장 쓰고 싶은 이야기”, “솔직하게 마음이 가는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했고, 다섯 작가는 모두 죽음 너머의 세계”, “그곳에 남은 사랑이라는 비슷한 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이 책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단절 위에서 다시 피어나는 사랑, 존재, 기억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다섯 편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김초엽 비구름을 따라서〉 — 그녀는 어쩌면 다른 세계로 건너갔을지도 몰라

<비구름을 따라서〉는 죽은 룸메이트 이연의 이름으로 도착한 한 통의 추도식 초대장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보민은 처음엔 장난으로 여겼지만, 초대장이 집 안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고 날짜가 바뀌는 순간 이상함을 감지한다.


이야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두 사람이 노바 파우치라는 보드게임을 통해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며 친밀해졌던 시절로 이어진다. 이연의 추도장에 모인 보민과 이연의 지인들의 대화 속에서, 이연이 죽은 것이 아니라 반투막 너머의 세계로 건너간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시된다. 이는 결국 죽음 이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비구름과 햇볕이 공존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지막 장면은, 죽음조차 끝이 아닌 세계로 이어지는 따뜻한 여운을 남긴다.

 

천선란 우리를 아십니까〉 — 좀비가 된 이후에도 남아 있는 사랑

우리를 아십니까는 좀비가 지배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존엄사를 준비하던 한 여성이 간호사에게 물려 감염되고, 혼수 끝에 깨어나 스스로 좀비가 된 자신을 인식한다. 기억의 파편 속에서 그녀는 아내가 남긴 녹음기를 통해, 자신을 지키며 살아남으려 했던 사랑의 기록을 듣는다. 이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단순한 호러나 생존담이 아니라 사랑의 지속 가능성을 그리기 때문이다. 이미 인간성을 잃은 몸에서도, 아내를 그리워하고 장풍이라는 거북이와 교감하며 바다로 향하는 화자의 모습은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언어임을 말해준다. 작가가 직접 밝힌 것처럼 좀비에게 느껴지는 고독속에서 느껴지는 세상이 끝난 뒤에도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려는 마음이 소설이 던지는 가장 인간적인 메시지로 다가온다.

 

김혜윤 오름의 말들〉 — 언어의 벽을 넘어서

오름의 말들은 외계 생명체 오름과의 언어적 교류를 시도하는 언어학자 정희정과 암호학자 이류의 이야기다. 오름은 달팽이처럼 생긴 전기 생명체로, 인간의 언어 대신 전기적 신호로 의사를 전달한다. 희정은 오름과의 소통을 위해 수학, 이진법, 심지어 스포츠 클라이밍까지 동원한다. 그는 이 외계생명체에게 산을 뜻하는 제주 방언 오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언어가 단순한 신호를 넘어 감정의 형태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정부의 개입과 상업화 시도로 오름이 상품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자, 희정은 인간이 진짜로 소통을 원한 적이 있었는가 묻는다. 김혜윤 작가는 작가 노트에서 지기만 하는 싸움이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싸움을 언급한다. 희정과 류의 싸움이 그렇게 보였다.

 

청예 Amo Ergo Sum〉 — 사랑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문장을 변주한 제목이 인상적이다. Amo Ergo Sum은 철학적이고 실험적인 SF. 주인공 오필리아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복제 기술을 이용해 자신들의 복제체를 창조하는 실험을 시작한다. 이 실험은 사랑이 존재의 증명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복제체가 깨어나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복제된 인간이 원본과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그 감정이 진짜 사랑일 수 있을까란 질문이 계속 따라다닌다. 이 철학적 질문을 따라가며, 결국 사랑의 불완전함 속에 존재의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난해하지만, 사유의 깊이와 감정의 밀도가 공존하는 작품이다. 읽고 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해진다.

 

조서월 I’m Not a Robot〉 — 나는 로봇이 아닙니다라는 슬픈 선언

I’m Not a Robot인간성과 기계성의 경계에 선 철학적 이야기다. 폐허가 된 미래의 사막 외곽, 노인 프랭크와 고장난 로봇 랜슬롯이 함께 살아간다. 프랭크는 로봇 수리공이자 웹에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글을 올리기 위해 매번 CAPTCHA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즉, 자신이 로봇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인간의 존재가 점점 기계화되는 현대 사회의 모습으로 읽힌다. 죽음을 앞둔 인간과 감정을 배우려는 로봇의 관계는, 서로의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프랭크가 그대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 말할 때, 그 문장은 인간과 로봇, 사랑과 의무의 경계를 동시에 녹여낸다. 프랭크가 세상을 떠나고도 랜슬롯이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는 결말은 사랑조차 프로그래밍될 수 있을까라는 냉정한 질문을 남긴다.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는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모여 이루는 감정의 성좌 같다. 각기 다른 작가의 언어와 세계관이지만,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죽음 이후에도 꺼지지 않는 사랑이 자리한다. 김초엽이 말하는 따뜻한 상상, 천선란의 고독한 연민, 김혜윤의 윤리적 사유, 청예의 철학적 탐구, 조서월의 인간성 탐색이 모두 사랑이 인간을 완성시킨다는 하나의 문장으로 모인다. 이 책은 단순히 SF 장르의 재미를 넘어 우리는 왜 여전히 사랑하고, 왜 그리워하며, 왜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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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
백영옥 지음 / 김영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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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책 제목만 보아도 묘한 이질감이 먼저 다가온다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연을 경험했을 때 이불 속에서 한없이 웅크리고 눈물을 삼키는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들고, 아침이 오면 또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무거운 마음에 눌려 일어나기도 힘든 게 보통이다. 그런데 백영옥 작가는 그 고통스러운 실연의 시간을 아침 일곱 시 조찬 모임이라는 낯선 풍경 속에 담아냈다.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 실연과 조찬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이 모임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각자의 상처를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작은 의식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소설 속 배경은 SNS를 통해 알려진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이다. 모임은 단순한 아침 식사 자리가 아니다. 함께하는 조찬, 영화 상영, 실연의 기념품 교환 이렇게 세 가지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다.


이 중 가장 상징적이고 독특한 것은 실연의 기념품 교환이다. 실연의 흔적은 늘 애매한 위치에 놓인다. 버리기에는 추억이 너무 선명하고, 간직하기에는 상처가 여전히 아프다. 그래서인지 기념품을 가지고 오는 순간, 그것은 곧 각자의 고통을 정리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소설의 주인공인 항공사 승무원 윤사강과 컨설팅 회사 직원 이지훈은 이 모임에서 처음 만난다. 우연히 서로의 기념품인 로모카메라와 책을 집어 들게 되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작은 우연은 단순한 교환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에 닿는 첫 순간이었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는 실연이라는 공통의 경험을 두고도 인물들이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가 극명히 다르다는 점이다.


윤사강은 실연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몫으로 여긴다. “치유도, 용서도 결국 자기 몫이라는 태도 속에는 체념과 동시에 단단한 자립심이 엿보인다. 그는 타인의 위로에 쉽게 기대지 않으려 한다.


반면 이지훈은 연애를 죽도록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라 정의한다. 사랑은 우연히 찾아오는 환상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치열한 노동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의 태도는 냉철하지만 동시에 진지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가 안고 있던 실연의 무게를 조금씩 내려놓는다. 상처를 드러내고 들어주는 과정에서,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


이야기 중반부에 등장하는 또 한 명의 인물 정미도는 조찬 모임의 분위기를 뒤흔든다그녀는 남의 슬픔을 보며 위로받는다는 인간 본성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누군가의 아픔은 때로 타인의 위로가 되지만, 동시에 그 속엔 어쩔 수 없는 자기중심적 욕망이 숨어 있음을 보여준다. 정미도의 존재는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단순히 함께 울고, 함께 치유되는 따뜻한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인간 관계의 이중성과 솔직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에서 인상적으로 다가온 문장들이다.


인간은 슬픈 쪽으로만 평등하다. 어쩌면 행복한 쪽으로는 늘 불평등했다.” 


이 문장은 실연의 본질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행복은 늘 예기치 않게 찾아오고, 그 크기와 모양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불행과 상실은 이상하리만치 닮아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또 잔인하게 찾아오는 것이 바로 실연이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구절은 미도의 대사다.


사람은 태어나서 수도 없이 많은 오답을 써. 실연은 살면서 쓰게 되는 대표적인 오답인 거야. 오답이 대수야? 오답은 그냥 고치면 되는 거야!” 


실연은 잘못된 선택이자 아픈 기억일 수 있지만, 결국 그것은 고칠 수 있는 오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독자에게 강한 위로를 건넨다.


소설은 실연을 둘러싼 인간의 다양한 태도와 본성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누군가는 아픔을 회피하고, 누군가는 집요하게 파헤치며, 또 누군가는 타인의 불행을 위안 삼는다. 그 모습들은 때로 불편하지만, 우리 자신의 그림자 같아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실연을 경험했기에 다음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진부할 수 있지만, 작가는 이를 날카롭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새롭게 풀어낸다. 실연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삶 속에서 수없이 쓰게 되는 오답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은 많은 위로가 된다.


실연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 속 문장들이 가슴을 아프게 찌르면서도 동시에 위로를 줄 것이고, 아직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사랑과 관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사랑은 질문이고, 실연은 그 질문에 대한 오답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오답을 고쳐가며 결국 자신만의 정답에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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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
온다 리쿠 지음, 이지수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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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소설 스프링은 천재 무용수이자 안무가 요로즈 하루의 삶과 성장을 그린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 하루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세 명의 서로 다른 인물들이 차례로 화자가 되어 그를 바라본다는 점이다. 독자는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하루를 다각도로 관찰하며, 마지막에 가서야 하루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마치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점점 좁혀져 결국 중심 인물에게 모이는 것 같은 구조다.


1뛰어오르다

발레 학교 워크숍에서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준의 눈에 비친 하루는 단순한 발레 소년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무언가를 몸으로 구현하는 존재다. 하루는 즉흥 안무로 동료들을 매료시키며, 친구이자 동료인 준과 함께 작품 <야누스>를 완성한다. 발레라는 낯선 세계와 용어들이 등장하지만, 작가는 이를 어렵지 않게 풀어내어 독자도 무대 위 장면을 보는 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2싹트다

삼촌 미노루의 시선에서 하루의 어린 시절이 드러난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관찰한 세상을 곧바로 춤으로 표현해낸다. 체조를 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운동과 동작에 익숙했고, 발레 교사의 눈에 띄어 정식으로 훈련을 받게 된다. 그는 가족의 품에서 자라면서도 이미 한 명의 예술가였다. 15세 무렵, 하루는 과감히 해외 유학을 결심하며 더 넓은 무대를 향해 나아간다. 이 부분은 한 소년이 천재 무용수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이자, 동시에 가족의 사랑과 이해가 그에게 어떤 토양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3솟아나다

이번 화자는 작곡가 다키자와 나나세다. 그녀는 발레니나였던 언니와 달리 음악의 길을 택했고, 하루와 협력하며 무대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예술 창작의 본질이 드러난다. 하루는 작품마다 끊임없이 고뇌하며, 창작의 고통과 집념 속에서 =이라는 철학을 굳힌다. 나나세와의 협업은 때로 긴장과 갈등을 낳지만, 그 긴장감이 오히려 작품 <어새슨>의 완성도를 높인다.

여기서 특히 하루의 음악을 작곡을 하는 나나세의 말이 인상 깊었다. 

오리지널리티를 계속 유지하려면 진화해야 하고, 심화해야 한다. 변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


4봄이 되다

마지막으로 하루 자신이 무대 위에 선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가진 뜻, ‘텐 사우전드 스프링스(만개의 봄)’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피어나는 존재임을 고백한다. 앞선 화자들의 시선을 모두 거친 후, 하루는 고국으로 돌아와 <봄의 제전>이라는 독무를 추며 이야기를 끝맺는다. 독자는 이 순간, 하루가 단순한 무용수가 아닌 예술 그 자체임을 실감한다.


스프링은 발레라는 특정한 장르를 다루지만, 사실상 예술 창작의 본질을 탐구하는 소설이다. 무용을 모르는 독자도 어렵지 않게 몰입할 수 있을 만큼 장면 묘사가 생생하다. 하루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우리가 일상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거나 자기 길을 개척할 때 겪는 두려움과 닮아 있다.


다만 주인공 하루가 너무도 비범한 인물이다 보니, 때로는 현실성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그리고자 한 것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예술을 의인화한 존재로서의 하루다. 그를 통해 우리는 평범한 삶 속에서는 쉽게 체험하기 힘든 집념과 창조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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