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의 시간으로 더 깊어지는 법에 관하여
레누카 가브라니 지음, 최유경 옮김 / 퍼스트펭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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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과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공허할 때가 있다메신저는 늘 울리고, SNS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흘러가는데도 정작 내 안은 조용히 비어 있는 느낌. 혼자의 시간으로 더 깊어지는 법에 관하여는 바로 그 공허함의 정체를 차분하게 짚어주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마음에 남은 것은 외로움 고독은 다르다는 저자의 구분이었다. 우리는 흔히 혼자 있는 상태를 외롭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외로움을 내 안에 나를 찾을 수 없을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혼자 있는 시간이 왜 때로는 불편하고 두려웠는지 선명하게 이해되었다. 혼자가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정작 자기 자신과 충분히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세상이 붙여준 수많은 꼬리표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였다직업, 관계, 성취, 성격 같은 라벨들 속에서 우리는 쉽게 자신을 설명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이름표들의 합이 진짜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혼자의 시간 속에서만 비로소 나는 어떤 사람인가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묻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 지점이 참 좋았다. 단순한 위로를 넘어, 스스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질문을 건네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실천해보고 싶은 조언은 매일 5, 방해 없이 자신에게 몰입하는 시간이었다. 거창한 명상이나 루틴이 아니라 단 5분이라니 부담이 없다.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왜 그런지 적어보라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찾는 일보다 싫어하는 것을 분명히 아는 일이 오히려 자기 이해에 더 빠른 길일 수 있다는 점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또 하나 좋았던 점은 이 책이 고독을 관계의 반대편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자의 시간은 관계를 피하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 더 건강한 관계를 위한 준비 과정에 가깝다. 자신과의 관계가 단단해야 타인과의 관계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조용하지만 힘 있게 전해진다. 혼자 있는 시간을 잘 견디는 사람이 결국 사람 사이에서도 더 편안해질 수 있다는 역설이 오래 남았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측면,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가 자아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조금 더 깊게 다뤄졌다면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완벽한 이론보다 지금 당장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사유의 방향을 준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읽고 나면 단순히 좋은 말이 많다로 끝나지 않고, 오늘 하루 내 시간을 어떻게 써볼지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혼자 있는 시간이 자꾸 불안한 사람, 관계 속에서 오히려 자신을 잃어가는 기분이 드는 사람, 바쁜 일상 속에서 내 목소리가 희미해졌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혼자의 시간은 외로운 방랑이 아니라나라는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조용하고도 용기 있는 입구라는 사실을 다시 알려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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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김요한 지음 / RISE(떠오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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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를 읽을 때 은연중에 기대하는 것이 있다.


지친 마음을 다독여주거나, 다시 시작할 용기를 북돋아주는 따뜻한 문장들이다. 그런데 김요한의 각성은 그런 기대를 단호하게 비껴간다. 이 책은 독자를 위로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태도와 습관을 정면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읽는 동안 편안함보다 긴장감이 더 크게 느껴졌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처음 책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구조의 단단함이었다. 서문도 추천사도 길게 독자를 이끌어주는 장치도 없다. 100개의 짧은 글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다. 각 글은 길지 않지만 압축된 밀도가 높다. 짧은 문장 하나가 긴 설명보다 오래 남는다.


특히 초반의 이 문장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깨달음은 크지 않았다. 사람을 줄이고, 말을 줄이고, 핑계를 줄였다. 줄이는 

건 버리는 게 아니었다. 밀도를 높이는 거였다.” (9)


이 문장을 읽으며 각성이 말하는 변화는 더하는 일이 아니라 덜어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은 관계, 더 많은 계획, 더 많은 다짐이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필요한 것들을 줄여 본질의 밀도를 높이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책은 반복해서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세상은 말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사람이 바뀌는 건, 단 하나, 움직일 때다.” (62)


이 문장은 익숙한 자기계발 문장처럼 보이지만, 책의 전체 맥락 안에서는 훨씬 더 날카롭게 다가온다. 우리는 늘 계획과 다짐의 언어 속에 머무르기 쉽다. 시작을 미루는 이유를 준비라는 말로 포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자기합리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삶을 바꾸는 것은 생각의 양이 아니라 행동의 방향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남은 부분은 기준에 대한 이야기였다.


말과 관계는 지나가고, 다짐은 흐려지고, 감정은 식는다. 결국 남는 건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 하나의 기준이다.” (221)


각성이라는 제목이 왜 붙었는지 이 문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이해되었다.

각성이란 거창한 깨달음의 순간이라기보다, 결국 흔들리지 않는 자기 기준을 발견하는 일에 가깝다. 외부의 위로나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혼자 남았을 때도 유지되는 태도의 중심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가장 크게 남은 변화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말수가 줄고, 설명하려는 습관이 줄었다. 내가 반복하던 변명, 미루던 행동, 불필요하게 붙잡고 있던 관계들을 조용히 돌아보게 되었다. 위로받은 느낌은 아니지만, 오히려 머릿속이 정리되는 감각은 분명했다.


따뜻한 공감이나 다독임을 기대한다면 다소 차갑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삶이 흐트러졌다고 느끼는 시점, 혹은 스스로를 다시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라면 이 책은 꽤 강한 자극이 된다. 편안하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덮고 난 뒤에는 이상하리만큼 생각이 또렷해진다.


어떤 책은 마음을 달래주고, 어떤 책은 방향을 보여준다각성은 분명 후자에 속한다. 위로 대신 기준을 남기는 책이다. 그래서 필요할 때 다시 펼치게 되는 문장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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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인류 - 인류학의 퓰리처상 ‘마거릿 미드상’ 수상작
마이클 크롤리 지음, 정아영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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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인류』는 달리기를 잘하는 법에 관한 책이 아니다. 달리기를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 관한 책이다.


새벽 440, 알람 소리가 울린다. 해발 2500미터의 아디스아바바,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각. 책은 이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단순한 달리기 책의 도입부치고는 낯선 풍경이다. 그러나 이 한 줄이 책 전체의 분위기를 압축하고 있다.


저자 마이클 크롤리는 인류학자이자 마라토너다. 에티오피아 육상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현지에서 15개월을 선수들과 함께 뛰고, 먹고, 생활했다. 외부 관찰자로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새벽 훈련에 참여하고 한솥밥을 먹으며 그 리듬에 몸을 맡겼다.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원제 'Out of the Thin Air'는 고산 지대의 지리적 환경을 가리키는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와 정신의 영역을 탐구하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인류학자의 눈과 달리기 선수의 다리로 쓰인 이 책에는, 어떤 스포츠 과학 논문도 담아내지 못한 것들이 있다.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 것들 즉, 믿음, 공동체, 고통에 대한 태도, 그리고 삶을 대하는 방식 등이 그것이다. 


에티오피아 선수들의 강점으로 흔히 고산 지대 환경을 꼽는다. 해발 25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단련된 심폐 기능이 세계 최강의 마라토너들을 만든다는 논리다. 저자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훈련 장소의 고도를 물었을 때 선수가 답한 수치는 실제와 달랐다. 저자는 곧 깨닫는다. 정확한 고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환경에 대한 '믿음'이다. 선수들은 자신이 극한의 환경에서 훈련하고 있다는 확신 자체를 동력으로 삼는다. 과학적 수치보다 정신적 확신이 먼저인 것이다.


에티오피아에 머무는 내내 누구도 타고난 재능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훈련을 부르는 말 '레메메드'는 본래 '적응'을 뜻한다. 선수들은 적응 과정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 둘 중 하나였다.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환경에서 꾸준히 적응해나간 결과라는 인식이 문화 전반에 깔려 있다.


에티오피아의 달리기는 개인 기록의 스포츠가 아니다. 앞사람의 발소리를 들으며 보폭을 맞추고, 그 군무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확장해나가는 과정이다


"혼자 뛰는 건 그냥 건강을 위한 거예요달라지고 싶으면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달려야 해요자기 페이스가 아니라다른 사람들 속도에 맞춰야 해요." (49)


저자가 훈련 장소에 도착한 지 고작 5분 만에 훈련 일정이 잡혔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는 이렇게 간단할 줄은 몰랐다고 고백한다. 달리기는 원래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라는 듯이.


코치 메세렛은 반복해서 강조한다.


"뒤처지는데 익숙해지시면 안 돼요. 뒤처지는 것도 결국 훈련의 일부처럼 몸에 적응해버리거든요. '앞사람 발을 따라 뛰는 법'을 익혀야 해요." (95)


저자는 이 경험이 달리기와 인류학의 교차점에 있다고 말한다. 둘 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몸을 움직이는 행위이자, 타인의 삶을 온몸으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한편으로 에티오피아 선수들에게 달리기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절실한 수단이기도 하다. 코치 메세렛의 말처럼, "1초면 100만 달러를 벌 수도 잃을 수도 있는 시간(121)"이기 때문이다.


올림픽 마라톤 4위 출신 케니 무어는 달리기의 고통이 "뜨거운 레인지 상판에 손을 대었을 때의 고통과는 다르다"고 표현했다. 저자는 이 고통을 무력감, 견딜 수 없는 무게, 제어할 수 없는 두려움에 가깝다고 묘사한다. 멈춰야 할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달리기다.


에티오피아 선수들은 고통을 피해야 할 장애물로 보지 않는다. 고통과 함께 머무는 법을 안다. 메세렛 코치가 강조하는 조금 벅차지만 감당할 수 있고정신은 온전히 집중된 상태인 '통제된 달리기'는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flow)과 일치한다. 자신이 노력할 수 있는 범위를 가늠하고 그 선 안에 머무는 것. 약간이라도 그 선을 넘으면 금세 큰 문제로 발전하고 다시 돌아오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고지대는 달리기를 단순한 체력 운동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명상적 행위로 만든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개념은 '이딜'이다.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신앙이 선수들의 훈련 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그 중심에 '이딜', '기회'라는 개념이 있다.


"이딜, '기회'를 만들어내는 최선의 방법은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고, 성실히 훈련하며, 무엇보다도 인내하는 태도였다.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는 건, 아무리 열심히 훈련하고 최선을 다한대도 지금은 자신의 때가 아닐 수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 훈련과 경기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달리기에 임하면 결국 모든 게 잘 풀릴 것이라는 이 믿음은 성공과 실패 앞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다." (299)


기록 갱신과 순위 상승에 집착하는 현대 달리기 문화와 정반대처럼 보이는 이 철학은, 사실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다. 옳은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되, 결과에 대한 집착으로 자신을 소진시키지 않는 지혜다. 에티오피아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꾸준히 강한 이유가 기술이나 신체 조건만이 아님을 이 개념이 잘 보여준다.


달리기를 하지 않아도 읽을 수 있다. 에티오피아 선수들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읽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우리가 달리는 이유, 함께 달리는 이유,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이유. 이 책은 그 질문들에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답한다. 결국 이 책이 묻는 건 달리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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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는 일
채수아 지음 / 모모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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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흔한 달콤한 로맨스나 완벽한 가족 화목을 노래하는 에세이가 아니다. 이 책은 오롯이 '사랑하는 쪽'에 서서 써 내려간 한 여성의 고백이자,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혔듯 '영혼의 자서전'과도 같다. 88편의 짧은 글 속에는 오랫동안 교직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1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시집살이를 견뎌온 한 사람의 삶의 무게가 조용히 녹아 있다.

 

저자는 사랑의 아름다운 면만 부각하는 '힐링'에 매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 동반하는 고통과 가혹한 의무의 지점들을 솔직하게 꺼내 놓는다.

 

"어머님은 죽고 싶었지만, 죽지 않으셨다. 어머님은 도망가고 싶으셨지만, 가족을 끝까지 먹여 살리셨다." (18)

 

시어머니를 모시며 건강을 잃고 정든 교단마저 일찍 내려놓아야 했던 저자에게, 사랑은 화려한 수식어가 아닌 '그 자리를 지켜낸 삶' 그 자체였다. 이론이 아니라 뼈아픈 경험에서 길어 올린 문장들이기에 그 울림은 더욱 깊고 묵직하다.

 

상처를 통과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저자가 포착하는 사랑의 장면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만원 전철에서 친절을 베푼 낯선 학생에게 읽던 책을 건네주는 찰나, 우는 아이의 이야기를 지나치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는 시간, 사랑은 거대한 희생이 아니라, 이렇게 잠시 멈춰 서서 누군가를 '그냥 봐주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저자는 자신의 삶으로 증명한다.

 

결국, 타인을 향하던 사랑의 시선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타인을 위해 헌신하다 텅 비어버린 자신을 직면할 때, 비로소 진짜 회복이 시작된다.

 

"알겠다. 점점 알아진다. 그냥 좋은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사는 거다. ...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랑을 심는 거다. 사랑을 선택하는 거다." (262)

 

수십 년의 세월을 통과하며 지식이 아닌 '지혜'로 나아가는 저자의 고백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고민하는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책의 문장들은 유려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소박하고 담담하다. 하지만 가르치려 들거나 설교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살아낸 것들을 담담하게 꺼내 놓기에, 마치 어머니가 차려주신 따뜻한 집밥처럼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다. 무거운 고민이 있더라도 "오늘 하루만 잘 살자"는 다짐으로 씩씩하게 일어서는 저자의 태도가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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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한 세계 크로스 1
김연수.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북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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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이 세 개라면 선은 세 개, 점이 네 개라면 선은 여섯 개가 된다. 점이 하나 늘어날 때마다 연결의 가능성은 훨씬 더 크게 확장된다. 문학도 비슷하다. 서로 다른 작가의 세계가 만날 때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의 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 근접한 세계는 바로 그런 연결의 실험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한국의 소설가 김연수와 일본의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공통의 주제인 윤리적 딜레마를 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쓰인 두 편의 소설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읽다 보면 결국 같은 질문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무엇이 옳은가그리고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김연수 작가의 우리들의 실패가 정치와 사회적 사건 이후에 남겨진 인간의 삶을 탐구한다면,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의 결정적 순간은 예술과 진실 사이에서 갈라지는 개인의 선택을 다룬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같은 질문을 향해 수렴한다.

 

1. 우리들의 실패 - 개인의 실패인가, 시대의 실패인가

 

사람의 삶에서 실패는 보통 개인의 선택과 책임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어떤 실패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와 사회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김연수 작가의 단편 우리들의 실패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인공 손동하는 대통령 탄핵 이후 벌어진 정치 스캔들에 연루된 인물이다. 설정만 보면 정치 르포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의 관심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있지 않다. 작가가 탐색하는 것은 실패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과 기억의 방식이다.

 

소설은 기자가 손동하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인터뷰라는 방식은 겉보기에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장치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인터뷰는 오히려 진실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손동하는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고 기자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어디까지 자기 합리화인지 독자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그 애매함이 바로 이 소설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손동하가 말하는 실패는 단순히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그는 마땅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후회를 안고 살아간다손동하는 대의를 위해 희생했다고 믿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감정이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존재할 때 우리는 그를 쉽게 비난하거나 옹호할 수 없게 된다.

 

소설 속에서 반복되는 인식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인간의 희망이나 후회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짚으로 만든 개일 뿐입니다. 잠시 존재하다가 그 쓰임이 다하면 버려지지요.” (49쪽)

 

이 문장은 인간의 삶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도 선택의 책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제목이다

나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들의 실패일까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지만 결국 하나의 현실 속에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의 선택은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어떤 사람의 생존은 또 다른 사람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모두 연결돼 있는 한, 살아남았다는 말은 누군가에게는 죽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겠죠.” (72쪽)

 

이 문장은 소설의 핵심을 보여준다. 우리는 서로 연결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며, 그 연결 속에서 누군가는 실패하고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실패를 완전히 개인의 문제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 소설은 실패의 원인을 밝히기보다 실패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을 바라본다. 과거의 선택은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삶은 계속 흔들린다그래서 우리들의 실패는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2. 결정적 순간 - 사진이 포착하는 윤리적 딜레마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정적 순간은 제목부터 흥미롭다. 사진에서 말하는 결정적 순간은 찰나의 장면을 포착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그 순간은 한 사람의 세계를 완전히 뒤흔드는 진실의 발견을 의미한다.

 

주인공 미즈마키 가스미는 큐레이터다. 그녀의 오랜 꿈은 거장 사진작가 사카키 미노루의 전시를 여는 것이다. 그러나 유고전을 준비하던 어느 날, 그녀는 그의 작업실에서 존재해서는 안 될 사진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 그녀의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놓인다.

 

'진실을 밝히고 전시를 무너뜨릴 것인가' 아니면 '비밀을 덮고 예술적 업적을 지킬 것인가'

 

단순해 보이는 이 질문이 이야기 전체를 압도한다.

 

가스미가 처음 사진을 봤을 때 느낀 감정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생리적 혐오감이었다. 이후 그녀는 그 감정이 윤리적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스스로 되묻는다이 장면은 인간의 심리를 아주 정확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먼저 감정을 느끼고, 나중에 그 감정을 정당화할 이유를 찾는다.

 

가스미의 고민은 더 복잡하다. 그녀는 예술을 깊이 사랑하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평생 존경해 온 예술가의 명성과 그 작품 뒤에 숨겨진 가능성 사이에서 그녀는 쉽게 선택할 수 없다.

 

이 소설은 일기, 기사, SNS 기록 등 다양한 형식을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구성한다. 하나의 사건을 여러 시점에서 바라보게 되면서 단일한 진실이라는 개념은 점점 흔들린다독자는 어느 이야기가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다. 결국 작가는 독자에게 판단을 맡긴다.

 

소설에는 예술을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예술가의 인격과 작품을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는 태도 역시 등장한다. 그러나 작가는 어느 쪽도 완전히 편안한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외면할 것인가. 그 선택의 무게를 이 소설은 조용히 보여준다.

 

3. 두 소설이 남긴 질문

 

우리들의 실패가 정치와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공동체의 실패를 다룬다면, 결정적 순간은 예술과 진실 사이에서 갈라지는 개인의 선택을 보여준다.

 

주제도 배경도 다르지만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독자에게 질문을 남긴다.

 

무엇이 옳은가, 그리고 우리는 그 옳음을 끝까지 믿을 수 있는가.

 

근접한 세계는 분명한 결론을 주지 않는다. 대신 읽고 난 뒤에도 오래 남는 불편한 질문을 건넨다. 어쩌면 그것이 이 책이 의도한 효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군가의 실패를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 실패가 사실은 우리가 속한 세계 전체의 실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이전처럼 편안하게 판단할 수 없게 된다그래서 이 책은 읽고 난 뒤에도 한동안 마음속에서 계속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아마도 그 질문을 붙들고 살아가는 일 자체가, 우리가 실패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노력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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