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호
성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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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서적을 제공받가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성해령의 소설에서 성공한 사람을 찾아보긴 어려울 것이다. 독립은 요원하고 우정은 실패하며 사랑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실패가 산적한 서사를 위해 소설가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마술은 고통의 서사를 치유의 서사로 교체하는 것이다. (290쪽)

 

『대부호』를 읽고 나서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해설의 이 문장이었다. 해설이 짚은 대로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끝내 이기지 못한다. 집을 구하고 가족을 돌보고 친구를 떠올리는 일상 속에도 해피엔딩이 들어설 자리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그 실패를 화해나 위로로 서둘러 봉합하지 않는다. 그 덮지 않음은 불편하면서도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만드는 긴장으로 남는다. 여덟 편의 단편 가운데 특히 인상 깊었던 작품은 「임장」, 「하악」, 「나방파리」였다. 선망과 가족, 우정이라는 서로 다른 관계를 다루는 세 작품은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모인다. 가까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정말 그 사람을 알고 있는가.

 

먼저 「임장」의 주인공 ‘나’는 자기 집을 마련하려는 마음으로 부동산 임장 모임에 참여하고, 그곳에서 모임을 이끄는 민연 언니를 선망한다. 일에 능숙하고 말이 분명한 민연을 동경하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그를 찾아 나섰다가 믿기 어려운 장면과 마주한다. 소설은 그 이후의 일을 직접 확인하도록 독자에게 남겨 둔다. 내게 오래 남은 문장은 화자가 반지하에 살던 친구의 집 냄새 때문에 친구와 멀어졌던 기억이었다.

 

친구에게 절교 편지를 쓰면서도 집에 가기 싫다는 진짜 이유는 말하지 못하고, 친구의 말투와 버릇이 싫다는 다른 이유를 적었다는 고백이다. “어떤 거짓은 진실의 반대가 아니라 대체일 수 있다”는 문장이 서늘한 것은 거짓말을 한 사람이 특별한 악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계급의 차이는 냄새라는 감각으로 옮겨지고, 그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사람은 말투와 버릇을 핑계로 삼는다.

 

임장 모임 역시 그런 번역이 일상이 된 공간처럼 보인다. 평수와 입지와 가격을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서는 서로의 처지를 냄새 맡듯 가늠한다. 남의 집을 평가하는 위치에 선 사람은 동시에 자기 처지의 열세를 선명하게 느끼기도 한다. 화자가 민연을 선망하는 방식도 다르지 않다. 선망은 상대를 정확히 보는 일이 아니라 자기 결핍을 상대에게 비추는 일일 수 있다. 그러므로 선망하던 사람이 사라질 때 흔들리는 것은 민연의 정체만이 아니다. 상대를 안다고 믿었던 ‘나’의 시선도 함께 흔들린다.

 

민연의 집을 치우며 마주한 쓰레기가 “생명보다 더 치열하게 부패하고 있었다”는 표현은 이 소설의 냄새와 이어진다. 숨기고 싶어 치우려 한 것이 사라지기는커녕 더 강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감각이다.

 

「하악」은 마흔 살 여성 자인이 발달장애인 동생 태인과 조카 서린을 만나러 가는 하루를 따라간다. 자인은 낮에는 북쪽으로, 저녁에는 남쪽으로 이동하며 돌봄의 시간을 지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조금씩 깨닫는다. 가족애라는 말이 가장 먼저 지워 버리는 감정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가족 소설이다. 자인은 동생을 두고 자신이 한 번도 원한 적 없던 동생이라고 생각한다.

 

이 구절이 정직하게 다가온 것은 돌봄이 흔히 헌신과 성장의 이야기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자인에게 동생은 선택하지 않은 몫이며, 자신이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축복의 목록에 놓인 존재다. 그렇다고 자인이 동생을 미워하기만 하는 것도, 사랑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양가적인 마음을 해소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작품의 힘이다. 해설이 말한 치유의 서사로의 교체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작품이라고 느꼈다. 자인은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선망과 열패감을 동시에 느낀다. 축복을 많이 받으며 자란 서린을 만나는 장면에서 그 감정은 창밖 서울의 불빛으로 표현된다. 빼곡한 불빛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삶이라는 사실, 살아가는 데 이렇게 많은 빛이 필요하다는 사실 앞에서 자인은 혼자 아득해진다.

 

그 순간의 감정은 단순한 부러움을 넘어선다. 사는 일 자체가 이만큼의 힘을 요구한다는 것을 몸으로 실감하는 듯하다. 가장 가까운 가족 사이에도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하악」의 서늘함이라면, 그 거리를 헤아리게 하는 단위는 창밖의 불빛이다.

 

「나방파리」는 서로의 처지에 깊이 이입하며 친구가 되었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멀어진 두 사람의 이야기다. 화자 일영은 종희 언니의 어린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받고, 오래 눌러 두었던 관계의 단절과 죄의식을 다시 마주한다. 제목 속 나방파리는 아주 작은 힘에도 짓이겨지는 미물이다. 오랜 친밀함도 그만큼 쉽게 으스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가장 아프게 다가온 장면은 종희가 일영에게 자신의 고통을 말하며 일영의 두통은 진짜가 아니었다고 몰아붙이는 대목이다. 검사 결과가 깨끗했다는 사실은 고통이 가짜였다는 말로 바뀌고, 카페의 손님과 점원이라는 자리는 ‘진짜 사는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가르는 선처럼 작동한다. 이 장면은 사과나 해명이 아니라 고통의 위계를 선언하는 순간이다. 누구의 고통이 진짜인지를 객관적으로 판정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사이이기에 더 정확히 찌를 수 있다는 점이 아프다. 일영은 무슨 말이든 하려다 입술만 깨물고 호텔방을 나선다.

 

그 모습에서 「임장」의 절교 편지가 떠올랐다. 「임장」의 화자는 하지 못한 진짜 말을 다른 거짓으로 대체했고, 일영은 해야 할 말을 입 안에 가둔다. 방식은 달라도 두 사람은 끝내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관계를 잃었다. 아들의 부고는 이미 끝난 줄 알았던 관계가 죄의식의 형태로 남아 있음을 드러낸다. 세 작품을 겹쳐 읽으며 공통으로 보인 것은 말하지 못하는 일, 계급과 처지의 비대칭, 그리고 그런 일이 일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진다는 점이었다. 「임장」에서는 진실이 거짓으로 대체되고, 「하악」에서는 감정이 가족애의 언어에 눌리며, 「나방파리」에서는 말이 입술 사이에서 사라진다. 반지하 집의 냄새와 축복받지 못한 사람의 열패감, 카페 점원과 손님의 거리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같은 비대칭을 드러낸다. 임장 모임과 돌봄의 하루와 호텔방은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들의 불편함은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다. 독립은 요원하고 우정은 실패하는 세계에서 「임장」은 자기 집을 향한 욕망을 독립의 불안과 겹쳐 놓고, 「나방파리」는 우정의 실패를 구체적인 장면으로 보여 준다. 「하악」은 가족이라는 단단해 보이는 관계도 그 운명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말한다. 성해령은 실패를 위로로 바꾸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자기 안의 선망과 열패감, 그리고 작은 악의를 돌아보게 한다. 가까운 사람을 안다고 믿는 마음은 어쩌면 상대를 보는 일보다 자신의 결핍을 그에게 비추는 데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대부호』는 그 익숙한 믿음을 조용히 흔들며, 우리가 서로에게 끝내 알 수 없는 존재로 남을 가능성을 오래 생각하게 하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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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
신영준.고영성 지음 / 상상스퀘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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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츠와 릴스 같은 숏폼 콘텐츠가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를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이 지나치게 시끄럽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해야 할 일은 쌓여 있고 확인해야 할 정보는 끊임없이 밀려오지만, 정작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흐릿해진다. 번아웃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언가를 태울 만큼 열심히 살아온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마음이 편안한 것도 아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옅은 피로가 마음 한편에 오래 깔려 있는 듯한 시기에 신영준, 고영성 두 작가의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을 읽었다. 두 작가의 책으로는 『완벽한 공부법』을 읽은 것이 전부였지만, 당시 많은 부분에서 공감했던 기억이 있어 이번에도 작가들의 이름만으로 자연스럽게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에서 두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프롤로그에서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삶의 조건은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고 세상은 이전보다 편리해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풍요는 늘어났지만 만족은 깊어지지 않았고, 편리해졌지만 행복해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저자들은 그 이유를 외부의 풍요가 삶을 편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삶의 의미까지 만들어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삶의 깊이는 생각하는 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6쪽).

 

저자들이 지금을 ‘생각의 멸종 시대’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극은 넘쳐나지만 정작 스스로 멈춰 서서 생각하는 시간은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자극 속에서 잠시 화면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질문해 보라고 권한다(8쪽).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저자들의 생각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대와 분야를 넘나드는 다양한 인물들의 통찰을 가져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맞게 다시 해석한다. 레스 브라운의 “또 다른 목표를 세우거나 새로운 꿈을 꾸기에 절대 늦은 때란 없다”(12쪽)라는 말로 생각의 문을 열고, 왜 지금 우리에게 이런 문장이 다시 필요한지를 차분히 설명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여러 시대의 현자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그 대화가 오늘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저자들의 안내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명언을 나열하는 책이었다면 쉽게 흥미를 잃었을지도 모르지만, 각각의 문장 뒤에 붙는 해석이 있었기에 생각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더하는 삶’보다 ‘덜어내는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현대인은 해야 할 일도 많고 배워야 할 것도 많으며 챙겨야 할 관계도 많다. 모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 할수록 생각은 여러 갈래로 흩어지고, 결국 어느 하나에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무엇을 더 채울 것인가보다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시간은 중립적이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지만 강요하지 않고, 가능성을 열어두지만 선택하지는 않는다. 시간의 가치는 시간 자체에 있지 않고,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있다”(25쪽)는 문장이 특히 오래 남았다. 이 문장을 읽으며 최근의 하루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문제는 주어진 시간에 무엇을 담을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해야 할 일의 목록에 새로운 항목을 하나씩 더하는 대신, 이번 주에는 무엇을 목록에서 지울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 사소한 변화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생각의 출발점일 것이다.

 

두 작가의 전작 『완벽한 공부법』에서도 인상 깊었던 메타인지에 관한 이야기는 이번 책에서도 실천적인 생각으로 다가왔다. 자기 자신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고, 실패와 감정을 조금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힘 말이다. “실망은 결과에서 오지만, 절망은 선택해서 온다”(45쪽)는 짧은 문장은 책이 말하는 태도를 잘 보여 준다. 실패라는 사건 자체를 언제나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절망으로 받아들일지 배움의 과정으로 받아들일지는 결국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태도를 단순히 의지력의 문제로 설명하지 않는다. 매번 굳은 결심을 반복하는 것보다 애초에 흔들리지 않도록 시스템과 환경을 설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침마다 운동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대신 운동화를 현관에 미리 꺼내 놓는 것처럼, 행동을 어렵게 만드는 환경을 바꾸는 것이 오래가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계발서에서 익숙하게 접했던 내용이기도 하지만, 이 책은 그것을 다시 현실적인 언어로 정리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나 역시 최근 흐지부지되었던 계획들을 떠올리며, 실패의 이유를 의지 부족으로만 돌렸지만 사실은 실패하기 쉬운 환경을 그대로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말과 행동, 진실과 용기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빌려 “헌신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말한 뒤, 저자들은 말은 쉽고 편리하지만 행동에는 책임과 비용이 따른다고 이야기한다. 진정한 헌신은 자신이 한 말에 무게를 싣기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111쪽). 사랑한다는 말도,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도 행동으로 옮겨질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는 문장 앞에서 나 역시 잠시 멈춰 섰다. 말로만 그쳤던 다짐이 얼마나 많았는지 돌아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진실과 용기에 관한 대목 역시 오래 기억에 남는다. “진실은 가려질 순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을 바탕으로 거짓으로 세운 것은 결국 진실이라는 흐름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126쪽), 용기가 부족한 사람은 자신의 멈춤을 설명하기 위해 오히려 방대한 논리와 근거를 수집한다고 지적한다(240쪽). 망설임은 신중함이라는 이름으로, 회피는 객관적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한다는 말은 새로운 도전 앞에서 여러 이유를 찾아 미루었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조언이지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수록 오히려 더 정확하게 자신을 찌르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가벼운 위로에 머물지도 않고 지나치게 추상적인 철학으로 흐르지도 않는 균형감에 있었다. 짧은 문장과 통찰을 제시한 뒤 그것이 오늘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함께 설명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자신의 삶과 연결해 생각해 볼 여지가 생긴다. 철학자의 말과 역사 속 인물의 일화, 심리학적 통찰까지 폭넓게 다루면서도 글이 장황해지지 않는 점도 좋았다. 


무엇보다 에필로그의 “행복은 한 번의 획득으로 고정되는 상태이기보다, 지속적으로 가꾸어야 하는 삶의 근력”이라는 생각과, 한 번 읽고 덮는 순간 생각은 지식으로 머물지만 되새기고 삶에 옮길 때 비로소 태도가 된다는 메시지가 이 책의 지향점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292쪽). 책 한 권을 읽는다고 해서 삶이 단번에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저자들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말이 더 신뢰감 있게 다가왔다.


한 문장으로 이 책을 표현한다면 복잡한 현대사회 속에서 나를 지키고 진짜 중요한 것에 집중하도록 돕는 ‘생각의 미니멀리즘’에 관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화려한 문장으로 독자를 압도하기보다 생각할 여백을 남겨 두는 방식 역시 책이 전하는 메시지와 잘 어울렸다. 물론 메타인지, 시스템의 힘, 실패를 대하는 태도처럼 이미 다른 자기계발서에서 여러 번 접했던 통찰도 적지 않았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기대한 독자라면 다소 익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다시 삶으로 가져오게 하는 데 이 책의 의미가 있었다. 또한 짧은 생각들이 이어지는 구성이다 보니 한 번에 많은 분량을 읽으면 다소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한 번에 읽어 내려가기보다 매일 조금씩 읽으며 그날의 삶에 적용해 보는 방식이 더 잘 어울리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을 읽고 난 뒤 가장 먼저 해보고 싶은 것은 하루 10분 정도 그날의 삶에서 무엇을 덜어낼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어떤 목표를 추가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데 익숙했던 나에게 무엇을 내려놓을지를 생각하는 일은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거창한 변화보다 작은 생각과 선택이 쌓여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책의 메시지처럼,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하나씩 덜어내는 연습부터 시작해 보고 싶다. 결국 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질문은 어떻게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인가가 아니었다. 지금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남기기 위해, 나는 무엇을 덜어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어쩌면 생각이 많아진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답이 아니라, 잠시 멈춰 자신에게 던지는 단순하고 본질적인 질문 몇 가지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은 더하는 삶에 익숙한 사람에게 제대로 덜어내는 삶을 시작해 보라고 조용히 권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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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영혼의 왈츠 1~2 세트 - 전2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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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영혼의 왈츠』는 『기억』(원제는 『판도라의 상자』), 『꿀벌의 예언』에 이은 판도라 연작의 세 번째 작품이다. 세 작품은 최면이라는 일종의 유도 명상을 통해 시간의 제약을 벗어나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에 닥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간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전작이 두 편이나 있어 바로 읽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무리가 없었다. 물론 전작의 내용을 알고 있다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영혼의 왈츠』만으로도 하나의 독립적인 소설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나 역시 『꿀벌의 예언』은 읽었지만 『기억』은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 작품을 읽었다.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작가가 적은 헌사부터 인상적이었다. 

“책과 도서관, 서점의 존재의 의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분께 이 책을 바칩니다. 이기는 게 당연해 보이지만 실은 갈수록 힘든 싸움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아무런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 각종 미디어가 빠른 속도로 우리의 감각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헌사는 책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게 했다. ‘이기는 게 당연해 보이지만 실은 갈수록 힘든 싸움이 되어 가고 있다’는 말에서 오늘날 책과 도서관, 서점이 마주한 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소설 한 권을 펼치기도 전에 이 작품이 단순한 오락물을 넘어 기록과 지식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고, 그 예감은 마지막까지 틀리지 않았다.


이야기는 아포칼립스를 단 5일 앞둔 시점, 즉 D-5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외제니 톨레다노는 파란 눈에 긴 빨간 머리를 가진 23세의 젊은 여성으로, 『기억』과 『꿀벌의 예언』의 주인공이었던 르네 톨레다노의 딸이다. 어머니 멜리사 톨레다노가 갑작스럽게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외제니는 퇴행 최면, 소설 속 표현으로는 ‘내면 여행 체험’을 통해 전생으로 들어가 파국의 실마리를 찾아 나선다. 아버지 르네 톨레다노 역시 아내의 갑작스러운 발작과 딸의 무모해 보이는 여정을 지켜보며 중요한 조력자 역할을 한다.


외제니의 여정은 단순히 개인의 과거를 찾아가는 모험이 아니다. 네안데르탈인 시대에서 고대 이집트, 피타고라스 학파의 그리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 전체의 역사를 관통한다. 그 과정에는 인류를 야만으로 이끌려는 세력과 문명의 빛을 지키려는 세력 사이의 12만 년에 걸친 대결이 숨어 있다. 외제니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파국을 막기 위해 이 오래된 싸움의 결말을 다시 써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개인의 이야기가 인류 전체의 역사와 연결되는 거대한 구조가 이 소설을 묵직하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소설이 초반부터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공식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유전 25%, 카르마 25%, 자유 의지 50%.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유전과 카르마의 영향을 받지만, 그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자유 의지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에게는 정해진 운명이나 환경 앞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며, 그 선택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의 방향까지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혔다. ‘자유 의지 50%’라는 설정은 『영혼의 왈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처럼 느껴졌다.


외제니는 전생을 오가며 최초로 불을 발견한 여성의 후손, 문자를 처음 발명한 여성 등 다양한 삶의 기억을 복원한다. 그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불타는 도서관이다. 선사시대의 엄지의 두루마기, 앙크티의 지식의 사원, 피타고라스 학파의 도서관, 그리고 현재의 소르본 대학교 도서관까지, 지식과 기록이 쌓인 장소가 파괴되는 모습이 반복된다. 현실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려 하자 외제니는 이렇게 다짐한다.


“매번 도서관이 불탔어. 선사시대의 엄지의 두루마기, 앙크티의 지식의 사원, 피타고라스 학파의 도서관, 그리고 지금 소르본 대학교 도서관... 이번에는 당하고만 있지 않겠어.”


이 문장은 『영혼의 왈츠』가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 소설인지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외제니는 세상이 악인들 때문에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수수방관하는 사람들 때문에 파괴된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떠올린다. 결국 기억과 기록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책 몇 권을 보존하는 일이 아니라 문명 자체를 지키는 일이라는 의미로 이어진다.


소설에서는 지식을 나누려는 사람들과 지식을 독점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의 대립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러나 외제니가 전생 체험을 통해 만난 천사들은 이러한 대립을 단순한 선악의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다.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없어요. 스스로에게 부여한 사명에 비추어 빠르게 혹은 느리게 진화하는 영혼들이 있을 뿐이죠”라는 말이나 “악마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사적 권력에 눈이 어두운 지도자들이 있을 뿐이죠”라는 말은 작품 속 갈등이 단순한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계몽과 몽매, 지식의 공유와 독점의 대립이 시대를 달리하며 반복된다는 설정은 현실의 양극화와 혐오를 떠올리게 만들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소재는 ‘아카샤 도서관’이었다. 멜리사의 주치의인 가네쉬 카푸어 교수는 외제니에게 힌두교 경전 가운데 하나인 『브라하다라냐카 우파니샤드』에 아카샤 도서관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설명한다. 기원전 800년에 집필된 이 책에 따르면 아카샤 도서관은 하늘에 존재하는 일종의 기억의 장소로 인간의 삶과 이야기가 저장되는 곳이다. 모든 인간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다는 발상은 소설 전체의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장치로 느껴졌다.


인간의 의식 수준을 점수로 표현한 설정도 흥미로웠다. “6점 만점에 3.5점”이라는 표현과 함께 “6점은 가장 높은 의식 수준을 가리켜요. 이 점수에 도달하면 환생 의무에서 벗어나죠”라는 설명이 등장한다. 인간의 정신적 진화를 구체적인 숫자로 표현한 방식이 새롭게 다가왔다. 소설 후반부에 천사가 영혼의 진화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작품의 제목인 ‘영혼의 왈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드러난다.


“영혼의 가족은 여러 생을 걸쳐, 때로 자신의 정신적 유산을 매개로 다시 만나 과거를 청산하고 복수를 펼치기도 해요. 그게 바로 시대를 건너가며 이어지는 위대한 영혼의 왈츠죠.”


이 말을 통해 제목이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여러 생을 거치면서 인연이 반복되고 서로 얽히는 소설의 구조 자체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답게 다양한 분야의 지식도 곳곳에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다. 명상 중 손동작을 뜻하는 ‘무드라’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엄지로 검지, 중지, 약지, 소지 끝을 차례로 살짝 누르면서 ‘사, 타, 나, 마’라고 말하는데, 이는 각각 태어나다, 살다, 죽다, 다시 태어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나의 손짓 안에 삶과 죽음, 환생의 순환이 압축되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쾌락의 정원〉을 두고 진행되는 강의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명화만큼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의 시작을 잘 설명해 주는 도구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는 말처럼 역대 통치자나 전쟁의 역사를 통해서만 한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한 점을 통해서도 시대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는 발상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또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뉴스 장면에서는 장관의 자살로 공석이 된 교육부 수장 자리에 인간 후임자가 아닌 최신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투입하겠다는 대통령의 발표가 등장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는 미래에 대한 은근한 경고처럼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이처럼 신화와 종교, 미술사, 신경과학, 인공지능과 같은 근미래 기술까지 폭넓은 소재가 한 작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다만 방대한 설정과 높은 사유의 밀도 때문에 호흡이 길게 느껴지는 구간도 있었다. 전생과 전생 사이를 오가는 구성이다 보니 시대와 인물이 자주 바뀌고, 각 시대에 등장하는 새로운 이름과 배경 지식을 따라가는 데 어느 정도 집중력이 필요했다. 역사와 철학, SF적 상상력이 강하게 결합된 만큼 인물 개개인의 감정보다는 개념과 메시지가 더 크게 다가오는 순간도 있었다. 특히 지식을 설명하는 장면이 이어질 때는 소설이라기보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방대한 설정 가운데에는 조금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은 베르베르 특유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혼의 왈츠』는 결국 ‘인간에게는 얼마나 많은 자유 의지가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통해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는 소설이었다. 유전 25%, 카르마 25%, 자유 의지 50%라는 공식은 운명과 선택 사이에서 인간이 가진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외제니가 전생을 거슬러 올라가며 발견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인류가 축적해 온 기억과 지식이었다.


무엇보다 책과 도서관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작품의 메시지가 오래 남았다. 수많은 문명이 사라지는 동안 인간이 남긴 기록과 지식 역시 반복해서 불타 없어졌다. 그러나 지식을 지키는 사람들은 매번 그것을 다시 이어 왔다. 결국 문명을 지키는 것은 거대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아니라, 기록하고 기억하고 공유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영혼의 왈츠』는 인류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지 묻는 소설이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답게 이야기 속에 역사와 종교, 철학, 과학과 미래 기술을 한꺼번에 담아낸 만큼 모든 설정이 완벽하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던지는 질문만큼은 분명했다.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이는 운명 앞에서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그 선택의 절반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은 개인의 삶을 넘어 인류의 미래까지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영혼의 왈츠』는 바로 그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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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아래 올리브 ㅣ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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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작가의 신작 『태양 아래 올리브』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했다. 태양과 올리브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따뜻하고 이국적이었지만, 김초엽 작가의 전작들을 떠올리면 그 이면에 분명 다른 질문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쯤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 소설은 신앙을 가진 수녀 ‘김이레’와 과학적 회의주의를 신념으로 삼는 유튜버 ‘서솔민’이 함께 떠나는 SF 버디 로드트립이다. 이레는 베로니카라는 이름으로 기후 재난 현장을 다니는 푸른아녜스 소속 수녀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둘러싼 빈칸과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솔민은 과학기술 정책 매거진 에디터이자 익명 과학 유튜브 채널 ‘미놋’을 운영하며, 믿음보다는 검증과 의심에 가까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두 사람은 과거의 오해로 멀어졌던 사이인데, 이레의 기억 속에 감춰진 비밀과 ‘준 이모’라는 인물을 찾기 위해 다시 함께 길을 나선다. 한국에서 시작된 여정은 이내 국경을 넘어 낯선 지역으로 이어지고, 두 사람은 이동하는 내내 새로운 인물과 사건을 마주하며 서로가 알지 못했던 진실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이 소설의 큰 매력은 단순한 사건 해결형 서사가 아니라는 데 있다. 로드트립이라는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정작 이야기의 중심에는 ‘존재란 무엇인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두 사람이 이동하며 단서를 좇는 추적극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레와 솔민은 처음부터 극과 극에 서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레는 신앙을 가진 수녀이고, 솔민은 유사 과학과 종교적 주장을 저격하는 것으로 명성을 쌓아온 인물이다.


“솔민은 지난 몇 년간 공격적 무신론, 반종교주의, 유사 과학 비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내세운 과학적 회의주의 채널로 일종의 명성, 혹은 악명을 쌓아왔다. 본명은 아니고 ‘미놋’이라는 이름으로.”(67쪽)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람과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숨이 막히는 사람. 이렇게 정반대의 태도를 가진 두 사람이 과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대립이 단순히 갈등의 소재로만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질문에 다가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여정이 진행될수록 드러난다.


솔민이 영혼의 존재를 단호하게 부정하는 장면은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은 어디에 깃드는 것일까? 머리, 심장, 혹은 뇌? 솔민의 생각은 단호했다. 영혼 같은 건 없다. 물질과 분리된 비물질적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솔민이 속한 신 없는 세계의 규칙이었다.”(107쪽)


이 확신에 찬 세계관은 소설이 전개되면서 계속 흔들리게 된다. 솔민이 믿어온 명료한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재미 중 하나였다.


『태양 아래 올리브』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정 초반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약통이나 미스터리한 인물들의 존재는 독자로 하여금 계속 의문을 품게 만든다.


“L-Trypsinol. 사진상으로는 평범한 수면 보조 식품처럼 보인다. 편안한 휴식과 좋은 기분, 숙면을 돕는다는 설명이 영어로 짧게 적혀 있다. 성분명은 읽자면 ‘트립시놀’일 텐데, 솔민이 아는 아미노산 ‘트립토판’도 아니고 소화 효소인 ‘트립신’도 아니다. 이게 뭐지?”(50쪽)


작은 단서 하나에서 시작된 의문은 점점 커다란 진실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진실은 독자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수녀인 이레의 정체에 대한 반전은 소설 중반부의 가장 충격적인 지점이었다.


“수녀님 머릿속에 있는 건 평범한 신경 세포가 아니거든요. 수녀님께는 고분자 합성 뉴런으로 만든 합성뇌가 있어요. 혹시나 했는데 정말 모르셨던 거군요?”(60쪽)


소설 초반이긴 하지만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소설의 방향이 완전히 새롭게 열리는 것을 느꼈다. 종교와 과학이라는 익숙한 이분법 위에,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또 다른 축이 겹쳐지면서 이야기는 훨씬 복잡하고 흥미로운 층위로 나아간다.


자신의 정체를 찾아 떠나는 이레의 여정의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등장하는 인물 ‘준’은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다. 엄마의 친구로 소개되어 처음 등장했을 때 준은 신비롭고 독특한 인상의 인물로 그려진다.


“준은 사자 갈기처럼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있었다. 색은 해왕성 같은 푸른 회색이었다. 이런 머리색은 만화에서나 봤는데. 게다가 엄마 또래라기엔 훨씬 젊어 보였고, 수동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144쪽)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준의 정체 역시 예상을 벗어난다. 준을 찾아 떠난 곳에서 만난 인물들 중 카윈은 솔민에게 준의 정체를 솔직하게 밝힌다.


“맞아 준은 사람이 아니야."

카윈이 담담하게 말했다.

"준은 우리와 같은 합성뉴런 소재로 만들어진 뉴로모픽 웨트웨어야.”(252쪽)


준의 정체가 밝혀진 시점에서 이미 소설 속 이레처럼 선을 넘은 것 같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덧붙이면 이레는 어릴 적 사고로 합성뇌를 가진 존재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합성뇌의 정착을 도와 준 이가 준이다. 그렇다면 이레에게는 영혼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가능해진다. 심지어 이레는 베로니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는 수녀이기에 오랫동안 단단하게 굳어진 종교계에도 커다란 돌을 던지는 존재가 된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철학적 좀비라는 사고 실험을 정면으로 끌어들인다.


“‘철학적 좀비’라는 사고 실험이 있다. 만약 내면적 경험이 전혀 없는 존재가 있는데 겉으로는 완전히 사람처럼 행동하고 자극에도 똑같이 반응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설령 그 안에 정말로 텅 비어 있다고 해도 외부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것이 좀비 난제였다. 자아는 오직 주관적 시점에서 경험되는 현상이고, 외부에서 그것을 검증하려는 시도는 결국 간접적일 뿐이다.”(109쪽)


겉으로 완전히 인간처럼 행동하는 존재의 내면을 우리는 결코 완전히 검증할 수 없다는 이 질문은, 이후 이레와 준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준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에 대한 설명에서 “당신은 존재하는 것도, 마음을 발명하는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당신은 존재했고 마음은 발명되었다. 당신은 그 모든 일을 원하지 않았고 택하지도 않았지만 그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났다. 당신은 이 세계와 너무 깊이 얽혀버렸다.”(302쪽)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소설 초반, 지구온난화로 인해 한국에서도 올리브 농장이 늘어난다는 배경 설명이 나온다. 이때만 해도 이 올리브나무가 단순한 배경 소재처럼 느껴졌다.


“알고 보니 그 나무에는 사연이 있었다. 최근 이 지역에 올리브 농장이 늘어났는데, 예전에는 한국에서 재배하기 어려웠던 올리브가 날씨가 점점 더워지면서 이제는 제법 큰 농장이 운영될 만큼 잘 자란다는 거였다. 꼭 먼 이국의 풍경화에나 등장할 법한, 태양 아래 은백색 올리브나무들. 주민들에게는 풍요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어떤 불길한 징조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19쪽)


하지만 그 올리브나무를 특별하게 본 이레는 흰 리본을 달아준다. 그리고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이 올리브나무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레라는 인물 자체를 은유하는 상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레의 영혼은 뒤바뀌었다. 이레는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뿌리 내려 버린 올리브 나무였다.”(244쪽)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레는 자신을 향한 이 은유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시 받아들인다.


“올리브나무의 흰 리본을 묶어 주던 그날, 이레는 그곳에서 있어서는 안 될 올리브를 연민했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이레는 알았다. 있어서는 안 될 올리브가 아니라, 이미 그곳에 뿌리 내렸기 때문에 살아가기로 결심한 올리브였다는 것을.”(389쪽)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놓인 존재라는 연민의 시선에서, 이미 그 자리에 뿌리내렸기 때문에 살아가기로 결심한 존재라는 긍정으로 나아가는 이 문장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제목이 왜 이토록 정확했는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이해하게 됐다.


이레가 자신의 정체성 앞에서 내리는 선택 역시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대목이다.


“선 안쪽에 남겠다고 고집할 수도 있었다. 자신이 온전한 인간임을 인정받는 쉬운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레는 쉬운 쪽으로 가는 대신, 계속 질문하는 길을 가고 싶었다. 감당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려운 질문 앞에 서고 싶었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일 걸 짐작하면서도 그 길을 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이레는 지금 그 선택이 무척 뿌듯했다. 어쩌면 이 감정을 자긍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383쪽)


편안하고 명료한 답 대신 계속 질문하는 쪽을 선택하는 이레의 모습에서,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응원하고 있는 태도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정답을 손에 쥐는 것보다, 어려운 질문 앞에 계속 서 있으려는 용기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로 읽혔다.


『태양 아래 올리브』를 읽으며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나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였다. 이레와 솔민은 신앙과 의심이라는, 언뜻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태도를 각자 대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걸으며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받아들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해란 상대의 신념을 내 쪽으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서 있는 자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적 사실과 인간적인 믿음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이 소설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끝까지 함께 붙잡고 간다.


이 소설은 여행 소설의 얼굴을 한 질문의 소설이었다. 김초엽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인간을 둘러싼 경계와 존재의 감각을 집요하게 건드린다. 끝까지 읽고 나서야 제목이 왜 이토록 정확했는지 이해하게 되는 소설이다. 로드트립, 성장, 관계, 존재론적 질문이 촘촘히 얽힌 이야기이기에 쉬운 소설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게 되는 힘이 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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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디 할머니 - 소설가가 사랑하는 박완서 단편 베스트 10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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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의 소설은 이상할 만큼 오래 남는다. 읽는 동안에는 피식 웃게 만드는 장면이 많은데, 책을 덮고 나면 그 웃음이 어느새 서늘한 질문으로 바뀌어 있다. 『쥬디 할머니』 역시 그랬다.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다른 시대와 다른 인물을 그리고 있지만,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모인다. 우리가 평온하다고 믿는 일상은 얼마나 쉽게 균열을 드러내는가.


이번 단편집에서 특히 오래 마음에 남은 작품은 표제작 「쥬디 할머니」와 「애보기가 쉽다고?」, 「부처님 근처」였다. 세 작품은 노년, 돌봄, 전쟁이라는 서로 다른 소재를 다루지만, 모두 평범한 삶 속에 숨어 있는 외로움과 상처를 들춰낸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표제작 「쥬디 할머니」는 처음에는 조금 우스꽝스럽다. 미국에 사는 손녀의 사진을 크게 걸어두고, 세련된 노년을 연출하려 애쓰는 할머니의 모습은 허영심 많은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 허영은 외로움을 감추기 위한 마지막 울타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식이 보고 싶어 일부러라도 앓아눕고 싶다는 고백은 웃음을 단숨에 멈추게 만든다. 특히 외국식 이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세태를 비틀며 보여주는 풍자는 지금의 SNS 문화와도 묘하게 겹쳐 보였다. 보여지는 삶을 애써 꾸미는 사람들의 모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애보기가 쉽다고?」는 은퇴 후 손주를 돌보게 된 한 남성을 통해 돌봄 노동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던 사람이 가족 안에서는 너무도 쉽게 '아이 보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과정은 웃기면서도 씁쓸하다. 육아를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처럼 여기지만, 그 노동을 떠맡은 사람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진다. 박완서는 그 과정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내면서도 가족 안에서조차 돌봄이 얼마나 쉽게 당연한 희생으로 소비되는지를 날카롭게 짚어낸다.

 

세 작품 가운데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긴 것은 「부처님 근처」였다. 전쟁이 남긴 상처를 다루지만 거창한 비극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초값을 흥정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슬픔 역시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시간을 보여준다. 특히 세월이 흐르며 상처를 기억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현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은 오래 마음을 붙들었다. 잊는다는 것이 반드시 치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박완서 작가는 조용하지만 강한 문장으로 들려준다.

 

세 작품을 함께 읽으며 느낀 것은 박완서 작가가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균형감이었다. 그는 인물을 쉽게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냉정하게 재단하지도 않는다. 허영도 보여주고, 속물적인 모습도 드러내며, 때로는 이기적인 마음까지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독자는 끝내 그들을 미워할 수 없다. 누구나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이 작품들이 수십 년 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노년의 외로움, 가족 안에서의 돌봄, 시대가 남긴 상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마음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쥬디 할머니』는 오래된 작품집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을 비추는 이야기처럼 읽혔다.

 

박완서 작가는 독자에게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웃으며 읽기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마음이 묵직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을 관찰하는 날카로운 시선과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이해가 함께 살아 있는 작품. 그래서 이 단편집은 읽고 난 뒤에도 여러 날 동안 문장과 장면들이 마음속을 천천히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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