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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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음악학자, 영화감독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작품을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긴 알고 있는 현대 이탈리아 작가로는 움베르토 에코가 거의 유일하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돌 가수같은 깜직한 사진 한 장을 공개하고는 은둔생활을 한다는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같은 인물이 아니기에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책을 읽기 전에 작가에 대해 대강 파악하면 처음 접하는 작가라도 조금은 알아가기 쉽지 않을까 해서 찾아본 것인데, 웬걸 역시 어렵다. 삶에 대한 통찰을 한 권의 책에 집약해서 그런지 쉽지는 않은 이야기이다. (에코를 비롯해서 이탈리아 작가들의 글은 왜이리 어려운지...휴~) 그래도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잘 되라고 하는 소리는 잔소리로 들리기 쉬우니 어렵고 생각거리가 많은 이야기도 분명 삶에 좋은 이야기가 되겠지.

 

「이런 이야기」는 시작하는 곳에서 끝나는 길을 꿈꾸는 울티모의 삶을 어린시절부터 전쟁에 참전했던 시절, 연인인지 아닌지 아직도 아리송한 엘리자베타의 일기 등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과연 거장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울티모를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을까?

 

1. 길에 대한 꿈을 꾸게 되는, <울티모의 어린 시절>

  울티모는 병약한 아이였다. 고비를 맞을 때마다 세례를 받았기에 세 번이나 세례를 받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금빛그늘의 분위기를 지닌 특별한 아이로 자랐다. 그런 울티모에게 아버지 파르리는 본업인 소를 모두 팔고 자동차 정비를 업으로 삼기로 선언한다. 마침 자동차 시대의 태동기였고, 여러 레이스가 펼쳐지고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귀족 일부의 취미생활로 여겨지던 때였다.

  파르리는 울티모와 토리노에서 트럭 판매원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어찌보면 우리가 하는 일이란 그저 남들이 다 끝내지 못하고 남겨둔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마무리할 일을 시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p. 92)”라는 말을 한다. 아들과의 시간을 늘이는 것이 이야기를 하는 방법이기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온 말이지만, 일을 시작하고는 남겨둔 일을 마무리하는 것 또는 마무리할 일을 시작하는 것이라는 말이 묘하게 여운이 남았다.

  파르리는 그의 파트너가 되는 담브로시오 백작을 만나고 그와 함께 자동차 경주를 보러 간다. 그곳에서 아이는 자동차의 소음과 냄새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다.

  아이가 보이게는 길이 자동차들을 길들이는 것이지 자동차들이 길을 길들이는 게 아니었다. 그런 이치를 터득한 아이의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의 인생이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인간은 어떤 사람이 되기 전에 이미 그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p. 73)

어떤 사람이 되기 전의 그 사람이 된 어린시절의 울티모였다.

 

2. 자신의 길이 생기는, <카포레토 회상록>

  제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었다. 참호안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만 했던 그런 곳에 울티모가 있었다. 탈영으로 총살된 아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한 수학자의 회상록 속에서 울티모는 죽음을 목격하고 전쟁에서 이기기를 바랐지만 전쟁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울티모는 마지막에 자신의 계획을 밝힌다. 아무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자신만의 도로를 건설하는 것을 말이다.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굽이 한 굽이 차례대로 담을 경주로를 만들기 위해 살고 있다고 한다.

  울티모의 꿈이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대목이긴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참호속에서 막내의 죽음을 목격하는 부분이었다. 아군이 고통스러워 하는 막내의 마지막 숨을 끊는 모습을 본 울티모는 “한 사람이 죽으면 얼마나 많은 것이 함께 사라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p. 148)”고 한다. 울티모의 말마따나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애석한 일이다.

 

3. 생각지도 못한 반전, <엘리자베타>

  내가 보기엔 사람들이 오래 사는 것 같아도 사실은 안 그래.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는 시간은 그 긴 세월의 작은 부분일 뿐이야. 다시 말해서 자기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를 알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시가에만 진정으로 살았다 할 수 있어. 그런 시기에 사람들은 행복해. 나머지 세월은 기다리거나 추억하는 시간이야. 기다리거나 추억하는 때에는 슬프지도 행복하지도 않아. 슬퍼 보이기는 하지. 하지만 그건 그저 기다리고 있거나 추억하고 있기 때문이야. 기다리는 사람은 슬프지 않아. 추억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그냥 멀리 있는 것뿐이야. (p. 264)

  엘리자베타의 일기로 이루어진 장이다. 잠시 엘리자베타와 울티모는 같은 일을 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울티모가 엘리자베타에게 한 말이 「이런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깊었다. 훗날 울티모를 찾아간 엘리자베타는 파르리에게도 같은 내용의 말을 듣는데, 아무래도 복습효과를 노린 작가의 의도인 것 같았다.

  엘리자베타의 일기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녀의 일방적인 말밖에 들을 수 없지만, 나중에 울티모를 통해서 밝혀지는 나름의 반전이 쏠쏠했다.

 

4. 울티모의 꿈을 실현하는 엘리자베타, <에필로그>

  울티모는 노수학자에게 자신만의 경주로를 만들고 두 팔의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돌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거라고 자신의 계획을 말했었다. 그 꿈을 이루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서킷을 여기에 만들거라고 그의 동생의 통해 알 수 있었다. 울티모가 그녀에게 남긴 서킷그림과 같은 서킷을 오랫동안 찾아다닌 엘리자베타는 늪지대에 만들어진 그의 서킷을 복구하고는 자신만의 레이스를 펼친다. 각각의 굽이가 하나의 몸짓으로 녹아들고 있음을 느끼고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았음을 알고는 서킷을 부숴버림으로써 「이런 이야기」의 이야기가 막을 내린다.

  

  무엇보다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옆집 할아버지께 재미난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가 어려운 숙제를 하나 받은 느낌이랄까? 자신의 길을 꿈꾸던 울티모의 삶도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자신감과 의리로 헤쳐 나가던 파르리의 직업관도 자신만의 목적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엘리자베타의 삶도 흥미로웠지만 울티모의 말을 듣고 쓴 엘리자베타의 일기속의 의문,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났을까? 나는 언제쯤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될까? 아니, 이미 진정으로 살아 있었던 적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게 언제였을까? (p. 265)’이 두고두고 곱씹게되는 「이런 이야기」였다.

 

  끝으로 번역된 책에서 잘 찾아보기 힘든 '비거스렁이(p. 52)', '갈마드는(p. 165)', '기연가미연가(p. 173)', '생급스러워서(p. 223)' 등의 조금은 생소한 재미난 말 등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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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식탁 - 독성물질은 어떻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나
마리 모니크 로뱅 지음, 권지현 옮김 / 판미동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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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한 언론인이 쓴 ‘독성물질은 어떻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나’의 부제가 붙은 「죽음의 식탁」은 농약에서부터 식탁위의 플라스틱 용기까지 어떻게 독을 품고 있는 물건들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고 쓰는 물건이 되었는지 파헤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당히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책이다. 기업의 최대 목표는 이윤이기에 또한 그러한 기업들로 인해 생활이 윤택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불편한 책임은 틀림없다. 그래도 저자가 세운 목표대로 ‘적어도 탄탄한 논리로 무장해서 능력껏 행동하고 더 나아가 우리 건강을 지배하는 게임의 법칙을 바꿀 수 있게 하기’위해서는 꼭 한번 읽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아는 것이 곧 힘이니까.

 

 다큐멘터리 제작자답게 「죽음의 식탁」은 한편의 다큐멘터리 같았다. (한편이라고 하기엔 분량이 제법 많지만 말이다.^^;) 프랑스 내외의 많은 피해 사례를 중심으로 그들의 힘든 싸움을 먼저 이야기를 하고 산업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끄집어내고 있다. 농약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다이옥신, 아스파르탐, 비스페놀A 등 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물질들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파헤쳐 간다. 특히나 새로운 화학물질을 만든 기업이나 그 기업이 후원하는 연구소, 그것을 규제해야하는 공권력의 기관 등이 거미줄처럼 얽혀 소비자들을 위협하는 장면이 글만 읽어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최근 농약이 선거 후보들의 토론에서 언급이 되어서 그런지 농약에 대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2006년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예방 매뉴얼의 내용인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의 신경계는 근본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곤충의 신경계를 공격하기 위해 개발된 살충제는 인간의 신경계에도 급성 혹은 장기적으로 독성 효과를 일으킬 수 있음이 분명하다. (p. 147)”라는 부분은 농약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살충제는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에 생각을 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았다. 또한 우리가 건강에 아무런 문제없이 평생 동안 매일 섭취할 수 있는 화학물질의 양이라고 정의된 일일섭취허용량이 왜 만들어 졌는지에 대한 연구 자료가 비밀 속에 숨어야 하는지도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저자가 인용한 <뉴욕타임즈>의 유연휘발유에 대한 기사이다.

“일반 대중에 대한 위험이 특정 불가한 상황이므로 화학자들은 제품 생산을 중단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이것은 이 사안을 감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는 완전히 다른 과학자의 시각이며, 과학자의 판단이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합리적인 판단이 것만은 분명하다.” 이에 저자는 과학자들이 독립적이고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규명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한 문제이므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합리적인 사람들인 과학자들을 믿고 안심할 수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것이 이 두꺼운 책을 만든 이유가 될 것 같았다.

 

 분명 많은 제품들이 우리의 삶을 좀 더 편하게 해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최소한 어떤 독성이 있고 어떻게 사용 혹은 사용 중단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이윤이 아닌 건강과 목숨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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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 사회를 넘어서 -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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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함부로 사용하고 멀쩡한 물건도 유행이 지났다는 다소 진부한 핑계로 새로운 물건을 찾는 것을 보는 어르신들의 한마디는 늘 ‘요즘 젊은 것들은 배를 곯지 않아서 그렇다’이다. 그렇게 아껴 쓰고 절약하는 것이 무조건으로 옳은 일이고 미덕으로 배웠지만 언젠가 본 절약으로 내수경제가 어려워진다는 기사한토막이 그런 확고한 신념에 찬물을 끼얹을 때 세르주 라투슈의 「낭비사회를 넘어서」를 보게 되었다.

 

 같은 주제의 먼저 나온 책 번역본에 머리말이나 해제를 덧붙일 요량으로 노트를 정리하면서 쓰게 되었다는 이 소책자는 작고 가볍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철학자가 쓴 글이어서 그런지 프랑스인이 쓴 글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프랑스 철학자가 쓴 글이어서 그런지 무거운 주제에다 쉽지 않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저자는 분명한 필요를 위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기 위해 성장하는, 성장이 모든 가치를 흡수해버리는 성장 사회의 종착점인 소비 사회를 경고한다. 따라서 이러한 대량소비를 필요로 한 대량생산을 경고하면서 생산성 향상이 소비 증대를 강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강력하게 고용을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고 진단한다. (18쪽) 그리고 「버리기 위해 만들기」의 저자 자일스 슬레이드의 ‘인위적으로 공산품의 수명을 단축시켜 새로운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 사용되는 모든 종류의 기술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개념’인 계획적 진부화를 소개하면서 산업화를 주도해온 기업들이 계획적 진부화를 통해 우리의 소비를 조장하면서 낭비 사회를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계획적 진부화란 용어가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수많은 공산품들의 수명이 소비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결코 길지 않으며, 새로운 제품을 구매하고 나서 몇 달이 지나면 신제품이 나오는 것을 경험한 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 계획적 진부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그것의 근거로 전구 제조 회사 카르텔과 ‘1000시간 위원회’나 유럽과 미국의 사라진 경전철 등은 우리 삶에 깊게 뿌리내린 계획적 진부화의 현주소를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게다가 일회용제품이 갈수록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상품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인간은 소외되거나 사용 후 해고되는 등 상품을 넘어 인간까지 포함하는 일반화된 쇠퇴는 지금도 조금씩 보이고 있는 성장위주의 부작용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이에 저자는 탈성장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버리고 계획적 진부화를 제품의 지속 가능성, 수리 가능성으로 대체함으로써 자연 자원 채취량을 지속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하며 성장 없는 번영과 검조한 풍요의 사회로 전환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하며 필요에 의한 성장을 강조한다. 하지만 삶의 많은 부분을 기업에서 나오는 생산물에 의존하고 있는 고도 산업사회인 요즘에는 말처럼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 이면에 숨겨진 ‘계획적 진부화’에 대해서 고민해보아야 할 때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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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애니멀 -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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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웅이 세상을 다스를 때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하여 환웅은 쑥과 마늘만으로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니 쑥과 마늘을 견디지 못한 호랑이는 동굴을 뛰쳐 나가고 참을성 많은 곰만이 삼칠일을 견뎌내 사람이 되었고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을 나았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인 단군신화이다. 학교에 처음 들어가 우리나라에 대해 배울 즈음에 처음 접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그 후 곰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 곰을 토템으로 삼는 부족이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은 부족을 물리치고 세력을 잡으면서 그들의 정당성을 위해 단군신화가 생겨났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접하면서 그럴수도 있겠다며 그동안 배웠던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알에서 태어났다던 박혁거세나 주몽 등의 이야기는 왜 불가사의한 일을 그릴까란 생각을 짧게나마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이에 “인간은 이야기에 탐닉하도록 진화했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조너선 갓셜의 「스토리텔링 애니멸」은 이런 고민을 어느 정도 해결해 주었다. 또한 갓셜은 이야기, 픽션은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쾌락을 제공하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며 삶의 예행 연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한다. 즉, “이야기는 사회의 윤활유이자 접착제이다. 올바른 행동을 장려함으로써 사회적 마찰을 줄이고 공통의 가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묶는다. 이야기는 우리를 균질화한다. 즉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마셜 맥루언의 ‘지구촌’ 개념에는 이런 뜻이 담겨있다. 기술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같은 매체를 접하게 함으로써 전 세계를 아우르는 마을의 주민이 되게 한다. (p. 170)”고 이야기를 설명한다. 게다가 이야기는 구술에서 점토판으로, 육필 원고로, 인쇄 서적으로, 영화로, 텔레비전 등으로 점차 다양하고 디지털적으로 진화했지만 이야기의 근본은 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야기기 세상을 더 잘 살 수 있도록 시뮬레이션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이야기가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었다는 말에 눈길이 갔다. 언젠가 서양의 문화는 ‘I’로 표현되는 개인중심이고, 동양의 문화는 ‘We’로 표현할 수 있는 공동체중심이라는 글을 보면서 ‘우리’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주 쓰던 우리라는 말이었지만 공동체라는 개념과 연관시킬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그림은 울타리였다.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은 ‘우리’ 안이지만 울타리 밖의 이들은 ‘너희’로 배타적이고 심지어는 적대적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는 갓셜의 이야기의 역할을 보고는 단군신화를 비롯해서 건국 설화 등의 탄생이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

 

 이야기에 대해 신경과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심지어는 종교적으로 다양한 접근을 하면서 인간이 이야기에 빠져드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부분은 마지막 장이었다. 이야기에 탐닉하는 것과 음식에 탐닉하는 것을 비교하면서 ‘유행성 정신 당뇨병’ 같은 현상을 우려한 부분이었는데, 한시도 스마트폰을 손에 놓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 심지어는 로그아웃으로 1년을 살아 예전과 같은 삶을 회복했다는 이야기가 책으로도 나오는 요즘에 몰입적인 쌍방향 이야기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어 이야기가 미래에 인간의 삶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완전히 집어삼키는 경고는 공감이 되었다.

 

 이야기에 대한 책답게 이야기는 왜 말썽에 집착을 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다음 장에 이야기 친화적인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등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래서 책에 대한 몰입도는 여타 소설책 못지않게 뛰어났다. ‘재미있는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책’ 이라면 너무 간단할 것 같지만 이만한 말도 없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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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잃어버린 세계 - 캄브리아기 폭발의 비밀을 찾아서
마틴 브레이저 지음, 노승영 옮김, 이정모 감수 / 반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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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미국의 밀러는 원시지구의 대기와 같은 메탄, 암모니아, 수증기, 수소의 혼합기체를 가열과 방전을 통해서 아미노산 및 유기산 등이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최초의 생명체의 탄생을 증명하였다. 약 46억 년의 지구 역사 속에서 이렇게 생명활동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밀러의 실험, 출처 : 네이버 지식검색)

 

 생명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왔는지는 과학계·종교계를 가리지 않고 영원한 화두로 남아 있음은 자명해 보인다. 그렇기에 다윈의 「종의 기원」출간때부터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한 다윈도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삼엽충 아래의 선캄브라아기 지층에서 생명은 점진적으로 진화한다는 그의 가설을 뒷받침해 줄 화석을 찾지 못 한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폭발적인 생명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캄브리아기의 화석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가설들이 생겨 났다. 생명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캄브리아기 이전을 저자는 ‘다윈의 잃어버린 세계’라고 명명하고 키리브해, 시베리아, 중국, 외몽골 등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오래된 지층을 찾아다니는 일종의 기행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일종의 보고서이다.

 

  우선 각종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중생대의 티라노사우루스 등의 공룡이나, 신석기 인류와 사투에 종종 등장하는 신생대의 매머드, 심지어는 하다못해 고생대의 삼엽충은 흔히 알려져 있어 쉽게 이해가 갈 수 있지만 「다윈의 잃어버린 세계」에서 다루고 있는 생물은 칸켈로리아, 콜레올로이데스 등 얼핏 보면 로마시대의 집정관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패각류, 해면류의 초기의 생명체로 이름을 굉장히 어려웠다. 또한 어쩌면 그림과는 영 재능이 없는 탓인지 친절한 그림이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의 생김새를 떠올리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초기 지구에서 살아갔을 몇몇 생명체를 볼 수 있는 재미가 있었다.

(저자가 직접 그렸다는 캄브리아기 전세 화석, p.71)

 

  정해진 정답이 없는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 저자는 ‘다윈의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가는 과정을 카드게임으로 비유를 하고 있다. 엎어진 카드가 무엇인지, 카드게임의 규칙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 여타 다른 카드게임과 다른 점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이에 재미있는 가설 세 가지를 제시하는 데 바로 선캄브리아 시대에도 동물이 많이 살았지만 발명되지 않았다는 ‘라이엘의 감’, 캄브리아기 이전의 초기 바다에 탄산석회가 없어 동물이 딱딱한 껍데기를 만들지 못해 화석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는 ‘달리의 꾀’, 캄브리아기 대폭발이 쉽게 화석화되는 광물의 진화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솔러스의 수’ 이다. 게다가 고생물학자들이 집착한다는 ‘내 가장 오래된 화석이 네 가장 오래된 화석보다 더 오래된 거야My Oldest Fossils Are Older Than Your Oldest Fossils'라는 모파오티오프(Mofaotyof)의 원칙을 소개하기도 한다. (p. 213)

 

「프린키피아」“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건 바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라는 유명한 구절처럼 저자도 찰스 라이엘, 애덤 세지윅 등 많은 거인들의 연구를 토대로 자신의 가설을 세우고 있지만 유독 스티븐 제이 굴드의 가설을 지나치게 부정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저자가 심심치 않게 쓰고 있는 빅토리아 시대라든지, 지질학의 거인들이 있었던 케임브리지, 옥스퍼드와 관계없는 곳에서 강의를 하고 연구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란 생각도 잠깐 들었다. 어쩌면 캄브리아의 대폭발은 진화는 짧은 기간에 급격한 변화에 의해 야기되나 그 후 긴 기간이 지나도 생물에는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굴드가 주장하는 단속 평형설에 의해 더 설명이 잘 될 수도 있어 보이는데 말이다.

 

 비록 저자의 이론이 아직 학계에서 널리 인정되지는 않고 있고, 생소한 고생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지만, 다윈이 그토록 고민했던 비밀에 한 발짝 발을 들어 놓은 재미가 쏠쏠한 「다윈의 잃어버린 세계」였다. 게다가 옮긴이조차 후기에는 스포일러가 들어 있으니 책을 다 읽은 후에 보라고 당부하고 있기에 저자의 결론을 섣불리 밝힐 수는 없지만 탐사여행의 끝자락에 저자는 자신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렇게까지 고민하고 연구를 한 것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굉장해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캄브리아기의 폭발을 알았던 것만으로도 일독의 가치는 충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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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riski 2014-05-02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만 굴드의 주장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요. 굴드가 그 전에 주장했던 버제스 세일(대략 캄브리아 초기 정도 됩니다) 동물군이 현생동물종과 연관관계가 거의 없다는 주장(굴드의 저서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에 나옵니다)에 대해 현재 학계에서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주류이므로 (리처드 포티의 이야기가 그 책에도 나옵니다) 그 견해를 따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