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의 세계에 신의 공간은 없다
빅터 J. 스텐저 지음, 김미선 옮김 / 서커스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도킨스의 책(빌려본 책이라 지금 그 내용에 대해 뭐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후 '우주에는 신이 없다'는 책에서 확실한 실망을 한 뒤에 정말 마지막으로 읽어보자는 심정으로 읽기 시작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직 ‘존재하는 신’이나 ‘신의 언어’같은 기독교 변호 서적들은 읽지 않았다.)

그러나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물론 물리학에 대한 전문성 덕분에 '우주에는 신이 없다'에 비해 읽을거리가 훨씬 많지만 그 핵심 내용에서는 큰 차이 없었다.

 

 

서문에서 그는

'신이 우주의 움직임과 인간의 삶에서 그토록 중추적인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면, 단순히 그 사실 덕분에 그는 과학적 수단에 의해서 탐지 되어야 하는 것이다.'(22p)

 

라고 말하는데 이건 ‘허수아비 논증’과 비슷하다. 이미 기독교 등의 신은 세계를 창조한 ‘주체’로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있었던 존재이다. 게다가 독립적인 주권을 가진 존재로서의 신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드러내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러나 저자는 서문에 이렇게 ‘~해야 한다’며 탐지 되어야 하는 ‘제한된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자기 범위 밖에 있는 대상을 자기 영역에서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서론에도 할 말이 많지만 책 내용이 많기 때문에 생략한다.

 

 

1장은 ‘신을 검증할 수 없음’을 들어 이야기하기 위해 ‘데이비드 흄’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흄이 과학법칙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잘 알 사람이 이렇게 시작하다니…….)

그는 신을 물질계로 끌어 내리기 위해 “세상창조 때부터 그분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분께서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나 알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다.”(책 내용과 달리 성구는 바른 성경에서 인용)라고 말하는 로마서 1장 20절을 이용해 “우리는 신의 증거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우기는데 해당 성구 문맥을 보면 신의 존재 증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에게 영광 돌리지 않는 자들(21절) 등을 비판하는 구절이다.”

 

저자는 ‘철학적 이론이나 형이상학, 또는 순수한 존재 명제는 논박이 불가능하다’는 포퍼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기독교 등의 신은 "모든 곳에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찾을 수 있어야 한다."면서 기독교의 신과는 다른 허수아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인용하는 내용들도 ‘어떤 존재가 완벽하다면 그가 창조하는 것은 무엇이든 완벽해야 한다.’면서 독립적인 신이 아니라 어떤 것에 ‘속박되어 있는 존재’ 를 허수아비로 세우려는 내용들이다.

(완전한 존재는 자신이 원하는 데로 만들 완전한 자유가 있다.)

 

48p에 있는 전능의 역설’만 봐도 “신은 그가 들 수 없는 돌을 창조 할 수 없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다.”고 하는데 이야기를 바꿔보자.

전능한 신은 들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있는가? 만들 수 있다. 그러면 들 수 없는 돌을 창조 할 수 있다면 전능하지 않은 건가? 아니다! 들 수 없는 돌을 만든 그 순간부터 전능하지 않다. 즉 그 질문은 전능한 존재가 전능함을 포기하는 행위를 내포하며, 질문 자체가 모순이다.

 

53p에서 “감각 너머의 세계에 종류를 불문하고 신이나 영령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 신앙에 대해 “태양이 신의 전차다.”는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건 말 돌리기로 보인다. 증명할 수 없는 영역이라면 서로 입 다물면 된다.

(물론 저자는 “과학을 하나의 문화적 설화로 여길 수 있겠지만 그 우월한 능력, 효용, 보편성 때문에 다른 문화적 설화와는 다르다.”고 한다.) 

저자가 들고 있는 과학적인 신 모형에서도 그는 7,8번을 통해 “신은 모든 역사에서 직접 전달하는 방법으로 진실을 계시해왔다”거나 “신은 증거가 있다면 그를 받아들일 인간에게서 고의로 숨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도행전만 봐도 직접 받은 사람은 바울을 포함해 극소수이다. 

저자는 ‘숨지 않는다.’는 말을 “감각 기관으로 관측할 수 있다.”로 재정의하고 신이라는 존재를 나타나야만 하는 속박된 존재로 그리고 있다.

 

 

3장에서도 기도 등이 효험이 없다고 말하는데 (제목은 ‘물질 너머의 세계를 찾아서’지만 내용들은 기도가 효과가 없다거나 비물질 적인 영혼을 관측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 부분도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게 느껴진다. 

기독교에서 ‘기도’라는 게 효험이 없다는 내용이나, 영혼을 관측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신이 없다는 이야기와는 상관이 없다. 게다가 기도는 기본적으로 ‘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일’이기에 그것을 이루는 건 신의 자유다. 

성경에도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똑같이 잡힌 상황에서 야고보 사도는 순교했고(그의 죽음에는 어던 기적도 나오지 않고 2절 한절 만으로 "죽였다"고 말한다. 그 직후 같은 장 3절~19절을 보면 사도 베드로는 천사가 와서 기적적으로 풀려난다. 

초대교회가 베드로를 위해서만 기도하고 야고보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기적은 정형화된 법칙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기도가 이루어지는 건 기도하는 사람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은 여기에 대해 말 할 수 없다.

그리고 영혼의 측정 문제도 그렇다. 영혼이 물질적이거나, 측정 가능한 어떤 에너지가 아니라면 그것의 존재는 측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측정할 수 없었다.”고 결론 내린 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게 없다는 증거인가? 있다는 증거가 없는 건 사실이다. 없다는 증거는 다른 문제다.

과학 등 학문에서는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 가 기본 아닌가? 

 

 

4장과 5장은 저자의 전공 분야라서 그런지 얻을 정보도 많았다. 하지만 이 내용들로 신을 부정할 수 있을까? 

우주의 엔트로피와 최대 엔트로피 사이에서 질서를 위한 공간을 찾는 저자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저자는 여기서 플랑크 시간을 통해 우주가 무한하며, “‘무’란 불안정하기 때문에 무언가 있는 것”이라 하는데, 무신론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어째서 무란 불안정해야 하는가?”부터 해서 ‘그 우주가 저절로 탄생하는 원리는 어디서 왔는가?’까지, 소위 말하는 ‘과학적 무신론’에 필요한 핵심 주제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 전혀 답하고 있지 않았다.

(말돌리기로 보이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논증들이 근원까지 올라가면 순환논증이 되기 때문에 논증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근원적인 문제들이 여기에 해당하리라 생각한다.) 게다가 공간의 낭비나 ‘천지창조 6일’ 등은 창조기사의 기록 목적 등조차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창조기사 기록 목적에 대해서는 롱맨이 쓴 ‘창세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등의 작은 책들에도 잘 나와 있다. 아마 저자가 이 이야기를 쓴 이유는 이런 거 다 무시하는 ‘창조OO회’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그렇겠지만, 그 사람들이 증명도 부정도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 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우겨서 오류라면, 이 책은 반대로 그 존재를 관찰 안 되니 없다고 우겨서 문제다.) 

<XX회 라고 하니 일부러 숨기는 것처럼 보일 것 같은데 숨기려는 게 아니라 그들을 '과학'이라고 불러줌으로  "과학이 아닌 주제"를 다루면서 '과학'이라 말하는 그들의 주장을 과학으로 인정하는 듯한 찝찝함이 남아 'OO회' 라고 칭한다. ^^;;>

 

따라서 이 전에 읽은 ‘우주에는 신이 없다’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담은 좋은 책이지만, 핵심 오류는 마찬가지다.

 

가장 흥미로운 단원이었던 ‘실패한 계시’는 기독교인들을 설득하기 어려워 보인다.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 성취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건 자유다. 비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성취가 아니라고 보는 게 당연할 테니까. 그러나 그걸로 기독교인들을 비판할 수 있을까? 그 구절들을 성취로 믿기 때문에 신자가 된 것이고 이건 전제가 된다.

 

(그리고 오역인지 유대만을 대상으로 한 인구조사가 6~7세기에 있었다고 했는데 원문에는 6~7CE로 되어 있다. 이건 6~7세기가 아니라 공통시대 6~7년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주후 6~7년으로 통일한다.) 


예수님 탄생에 대한 저자의 비판도 다ㄹ뤄보자면주전 4년에 헤롯이 죽었으니 주후6~7년 호구조사랑은 상관없다는 주장은 수십 년 지난 자료이다. 당시의 교통수단을 보면 칼리굴라 황제 당시 유대 동상 건립을 제고해 달라는 총독의 상소문에 대한 답장, 편지 한 통이 로마에서 유대까지 가는데 3개월이나 걸렸다. [이 편지보다 나중에 출발한 '황제의 사망을 알리는 편지'는 앞선 편지보다 27일이나 먼저 도착했다. 웃어야 할까? ^^;;]

 

호구조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Gaul"지역에서 행해진 호구조사는 끝내는데 40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A.D 6,7년에 행해진 호구조사는 앞선 자료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으며,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정치구조'가 아니라 '예수의 탄생 자체'다. 그러므로 누가의 자료는 예수님이 B.C 5년 경에 태어났다는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다. (물론 언제 태어나셨는지 구체적인 날이나 연도는 알 수 없다.) -John Drane 저 Jesus and the four Gospels- 참고

* 일반적으로는 B.C 5년 보다는 B.C 3년 정도로 보는 편이 많으나 어차피 호구조사 기간을 알 수 없으니 그냥 넓은 범위로 5년 경을 주장하는 입장을 인용한다.  

 

 

십자가 부활 등에 대한 공격 역시 인신공격에 가깝다. 그는 십자가 고난에 대한 자료가 없다고 말하는데, 기독교를 부패한 사교라 하는 타키투스도 이 사교가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한 예수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타키투스 역시 후대의 인물이라 믿을 수 없다면, 세상에 인용 가능한 역사 기록이 얼마나 될까? 

사기의 은나라 가록은 발생과 저술시기가 900년에 가까운 격차를 가진다. (가까운 우리나라 예시를 들어보면 백제 무왕이 누구의 아들인가에 대해 기록마다 차이가 있고 우리나라의 자료들 대부분은 그 시대보다 수십에서 수백 년 뒤에 지어진 문헌들이다. 김부식만해도 삼국시대가 아닌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다. )

 그래서 역사를 다루는 사람 중에는 부활 등 기적은 안 믿어도 빌라도에 의해 처형된 예수의 실존까지는 문제 삼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 자료들은 빼는 게 좋지 않았을까? 


구약의 실패한 예언 성취도 장르별 특징이나 문학적 표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아모스서에서 하나님께서 ‘불을 보내 심판하실 것’이라 할 때 그게 하늘에서 불을 내리신다는 의미만을 가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의 존재를 입증하라면서 요구하는 유골 등은 오히려 부활 기록과는 어긋난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무덤을 찾는 방송에 나온 야고보 유골함이 거짓이라고 말해준 점은 고맙다. 그게 진실이었다면 성경이 거짓이 될 뻔 했으니.)

 여리고 정도만 흥미롭고, 나머지는 별로랄까? (그러나 여리고에 대한 이견들은 롱맨의 How To Read Exodus 등에도 나와 있다.)


 텔단 기념비는 인용하지 말았어야 했다. 일부 학자들이 위조라 주장하지만 아직 결론은 모른다. '에릭 클라인의 성서고고학'에 따르면 텔 단 비분을 위조라고 주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묵살되었다'고까지 이야기 하여 학계 주류는 텔 단 비문의 가치를 인정하는 쪽으로 본다고 한다.  (참고로 메사비문에도 다윗의 집으로 추정되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메사비문 내용은 빠져있다.) 저자의 이야기처럼 이 증거들이 대제국을 입증하진 않는다. 그러나 '다윗 왕조'자체에 대한 증거로는 가치가 있다.


더 설명하자면 성경 어디에도 다윗 왕국을 '대제국'이라 하지 않는다. <참고로 다윗 솔로몬 왕국의 국력과 비등할 것으로 보는 시대가 분열왕국 시대에 아모스 선지자가 "칼을 보내어 심판할 것"이라 저주하던 북왕국 이스라엘이다. 북왕국 하나 국력이 통일시대인 다윗과 비등, 혹은 그 이상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아마 오므리와 시기는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저자의 관점에서 여호와(야훼)를 섬기지 않고 폭력이 넘치던  오므리나 아합 시대, 

혹은 부강했으나 약자에 대한 핍박이 넘치던 여로보암 시대 등은 '악한 시대'일 뿐이다. 이게 일반 역사가와 성경 저자의 관점 차이다.>  


게다가  "성서 원본이 그 속에 묘사된 여러 사건이 일어난 시기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문서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비교적 신뢰할 만한 기억에 토대를 둔 것이다." 정도가 기독교인들의 입장이다. 따라서 성서의 내용을 전부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 가치가 신에게서 올까’ 와 ‘왜 악이 존재하는가?’ 단원은 날카롭지만 새롭진 않다. “인간 가치는 신에게서 오지 않는다.”는 주장은 수많은 철학자들이 해왔던 이야기의 반복에 지나지 않았고. 특정 종교인들이 남들보다 바른 생활을 하지 않는 점에 대한 비난은 사도 바울도 했던 이야기다.


(재미있는 건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도덕성이 차이가 없다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3대 종교 모두 범죄율이 비 종교인의 절반 이하 수준이다. 종교끼리 비교하면 신교와 불교는 대충 큰 차이가 없지만 비 종교인의 절반 수준이고  천주교는 그 종교인들의 절반 수준이다. 좀 더 정리하면 기독교와 불교는 같거나 오차 범위 안에서 기독교가 조금 낮다.<범죄 종류에 따라 다르다>) 이를 무신론 논증에 사용하는 건 무리가 아니었을까?

<위의 도덕성이나 범죄율은 무신론, 유신론 둘 다 입증하지 못한다.>

 

 

악의 문제야 중세 철학자들이 오랜시간 토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걸 공격하는 건 뭐든지 공격하고 보자는 생각으로밖에 안 보인다. 악이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견들만 봐도 그렇다. 이 문제는 신을 보는 날 해결 될 것이다. (아니면 그의 말처럼 죽은 뒤 ‘무’가 되어 보지 않는다 해도 해결된다.)

 

9장에서도 데이터와 일치하는 신의 모습 등을 만들어 놓고 공격하며, 데이터에 일치하지 않는 신, 아무런 관찰 불가능한 신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한다. 결국 개인이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건 자유지만 그의 주장이 기독교를 없앨 수는 없다.

(그가 했던 철학적, 신학적 반론들은 이미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들이고 해결할 수 없었던 질문들이지만[악의 문제 등] 그것이 무신론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종교인들이 신을 믿는 게 비합리적인 걸 몰라서 믿는 건 아닌 것처럼 신앙이 흔들릴 것도 없지만, 젊은 지구론을 믿거나 과학 질서가 신을 증명한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신앙이 흔들릴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방식의 신 증명이 잘못된 것임은 칸트도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책을 통해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그가 종교에 대해 던지는 질문들을 통해 새로운 점을 알게 되지도 않았다.

 

 (이미 과학으로는 신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게 철학이나 신학 공통의 입장이고<물론 증명할 수 있다고 하는 신자들이나 학자들이 있어서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오류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이 기독교를 대표하진 않는다.]>, 여리고 문제 등 그가 말하는 성서의 문제들은 구약학 등 신학에 관심이 있다면 다른 책에서 접할 수 있는 사항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뭔가 아쉽다.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책들은 세권 정도 있지만 선입관을 가질까봐 아직 한 권도 읽지 않았는데, 두 번째로 읽은 이 책에서도[도킨스는 빌려서 대충 봤으니 안 읽은 걸로 보고 뺏다.] 별다른 회의가 들지 않는 걸 보니 선입관은 안심해도 되겠다. (이미 선입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선입관을 바꾸는 게 이런 책의 목적이니 문제될 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신자들의 삶이 특별하지 않다거나, 젊은 지구론 주장자들이 이 정도까지 이상한 말을 많이 한다는 사실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그리고 이번 독서에서 얻은 건 이 이상은 아니었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조리 2019-07-13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킨스는 대충 봤으니 뺏다‘가 좀 석연치 않다

마루와다솜 2023-11-11 19:20   좋아요 0 | URL
여기서 ‘대충봤다‘는 말은 곁에 두고 여러번 참고하거나, 여러번 읽거나, 서평을 써서 정리하거나 하지 못한 경우 입니다. 이 책만 해도 이미 구매해서 여러번 읽었고(알라딘에상품 페이지 서평에서 ‘구매자‘로 나오는 거 확인 하실 수 있죠? ^^;;)

서평에서 보시는 것처럼 독서 중 뭔가 이상해서(위에 오역 지적 한 부분에 해당하는데, 데이비드 밀스 등 다른 무신론자도 예수님의 탄생 시기 불일치에 관해 ‘5세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원서를 구해 ‘공통시대(common era)‘를 잘못 번역한 것임까지 확인 했습니다. <원서 구매 확인 원하신다면 알라딘에서 구입했으니 100자평 써서 구매자 확인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킨스 책은 그렇지 못해 제가 확인 하거나 어떤 내용이 있었다고 말 할 수도 없고(지금 책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해서 ˝대충 본 도킨스 책은 뺀다˝고 한겁니다. 넣으면 이 책은 두 번째로 읽은 책이 아니라 세 번째로 읽은 책이 되는 겁니다.

도킨스 책에 대해 기억 나는 내용이 없어 이 책을 ‘세 번째로 읽은 무신론 책‘이라 하지 않고 ‘두번째로 읽은 무신론 책‘이라 한 건데 어떤 점에서 석연치 않으신가요? ^^;;;;

다시 정리해드리면 분명히 서평을 쓸 때 무신론 책은 도킨스 책 포함 3권 정도 보았지만, 도킨스 책은 아직 안 본 걸로 치고(기억이 안 나니까요), 이 책은 ‘우주에는 신이 없다‘ 다음으로 읽은 ‘두 번째로 읽은 책‘이 됩니다.

아~! 그리고 처음으로 읽은 데이비드 밀스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 서평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 생기면 좀 더 진지하게 다시 서평을 쓸 생각도 있습니다. 일단 처음으로 구입하는 무신론 책이라 기대 했는데 너무 크게 실망했거든요. (제가 도서 정가제 기간에 구입했는데 얼마 안 가 반값 할인까지 해서 더 억울했는지도 모르죠.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희망에 대하여
쇼펜하우어 / 하문사 / 1997년 7월
평점 :
품절


철학자가 말하는 사랑이지만 철학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주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을 말하는데,  세상을 무가치한 듯 바라보는 염세주의와 달리 여기서는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사랑은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한다." 고 말하거나, "우리의 삶 중에서 가장 시적이며 아름다운 삽화는 바로 사랑이다."라며 세상에 속한 '사랑'을 긍정한다.

 

에리히 프롬이 쓴 '사랑의 기술'이 철학 분위기가 나는 '심리학'이었다면, 이 책은 종종 '심리학 분위기가 나는 철학' 냄새를 풍긴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엄숙한 주제를 너무나 간단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사랑이  운명적으로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적극적이기보다는 수동적으로 사랑을 한다.  사랑을 위해 내가 먼저 무엇인가를 헌신하지  않아도 언제인가는 그 사랑이 저절로  다가올 거라는 환상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비극적이고 불행한  삶을 만들뿐이다. 사랑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과정 속에서 생성되지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능동적이다. 

"사랑을 만드는 지혜 5번

(이 책에는 이렇게 다른 책들에서 말하는 이야기와 유사한 말이 자주 등장한다.)

 

저자는 사랑이 형이상학적이면  절대적인데, 특히 남.여간의 사랑은 이성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18년이란 나이차이가 있다면 지금 처럼 사랑하기 어려울 거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공감하지 못할 사람들도 많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성을 사랑하는데 가장 중요한 걸로 '연령'을 꼽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1세기 경 로마 에서는 이런 나이 차가 먾이나는 연인도 꽤 있었다고 들었다.)

 

사랑이 성욕과 밀접하다는 주장은 심리학 서적에 많이 나오기 때문에 새로울 건 없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강력한 사랑의 힘에 대해 사랑을 '자기 존재의 회복'으로 보고,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혹한 형벌이자 축복"으로 보는 일은 철학적이다.

 

그러나  21번에서 분명히 말하는 것처럼,  저자는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의 꿈이나 환상과 달리 사랑의 최종 목적을 "후손을 낳는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저자는 책의 여러 부분에서 '인류 생존과 계승'을 사랑의 가장 큰 요소로 말하는데, 이 문제를 '연인에 대한 찬사'보다 앞에 두기 때문에, 철학이나 심리학이 아니라 '생물학' 느낌도 강하다. 

물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랑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첫번째 작업은 사랑의 진정한 주인은 지금 이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지맘 나중에 태어날 다름 세대라는 걸 인식하는 일이다."  고 하지만, 사랑의 목적을 후손으로 삼는 저자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들도 현대에는 많을 것이다.

 

사람이 자신에게 부족한 특질을 가진 가진 이성을 선택한다는 쇼펜하우어의 관찰이 심리학적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열렬한 사랑에 정열이 필요한 건 당연하다. 남자와 여성의 차이는 여러 심리학 서적에 나와 있는 내용이니 건너 뛰더라도 남을 내 방식대로 움직이기보다 나 자신의 삶을 보다 건전하게 발전시키라는 조언은 생각할 가치가 있다.

 제목은 희망에 대하여지만 이렇게 중매 결혼과 연애 결혼의 차이까지 제세히 다르는 이책은 차라리 '사랑에 대하여가 더 적당하지 않았을까?'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를 나 자신으로 보는 저자는 모든 선택과 책임도 '나에게 둔다.' 이런 독립성은

"독서에서 얻을 수 있는 사상은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고 해도 그대의 사색에서 우러나오는  지식보다는 못하다. "는 본문에도 잘 드러난다.

 

저자는 학문에 대해서도 '배움'보다 '   '발견과 창조'를 더 강조한다.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려는 '독서'보다 '자신의 사색'을 강조하여 말하는데, '철학'에선 어느정도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일반 학문에서는 내가 하려던 연구를 남들이 다 해놓은 경우가 있어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독서'의 반대쪽에 균형을 잡기 위한 추로 '사색'을 두는 건 건전하다.

 

 

(정리하다보니 앞부분 내용에 너무 집중해버렸다.ㅠㅠ)

 

제목은 '희망에 대하여'지만 사실 대부분 내용이 '사랑'에 대한 내용이고, '인생을 즐기기 위한 개인의 책임과 자유'처럼 인생론에 가까운 내용도 많이 있다. 설계하고 목표 했던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으니 현제와 미래에 더 집중하라거나 미래의 재앙을 두려워 하지 말라, 또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하는 말은 그저 그렇게 흘려보낼 수 있지만  '염세주의'라는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라 더 관심을 끈다.

 

'희망을 강조하는 염세주의자.'

사회가 심어준 생존 욕구에 속지 말라거나, "인간은 결국 혼자서 살 수밖에 없으니 타인에게 의지하려거나 타인의 시선에 의지하지 말라."고 외치는 본문은 그의 사색 찬미와 어울려 독립성을 잘 보여준다.

 

종교에 대해서도 '반 종교성'을 보이진 않는다. 다반 철학을 종교보다 위에 놓고 종교를 '필요악'으로 볼 뿐이다.

 

 사실 어떤 조언들은 심리학 서적들에서 이미 읽었고, 어떤 내용들은 진부 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얻을 것은 사랑에 대한 통찰들과 더불어, 사색을 통해 쇼팬하우어의 이 책에서 조차 독립할  수 있는    '자유' 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과학의 끝은 어디인가
리처드 모리스 / 동아출판사(두산) / 1992년 8월
평점 :
품절


물리학 공식이 아니라 현대 물리학이 성취한 부분과 각 이론들이 갖는 한계들을 자세히 다룬다. 과학과 비과학,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고 균형 잡힌 관점을 유지하기 때문에 과학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이론들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각 이론들의 특징과 한계들을 지적하는 한편, ‘과학의 영역’을 명확히 하여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즉, 과학의 한계를 비교적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책이었다.

 

  예를들면 저자는 “‘자연 법칙은 단순하다’는 명제가 많은 과학적 발전을 이루어왔지만, 그 생각 자체는 증명이나 반증이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가정이다.” 고 말하거나 “과학적 가설은 반드시 반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포퍼의 이야기처럼 과학이 아닌 부분을 명확히 나누기 때문에, 비록 그가 책 후반부에 끈 이론 처럼 ’물리학‘과 ’형이상학‘이 섞여 있는 듯 보이는 주제까지 다루고 있더라도, 철학이나 신학 등 비과학 분야에 속한 사람들이 보기에도 적당하다.

(당연히 저자는 많은 창조 신화들이 현대 물리학에 어떤 예고를 준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원시 혼돈으로부터 우주가 생성되었다는 개념이 오늘날에 와서 갑자기 재출현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라고 이야기 할 뿐이다.)

 

 

  만일 우주가 어떤 특별한 시각에 창조되었다고 상상하면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주가 만일 초기에 무한대 밀도의 특이점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어떤 특별한 초기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 법칙은 왜 그것이 그러한 상태에 있었고 다른 어떤 상태는 아닌가를 말해주지 않는다. 물리학 법칙은 단지 우주가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 것인지에 관해서만 말해 줄 뿐이다.

- ‘무로부터 나온 유’ 단원 중 -

 

 

  이렇게 철학이나 신학 등 다른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건전한 논의를 진행한다. 이 책을 쓸 때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을 초 끈(슈퍼 스트링) 이론 역시 다루고 있을 정도로 넓게 바라보며, 뮤온이나 타우소립자, 암흑물질, 코스모스처럼 비전공자들이 교양 수준에서 알아야 할 용어 정리도 잘되어 있는 편이다. ‘우주 끈’(초 끈이 아니다)이나 인플레이션 우주, 우주는 평탄한가? 등에 대한 논쟁들을 통해 현대 물리학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주제들을 잘 정리하는 한편, ‘우주의 끝은 어디인가?’ 처럼 과학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궁금해 할 만한 내용까지 친절하게 다루고 있다.

 

 

초끈이론이 말하는 10차원 개념은 흥미롭다. 하지만 섭동이론에 따른 근사치 추정처럼, 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공식 설명처럼 특정 공식 등을 설명하는데, 개념 설명과 달리, 이 책에서 어떤 공식을 이해할 수는 없다. (이 책 한권으로 공식까지 해결 할 수 있으려면 인류의 대부분은 물리학자들이 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지금도 이 책을 추천할 수 있을까? 세부 항목을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90년대 초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추천하기 어렵다. 이 책에서는 ‘중성미자가 실제로 질량을 갖는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하지만 90년대 말~2000년대 초 연구 결과에서는 중성미자에 질량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외에도 지금은 여러 발전된 이론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최신의 책을 읽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성미자의 질량을 발견하는 등 그 발전된 지식을 가진 과학자들이 과학이 아닌 영역(신의 존재 등)에 대해서 과학만으로 바라보고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데 반해, 이 책은 ‘과학이 아닌 분야’와 ‘거짓 과학’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는 몇 안 되는 책이라는 점에서 여러 발전된 지식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현대 서적들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신 존재’, ‘형이상학’ 같은 분야는 빅터 스텐저 등 몇몇 과학자가 말하는 것처럼 “우연성과 법칙성” 등을 갖고 풀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영역은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영역에 있기 때문에 ‘과학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오래되었지만, 맞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이 책이 오히려 지금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고 건전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변신 혜원세계문학 14
프란츠 카프카 지음 / 혜원출판사 / 1991년 10월
평점 :
품절


<반디앤루니스에 올린 서평입니다.>

 

<절대적인 존재와의 단절, 성>

   여기에 나오는 ‘성’은 가까이 있으나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는 존재에 대한 외경심.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모순으로 가득한 곳이다. 후반부에 주인공인 K가 뷔르겔 등으로부터 듣게 되는 ‘성’의 업무처리 방식은 주민들의 믿음과 달리 허술하고, 평범하거나 보통 수준도 안 되지만, 클람에 대한 프리다나 안주인의 경외심, 또는 소르티니에 대한 바르나바스 가정의 태도를 보건데 실제 그곳에서 벌어지는 우스운 일처리에 반해 , 성에 대한 주민들의 믿음은 존경을 넘어 경외에 가깝다. 그리고 서로 다른 대상이긴 하지만 ‘성’과 연관을 맺고 있는 모든 사람은 경외의 대상이 된다.

   마을 사람에게 절대적 권위의 대상이지만 비효율적이고, 마을에선 도저히 접근할 수 없으며, 마을과 소통하지도 않는 성. 그런 성의 분위기는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위엄을 가진다. 성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책 뒤의 해설은 성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들을 잘 나열하는데, 먼저 종교적인 입장에서 정리해볼 수 있다. 그의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도 신의 심판이나 원죄, 신과의 단절 등을 중심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 해석에 상당부분 동의 하지만 내 생각에 소설에 나타난 ‘성’이 절대적 신앙의 대상인 한편 정작 그 속에 가보면 별거 없는 곳으로 그려지는 걸로 보아, 그 속에 다른 해석들 역시 함께 고려할 수 있다.

 

중심 이야기를 해설에 따라 생각해보면, 카프카는 친구 브로트에게, 뒷이야기에 대해

 

‘주인공 K는 계속해서 성과 접촉하려고 애를 쓰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을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마을에 거주하겠다는 K의 요구는 인정되지 않지만, 어떤 부수적인 사정을 고려해서 이 곳 마을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것을 조검부로 허락한다.' 라는 성으로부터의 통지가 K가 임종하는 자리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고 한다.

   성은 임종하는 순간에서야 어떤 연결 고리가 생기지만, 살아서는 접근할 수 없는 근원적인 권위인 것이다. 그래서 ‘신과의 단절’에 포함할 수 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특정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비판하는 한편, 모순 속에 가려져 있는 다가갈 수 없는 절망을 말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성’이란 공통점을 갖지만, 구체적으로는 ‘클람’이나 ‘소르티니’처럼 다른 대상에 대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K나 주민들은 접근 할 수 없고 접근하려 한 사람들은 모두 상처를 받게 된다.

 

   이렇듯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경외심에 가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 속에서는 일처리 방식도 비효율적이고 권위와는 거리가 먼 이상한 공간이다. 주인공이 아무리 가까이 가려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의 모습과 역설적인 성의 내부는 다분히 종교성을 갖는다. 사람들의 종교적인 경외심과 실제 성 내부의 모습 사이의 괴리를 통해 종교의 모순을 말하는 한편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종교의 본질을 그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를 갖고서’, ‘기다리는 모습’은 8장에 나온 K의 생각처럼 ‘가장 무의미하고 절망적인 일’이 된다.

 

 

 

  그러나 그 속에 나타난 우스꽝스러운 성의 일처리 방식은 단순히 어떤 권위의 모순보다는 1908년 6월에 그가 일했던, 프라하의 노동자 재해 보험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희화화하진 않았을까? 거기서 그가 본 관료기구의 무자비성과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처우, 비참한 생활에 대한 비판으로 봐야 할 듯하다. (물론 관료기구도 어찌 보면 경외의 대상일 수 있다.)

 

  프로이트파의 정신 분석학적 입장에서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근거로 부친에 대한 콤플렉스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장편 <성>을 분석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근원적 대상을 종교가 아니라 아버지로 보는 시각인데, 접근할 수 없는 어떤 권위와 단절된 사람의 절망이라는 공통분모를 생각하면, 수용할 수 있는 해석이다. (여기서도 ‘아버지’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은 다른 해석들을 참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단절로 인해 성이 받는 괴로움은 전혀 없다. 그리고 성은 성 밖의 모두에게, 심지어 단절된 이들에게 조차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과 연관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람은 열심을 갖기도 하고, 성과의 단절이 성 밖의 다수를 선동하기도 하며, 종국에는 개인을 파멸시키거나 절망하게도 만든다. 성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과도 관계가 없으며, 그들을 흠모하는 이들과도 관계가 없는

 

 

성.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대상으로 인한 대상 바깥사람들의 절망’

 

 

 

  

<모습과 언어로 인한 단절: 변신>

  변신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보다 환상적이어야 하지만 ‘성’처럼 읽기 어려운 작품은 아니다. 다만 그 단절이 너무나 극적이어서 더 유명한지도 모르겠다. 벌레로 변한 인간. 점점 벌레의 모습에 적응해가지만 그레고르 자신은 여전히 인간으로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가 돌아다니는 일 조차도 거부하며,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그가 죽자 가족들은 아무 일 없이 일상을 계속한다. 그리고 경제적 버팀목이었던 그레고르의 빈자리는 다른 가족들이 대신한다. 그리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변신이 비현실적인 환상 문학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성’과 ‘변신’을 왜 묶어놓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절’이라는 공통분모는 있지만 변신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상 중에도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이 ‘변신’이 아니라 ‘질병’이나 ‘사고’ 같은 방법으로 나타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가족 중 한 사람이 언어적으로 단절되고 외모가 변하면 그 사람이 가족 구성원에서 단절되는 건 흔하다. 그리고 처음에는 불쌍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후에는 ‘살아있는 짐’이 된다. (벌레를 선택한 카프카의 선택은 탁월했다.) 그리고  ‘누이의 연주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유일한 오빠’였던 그레고르는 그 연주에 반응하지만, 오히려 냉담하던 손님들 앞에 나왔다는 이유로 다시 쫓겨나 죽음을 맞게 된다.

 

  ‘인간’이란 건 언어능력으로 결정될까 아니면 이성으로 결정될까. 그도 아니라면 감성인가? 소설은 죽은 그레고르의 빈자리가 다른 가족들에 의해 아무렇지 않게 채워지는 걸로 끝난다. 카프카가 바라본 현대의 인간에게 나면서부터 갖는 존엄 같은 건 없었다. 단지 그가 수행하는 기능만이 존재하며, 그 기능을 할 수 없을 때가 되면, 결국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른 부품들로 교체된다.

 

 

   책 자체를 평가하자면 혜원출판사 시리즈는 해설도 좋고 다 좋은데 편집방식은 별로라서 읽기에 조금 어려운 감이 있다. 그리고 이 두 작품에 ‘단절’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조금 다른 성격의 작품이기 때문에 카프카의 성과 변신을 모아놓은 이 책의 구성은 사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뛰어넘어 살아남은 ‘고전들’의 가치는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학의 몽상
이진경 / 푸른숲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수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자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