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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난 소설가 김영하. 책 끝의 ‘해설’에서, 김태한님은 이 책의 소설들에 대해, 삶과 현실 속에서 특별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걸 얻으려는 ‘열정적 인물’과 그걸 다른 걸로 대체해 특별한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냉소적 인물’로 나눈 뒤, 냉소주의적 시각을 심어주는 ‘자본주의의 확산’과, 이 냉소 때문에 인간적 가치에 대한 욕구가 더 커지는, 역설적인 대립으로 설명한다.
해설자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파괴하는 현실에 대한 공포,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냉소와 열정이란 틀을 이용해 여기 담긴 작품들을 해설하는데, 해설이 탁월하고 상당부분 동의하지만, 너무 큰 틀에서 바라보는 것 같아, ‘바라는 걸 잡을 수 없는 결핍’이라는 조금 작은 관점으로 정리해보려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작가인 ‘나’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가 결핍을 갖고 있다. 종교적인 열정을 따라, 사랑을 포기하고 신부가 되었지만, “사제관에 오면, 문득, 이 생이 이대로 끝난다는 생각이 목을 죄어오는 거야”라고 말하며, 결핍을 채우기 위해 다시 여대생과 사랑에 빠지는 바오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고 회계사가 되었으나 그 열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자신을 태워버린 정식, 이들은 열정을 이룰 수 없자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에 대해 더 큰 냉소에 빠져 다른 길을 찾기도 하고, 열정 때문에 지산을 파괴하기도 한다. 따라서 결국 남은 사람은 그들을 부러워할 어떤 그림자가 없었던 ‘나’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경과 함께 사는 모습을 상상하는 ‘나’에게 ‘새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렇게 ‘나’에게도 얻고자 하는 ‘그림자’가 생겼으며, 그에 대한 응답으로 ‘나’는 “운다.”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는 선에서의 그림자.
“에라이, 이 탈레반 같은 새끼야” ..(중략)..
그럼 아빠는 스스로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혹시 그 북부동맹인가 하는 아저씨들? [48p]
우리집 먹이사슬은 이렇다. 오빠는 아빠를 이긴다. 아빠는 엄마를 이긴다. 그런데 엄마는 오빠를 이긴다. 나는? 엄지공주다. 나는 너무 작기 때문에 누구도 나 따위를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싸움은 그 셋 사이에서 늘 벌어진다. [53p]
이렇듯 가정이 철저하게 돈과 성욕, 그리고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오빠가 돌아왔다.’에서도 오빠의 연인이 들어오자 어머니 역시 집으로 돌아오고 가족과의 관계는 회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두꺼비 모자에게 납치되었다가 딱 저만한 크기의 왕자를 만나 살림을 차린 엄지공주를 상상한다. 변화된 가정 어디에도 들어갈 수 없는 나는 “야옹아 하루만 기다려라 언니가 간다.”고 하며 끝까지 그 가정 속에서 결핍을 채우지 못한 채 남는다.
공동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던 진숙이 당당하게 돌아오자 당황하던 그들, 결국 그들 중 한명이 진숙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진숙 역시 결핍으로 자기 몸을 걸레처럼 취급했으나, 그 것이 남편에 의해 해결되자 새사람이 된다. 하지만 그걸 이룰 수 없자 살인을 저지른 중권(셋 중 유일하게 진숙에게 어떤 감정이 있던 걸로 보인다.) 등의 욕망과 그 좌절은 파멸에 가깝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고상한 개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일들이 더 인상적이다. 살인은 중권이 저질렀으나, 이미 마음속에서 진숙을 수도 없이 죽였던, 그들.
‘너를 사랑하고도’에는 인숙을 사랑하지만 거절당하는 수영강사, 인숙과 내연관계에 있었으며, 자기 정치적 결단과 신념을 펼쳐보기도 전에 모든 것이 짓이겨진 보좌관, 그 보좌관에게서 모욕 받고 버림받은 인숙, 그리고 인숙을 진심으로 걱정하지만, 수영강사와 인숙 사이에 있는 존재일 뿐이며, 결국 인숙에게서 무시당하는 영수가 나온다. 다시 말하면 ‘너를 사랑하고도’에 나오는 모두는 잡고자 하는 걸 잡지 못해 뭔가 결핍된 상황이다. 그리고 머릿속의 토르소, 그리고 그의 상상 속에서 벌어진 일들과, 그가 집어든 토익 책 사이의 괴리는 깊게 남는다.
다음 단편 ‘이사’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 속에서 오직 분명한 한 가지는 그가 전날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잠들게 된다는 것뿐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사라 불렀다” (155p)
이 말을 통해 어떤 의미를 던져주지만, 사실 이 내용을 “소중한 가치가 담긴 공간의 변화를 ‘편리’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 보는 해설도 그리 수긍이 가지 않아 여전히 모호하다.
‘마지막 손님’ 또한 그저 끈적끈적하게 가라앉은 무거움과 왠지 모를 침울함이 남지만 잘 모르겠다. 모든 게 묻혀버리는 건가?
정리하기 위해 책 읽기의 순서를 조금 바꾸는데, 마지막 손님 앞에 오는 ‘너의 의미’는 여기 나온 소설들 중 거의 유일하게 그런 결핍을 부분적으로나마 해결하는 모습이 보인다. 세상은 그 순수를 위해 조윤숙처럼 바보같이 달려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사랑이 필요하거나?
마지막을 장식하는 보물선에도 ‘충무공동상 폭파’라는 황당한 이상을 가진 형식과 이상 없이 현실에 물든 재만 사이의 거리가 보인다. 이상을 가진 사람들을 이용해 돈을 얻지만 결국 그 때문에 파멸하는 재만 역시 원하는 일을 이루지 못했으며, 재만과 그 일당에게 복수 아닌 복수를 하게 되고, 결국 충무공동상 폭파에 성공하는 형식 역시 바로 그 자리에 원형 그대로 재건된 충무공 동상을 바라볼 뿐 여전히 그의 목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 역시 결핍에 있다.
아니. 언제나 목표가 생기니 영원히 열정적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망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사실 이 소설에 대한 해설에서 “‘냉소주의자들’이 ‘헛된 열정과 믿음까지 이용할 수 있다.”고 하는 해설은 공감이 가지 않는다. 보물이 열정인걸까?
소설가 박범신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문학은 항상 부족함을 이야기 한다. 이 이야기들이 그리고 있는 결핍은 채우려다 파멸하기도 하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채워지지 않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짧고도 참혹한 이야기들은 현대인들이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결핍을 조금씩 보여주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