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양장) IVP 모던 클래식스 10
로날드 사이더 지음, 한화룡 옮김 / IVP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들어가며
본서의 저자인 로날드 사이더는 보수 기독교에서는 너무 앞서간다는 비판을, 진보진영에서는 교묘한 기득권 옹호 보수라는 식의 평가를 받는 것 같다.(자세하게 는 모른다.)그런 저자의 글은 사회학적으로는 부족할 지 모르나,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가 모두 동등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명작으로, 출간 당시 보수 개신교 진영에서 비판을 받음과 동시에 복음주의의 사회적 양심을 일깨워온 명작이다. 

 

그러므로 가장 성경적이며 올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음과 동시에 신앙과 삶이 괴리되어, 자신이 말한 것을 지키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 한국교회에 던져주는 의의가 큰 작품이다. 


책의 순서는 상황 설명, 성경이 말하는 내용, 문제의 원인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순서를 따른다.


저자는 민주적 정부와 시장 자본주의를 긍정하지만,  시장 경제가 주는 유익을 누릴 수 없는 자들도 있기 때문에 믿는 이들이 이런 시장 경제의 약점을 바로잡으려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외침은 단순한 구호에서 그치거나 지나치게 이상적인 목표만 모호하게 그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 혹은 가족이 적어도 품위 있는 삶을 살만한 돈을 벌고, 당당하게 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을 접할 수 있을 만큼은 균등한 경제적 기회를 갖기 원하신다.”는  구체적인 행동의 동기를 제시하고 이에 따라 논지를 전개한다. 때문에 그의 외침은 현대 교회에 전하는 울림이 크다.
     
[저자가 하려는 말]
  본서는 1부에서 굶주리는 이들, 가난한 국가들의 현황과 함께, 비슷한 성장을 기록한 두 나라가 보여주는 분배 결과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리고이어서 문맹, 의료, 에이즈 등 각종 질병의 사례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노력들이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들을 함께 제시하고, 부유한 나라들과 가난한 나라 사이에 놓인 격차를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이 내용 중 그 무엇보다, 미국뿐 아니라 우리 삶 속에도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부유함’ 혹은 ‘풍요’에 관한 환상, 혹은 구명보트의 윤리로 대표되는 가난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는 저자의 일침이 날카롭다. 
다만 약점이 있는데,  군비를 축소하면 가난이 개선될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 같은 경우 물론 이상적이지만,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들 정부가 군비를 확충하는 이유는 체제 유지, 또는 권력 독점에 있기 때문에 설령 모든 가난을 해결 할 수 있다 해도, 이 이야기만으로 집권자나 지배계층에서 자신의 권력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군비 축소 정책이나 부의 분배에 동참할 것 같지 않다. 게다가 북한 등 특정 국가들처럼 단순한 기부나 나눔 만으로 해결하는 게 현실적이지 않아 보이는 부분도 존재 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주장은 현실적이지 못하고 다분히 추상적이다.


그러나 풍요를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나누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는 데는 소극적인 사람이 많은, 그리고 많은 경우 실제로는 풍족한 성도들이 정작 자신들은 아직 풍족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지금 , 진정한 가난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눔을 실천하라는 저자의 주장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
     
앞서 가난한 이들이 처한 상황을 살핀 저자는 이어서 성경이 가난과 부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살핌으로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그리고 우리가 나눔에 열심을 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가난은 모든 가난이 아니라, (성경에 나온 여러 가난들 중 보편적으로 사용한) ‘재난’ 또는 ‘착취’로 인한 가난에 내용을 한정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게으름으로 인한 가난이나 지나친 도움으로 인한 ‘복지병’과 같은 문제를 제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억압받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으며, 이스라엘이 억압하는 자리에 올랐을 때는 그들을 구하셨던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치셨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무엇인가? (물론 저자는 하나님께서 부유한 자보다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며, 가난한 자들을 억압해 부유해지는 경우나, 부를 가난한 자들과 나누지 않는 경우에 한하여 벌하신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자본주의의 구조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돈을 빌려 시중에 실제 발행된 돈보다 많은 돈이 유통되고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내가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돈을 빌려 시중에 더 많은 돈이 돌고 있어야 한다. 이런 기본 구조를 생각할 때 우리가 가진 돈은 어떤 면에서 누군가 빚을 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독자가 억압자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부를 가지고 있다면 억압자에 대한 경고를 진지하게 생각할 가치가 있다.           

 또한 본서는 하나님의 뜻이 ‘가난을 줄이는 제도화된 구조’에 있다고 보는데, 구약의 희년이 갖는 바른 의미나, 일정 기간에 걸쳐서 필요한 경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돕는 신약 시대의 모범은 말씀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통해 이 구조가 하나님의 뜻임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다만 저자의 저술 목적이 사회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인지 몇몇 성경 인용에서, 특히 바울이 “재정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나타내는 일이 자신의 생명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고 해석하는 대목 등  성경 해석에서 바울이 담당했던 나눔이나 베풂에 대해한 강조가 복음 전파라는 다른 중요한 이유 보다도 앞서는 것처럼 그려지는 등 몇몇 해석에서 너무 나눔만을 강조한다는 느낌이 남는 게 조금 아쉽다. 이 책이 보수적 개신교 진영에서 비판을 받았던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탐심으로 재산을 모아 ‘재정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장로로 선출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치리를 가하는 것이 더 성격적이지 않느냐는 권고처럼 그저 일상적인 제도가 되어버린  교회 내의 여러 의식들에 대한 일침은 날카롭고 구체적이다. 게다가 많은 기독교 서적들이 욕심을 경계하다지만 결국 물질 보다 영성을 강조하는데서 그치거나, 자칫 금욕주의에 빠지기 쉬운데 비해, 본서는 부자가 “억눌린 자들을 위해 정의를 실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면 그 부를 인정하고, 이 부유한자들이 나눔에 좀 더 관심 갖도록 권유하기 모두가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국제적인 기아와 빈부격차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나눔을 말하고 나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 다룬 저자는, 사회 구조 속의 악을 말하는 6장을 통해 각 사회 속에 숨어 있는 불평등과 억압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6장은 해외 구호나 기부는 많이 하지만 종종 도덕적으로 부패했다는 비판을 듣거나, 주변 사회의 어려움에는 무관심 하다는 공격을 받는 한국 교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이전 장들이 각 그리스도인들 개인의 결단과 나눔, 혹은 어려운 국가들을 위한 도움에 집중하는 면이 있었다면, 사회악 부분에서는 개인들이 속한 사회 속에 숨어 있는 구조적인 악을 제거하는데 힘쓰라 권면한다. 우리가 사회적 죄에 대해 금식하고 기도하며 연구하라는 권유나, 사회 정의를 촉진하는 조직 가입 및 후원, 정계에 진출 등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과 유사하며, 성경적으로 실천할 경우 각 성도가 처한 세상 전 부분에서 뜨거운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몇몇 부분에서는 저자의 권유보다 더 지혜로운 행동이 필요해 보인다. 예를 들면 혁명기 프랑스의 최고가격 규제처럼 선의로 만들어진 정책이 결국 시장에 여러 가지 왜곡을 가져와 좋지 않은 결과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열정이나 나누려는 마음만으로 모든 걸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에 따른 작은 개혁들을 먼저 주도해나가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 
저자도 자신과 관련 있는 제도와 법률부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꾸어 가자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 할 것이다. 

저자는 재난이나 성경적이지 않은 세계관, 기술과 과학의 문제 등 빈곤의 이유들과 우리의 자세, 등 여러 문제들에 우리가 책임이 있음을 말하지만 그와 함께 경제 성장에서 시장을 긍정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문제점 지적에 그치는 여타 서적들과 달리 시장이 가져온 순기능을 일단 긍정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유거래는 사람들을 각자 비교우위에 있는 활동에 특화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성원이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레고리 맨큐,『맨큐의 경제학』, 5판, 교보문고:서울, 2009 p.74)

는 경제학의 비교우위 가정이 실은 절대 우위를 갖지 못한 나라의 빈곤층이 당하는 착취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물론 이 이야기를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자료를 통해 주장하기 때문에 넓은 시각과 깊은 생각에서 나온 통찰이 돋보인다.
              
 마지막 4부는 지금까지 다뤄온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제시한다. 비록 절약 방법은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더러 있지만, 성도에게 던지는 성경적인 헌금과 기부를 권유하고, ‘교회’에게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예배당을 넓히고 더 편한 신앙생활을 원하는 한국 교회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알게 해준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교회 헌금 비율이나 교회 재정은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 특히 가정 교회로 이루어진 회중의 예들처럼 세상의 욕심을 버린 뒤에도 큰일과 나눔을 이루어가는 교회들의 모습을 제시하고, 어려운 곳에서 선교사가 해야 할 일, 구체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기관 제시, 국가가 해야 할 원조 등 개인부터 단체 선택, 국가 정책까지 폭넓게 설명한 본서는 가치가 높다.            
  


[아쉬운 점과 나가는 말]

물론 이 책 역시 가난에 대한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 현안에 얽힌 복잡한 이익 관계들을 해결하는 데는 많은 점에서 부족하다. 
예를 들면 저자는 미국 정치인들이 '정의를 추구하는 외교정책'을 펼치도록 하는 방법으로 사회단체 등을 통한 압력을 제시한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의 이익 추구 등이 다수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분명히 정의롭지 않은 게 분명함에도 친 미국 성향의 독재자를 후원하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한 다른 나라의 자연 훼손을 묵인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인간의 이기심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까지 해결하기에 이 책의 외침은 너무나 힘이 없다.게다가 본서는 카이퍼의 ‘칼빈주의 강연’처럼 믿는 자들이 세상 각 영역에서 가져야 할 더 넓은 세계관을 제공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넓은 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 책은 성경이 제시하는 그 틀과 방향에 따르길 거부하거나, 짐을 지지 않으려 하는 신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에는 충분한 외침을 갖고 있으며, 이 외침은 이상적인 구호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현황이나 GPI 같은 통계적 대안은 물론 소비를 줄이는 대신 기부에 물질을 사용함으로 전체적인 수요가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점진적인 변화처럼 경제학적 근거와 대안까지 제시하는 등 폭 넓은 시각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권력과 돈을 추구하고 여기에 휘둘린다는 비판을 받는 한국교회가 깊이 생각해야할 바람직한 모습을 제시한 역작이라 생각한다. 
     
     
(제목에서 이야기 하듯이 이 책은 사회학이나 신학 책이 아니라 이런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질타이며, 방법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안내서라 봐야 한다. 


가레트 하딘은 ‘구명보트의 윤리‘라는 용어를 대중화 시켰고,... (중략) 그는 우리가 식량이나 원조의 형태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중략) 하딘은, 가난한 국가들이 가난한 대중의 운명을 개선하는 일에 집중하면 인구 성장을 아주 급속하게 줄일 수 있으며 또 줄여 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자료를 무시한다.(72~73쪽)

우리는 기본 수입에 대해서는 십일조(10퍼센트)를 드리고 그것을 초과하는 수입에 대해서 누진율을 적용한 십일조(15퍼센트 이상)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기본 수입에서 천 달러를 초과할 때마다 5퍼센트씩 더 헌금하기로 결정했다. (319쪽)

북미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10퍼센트가 누진 십일조를 드린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엄청난 돈을 쓸 수 있다. 그 돈은 어디에 가장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가? (중략) 여기에 몇가지 기준이 있다.

1.(중략)
2. 그 기금은 실제로 토작적인 사업을 후원하는가? 다시말하자면 (1)개발도상국에서 실시되는 사업의 지도자들과 대부분의 직원들은 자국민인가?
...(중략)...
7.그 프로그램은 가장 가난한 개발도상국에 살고 있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가?

(329~330쪽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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