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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의 저서로 이 땅의 수많은 지식인들의 사상의 은사가 되었던 리영희 선생이 작년 12월 지병으로 타계했다. 그 후 며칠 되지 않아 그의 평전이 나온 것을 보고, 법정스님 타계 후 나왔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행복>이라는 수준 이하의 책처럼 고인의 명성에 기대는 책이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하지만 김삼웅의 <리영희 평전>은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수백 편의 글들을 아우르며 자료를 준비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정리하고 평한 최초의 책으로, 결코 급조된 질낮은 책이 아니다. 사실 나는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리영희 선생의 삶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기껏해야 유명한 책들을 통해 약간씩 접했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며 현대사와 잔혹한 군사독재 시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새삼 반성하게 되었다.
리영희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소학교와 경성공립학교를 졸업했다. 일제 치하에서 가난과 억압을 겪으며 암울한 시절을 보냈지만, 학교와 하숙을 오가며 열심히 공부하고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의 명저들을 읽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은 후, 어려운 생활에 남대문시장에서 담배장사 등을 하며 간신히 삶을 이어 나가다가 학교의 교재를 살 돈도 없어서 서점에서 영어 교재를 훔치고 이를 오랫동안 괴로워하기도 한다. 보통 자서전이나 평전에서는 불미스러운 일은 슬그머니 감추기 마련인데, 그런 것도 빼지 않았다는 점에서 리영희 선생의 강직한 성품과 이 평전의 객관성을 엿볼 수 있다. 다른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생활고 때문에 학비가 전액 면제되는 국립해양대학 항해과를 졸업하고 나서, 중학교 영어교사로 취직한 그는 3개월도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지고 군에 연락장교로 자원입대하게 된다.
전투에 참여 중 동생 명희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에게 이 사건은 군대에서 겪은 갖가지 부패상과 함께 그의 마음가짐에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온다. '국가제도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회의하고 반문하고, 허위와 가식으로 가려진 이면의 진실을 밝혀내어, 진실 이외의 그 무엇에 대해서도 충성을 거부하려는 종교 같은 신념이 굳어가고 있었다고 한다.(p.115)' 이 고달픈 군인생활은 장장 7년이나 이어진다. 절대 부정이득을 취하지 않고 청렴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아버지의 회갑조차 치르지 못했다고 한다. 결혼하고 얼마 안있어 예편하게 되었지만, 합동통신 입사시험에 합격하여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가 언론사에 입문할 무렵은, 이승만이 영구 집권을 위해 온갖 음모와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때였다. 언론계에 그가 발을 들여놓은 것은 가히 운명이라 할 만하다. 영어와 일본어, 불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외신부로 발령을 받은 리영희는 베트남의 민족해방 투쟁과 중국공산당의 혁명전쟁,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 혁명투쟁 등의 외신 기사들을 접하며 전 인류를 투쟁으로 이끌어내는 변혁의 시대정신에 열정적으로 공감한다. 기자 생활 때도 역시 심한 궁핍을 겪으면서도 결코 기자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제는 부양해야 할 가족들까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번역 등의 부업을 항상 손에서 놓지 못했다. 정식으로 기자수업을 받은 적이 없지만 치열한 노력으로 극복해낸 그는, 이승만 정권의 포악상을 지켜보면서 국내 언론을 통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외신을 통해 하기 위하여 워싱턴포스트에 익명의 통신원으로서 기고하기도 한다.
4.19 혁명이 터지자 리영희는 펜을 놓고 서슴없이 시위대열에 몸을 던진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또는 시민으로서 4.19 혁명의 중심에 서서 '진리에 복무' 하였다. 결국 사태는 민중의 승리로 기울어 이승만이 하야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비겁한 지식인들과 기회주의적인 언론인들을 향한 추상같은 질타를 잊지 않는다. 이는 마치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는 '비판언론'이라는 미명으로 시퍼렇게 날을 세우다가 이명박 정권 들어 다시 용비어천가 합창단으로 변신한 수구보수언론의 행태를 내다본 것같이 느껴진다. 그 후 5.16 쿠데타가 발발하자 의기 넘치는 언론인 리영희는 군부독재와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언론계 역시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였지만 그는 진실을 밝히는 일이 언론의 본분이라고 굳게 믿었다. 살벌한 박정희 치하에서도 리영희는 계속하여 큰 특종들을 터뜨린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박정희 정권에 유착되지 않은 조선일보 외신부로 옮긴 그는 곧 필화사건에 휘말린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문제를 기사로 썼다는 이유로 반공법을 적용하여 구속한 것이다. 리영희는 박정희 때 두 번, 전두환, 노태우 때 각 한번씩, 군사독재 30년 동안 네 차례의 옥고를 치렀는데, 그때가 그의 첫번째 시련이었다.
그 뒤로 베트남 파병부대 시찰 거부를 빌미삼아 조선일보에서 퇴사를 종용당하고 리영희는 외판원으로 생계를 꾸리게 된다. 그는 한국인에게 한번도 피해를 끼친 적 없는 베트남인들을 죽이기 위해 왜 한국에서 수십만의 군대를 파병해야 하는지, 그 배경에 대해 묻는다. 미국이 베트남 폭격의 배경으로 삼은 통킹만사건 역시 미국 전쟁세력이 날조한 것임이 폭로되었고, 결국 베트남에서는 외세를 등에 업은 정권세력이 자주적인 민족주의세력에 패배하게 된다. 나 역시 왜 한국이 이해관계도 없는 베트남에 수많은 병력을 파병해서 살상행위를 해야 했는지, 왜 미국이 멋대로 벌인 전쟁에 다른 나라 국민들의 피를 흘려야 했는지 항상 의문을 품고 있었다. 6개월간의 외판원 생활은 그에게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텔리가 노동자가 되는 것은 혁명가적 신념과 결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230)' 이 부분을 읽으며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안락한 길을 버린 채 노동자의 편에 섰던 시몬느 베이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그는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복귀하여, 논객으로서 글을 쓰고 대사회 발언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리영희의 삶은 잠시도 평온하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논문들을 발표하고 탄탄한 논리와 예리한 투시력으로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글을 쓰고 있는 동안, 국내정세는 거꾸로 회전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3선 이후,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한 리영희는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와 함께 언론계에서 또 추방되고 만다. 그는 일련의 논문들을 1974년 한 권의 책으로 묶어서 펴냈는데, 그 유명한 <전환시대의 논리>로 그의 첫 번째 평론집이다. 이 책은 불온서적으로 지목되어 유통과 읽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노동자와 학생들은 몰래 구해다 읽곤 했다. 그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아 현대사를 연구하게 된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폭압과 야만이 판치고 '유신귀신'과 '우상'이 우글거리는 '동굴' 앞에 서게 되었다. 그에게는 한 자루의 펜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p.257)' 리영희는 1972년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로 강단에 서게 된다. 그는 박사학위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평론활동을 높이 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교수가 된 후에도 대학에서 강의만 하고 있지 않고, 집필과 사회참여를 계속한다. 그는 지식인이 사회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꺼린 채 사회로부터 자신의 이득만 챙기는 거은 올바른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믿었다.
독재체제가 강고해질수록 리영희의 저항도 따라서 더욱 치열해졌다. 앰네스티인터네셔널(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부 결성에 참여하고, 연달아 선포된 긴급조치로 유신독재의 광기가 사납게 몰아칠 때 각계의 인사 71명이 결성한 국민회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는 한양대에서 파면되었다. 하지만 많은 연구와 평론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두 번째 평론집 <우상과 이성>을 펴낸다. <우상과 이성>은 <전환시대의 논리>와 더불어 수많은 지식인, 노동자, 학생들에게 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 신념체계와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의식화의 교과서가 되어 우상 타파의 강고한 전선을 형성시켰다. 그로 인해 결국 리영희는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고,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당한다. 이때 신문을 맡은 D검사와의 대화는 아주 속이 시원할 정도다. 서울법대 출신의 검사를 통쾌하게 이겨 버리는 모습에 그의 내공(!)이 느껴진다. 그가 재판을 받을 때 일본 지식인들이 '문제를 삼은 글의 내용을 학문적 검토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해줄 것'을 요청할 만큼, 박정희 정권은 '비학문적'인 이유로 지식인들을 투옥한 것이다. 그는 겨울이면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감방에서 2년을 지낸다. 수감 중에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들은 그는, 감방 안에서 주어진 식사로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가 만기 출소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우상' 박정희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다.
출소한 후 리영희는 4년여 만에 다시 한양대학교로 복직하여 강단에 서게 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평소 거의 교제가 없었던 김대중과 엮이는 날조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다시 구속된다. 신군부가 5.17 쿠데타를 자행하면서 김대중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고, 그는 일종의 '제물'로서 엮여 들어간 것이다. 강제로 한양대 교수 사직서를 쓰게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광주폭동 배후조종 주모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갇혀 있을 무렵 광주에서는 '20세기의 마지막 비극'인, 광주항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의 잔인성을 목격한 시민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궐기한 것이다. 털어도 나오는 것이 없으니 두 달만에 그는 석방되었지만, 한양대 교수직에서 두번째로 해직되고 저술활동과 번역 등으로 생활을 꾸려가게 된다. 일제 말기의 친일군상과 일본 교과서 왜곡의 본질에 대해서도 쓰고, 한 시대를 지탱하고 지켜낸 양심적인 사람들과도 교감하며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혹독한 군부독재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자서전 집필 작업 중 '북괴 찬양선동죄'라는 황당무계한 죄목으로 또 끌려가게 되지만, 아무리 검토를 해봐도 기소할 빌미가 없으니 2개월 정도 수사 끝에 기소보류로 석방했다.
1984년 우여곡절 끝에 한양대에 복직한 리영희는, 크게 달라진 대학 풍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많은 글을 쓰고 책을 펴낸다. 일본의 문화침투를 경계하는 글을 쓰기도 하고,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과 베트남전에서의 미국의 부당한 역할을 비판하기도 한다. 일본 지식인들에게 초청을 받아 도쿄의 아시아문제연구소에서 공동연구와 강의를 하고, 독일의 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아내와 함께 독일을 방문하기도 한다. 다시 타오르는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1987년 6월 항쟁의 거센 불길이 타오르고, 수많은 학생, 노동자들이 투옥, 고문 등으로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는 리영희의 글을 읽고 '의식화'된 청년학도들의 힘이 컸다. 6월 항쟁으로 인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지만, 군부세력과 수구언론, 재벌기업, 관료층의 협력으로 전두환과 더불어 군부쿠데타를 주도했던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국민의 실망 속에서 대안언론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고 그때 태어난 신문이 한겨레신문이다. 리영희는 한겨레의 논설고문과 이사직을 맡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쓴 연구논문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로 그는 북한의 남침위기론이라는, 또 하나의 우상을 깨게 된다. 하지만 방북취재단 사건을 말미암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안기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된다. 수많은 단체가 항의 성명을 내고 석방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곳곳에서 전개되고 결국 6개월만에 석방되었지만 3대 정권에서 연이어 고초를 겪는 일은 보기 드문 현상이다. 정의와 진리를 추구했던 리영희와 그의 가족은 몇십 년 동안 결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 뒤로 독재체제가 끝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 하에서도 그는 수많은 연구와 집필을 계속하고, 기회주의적 지식인과 언론인을 통렬히 비판한다. 결혼 40년 만인 1994년이 되어서야 온수가 나오는 집에서 살 정도로, 그는 극히 청빈한 삶을 살았다. 1997년 내 시대는 끝났다며 '퇴장선언'을 했지만, 그는 펜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수구세력의 전쟁 부추기기, 국가 부도의 경제위기 등에 시대의 이성이 절필을 선언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숱한 옥고로 인하여 나빠진 건강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성은 녹슬지 않았다. 평론집 <반세기의 신화>를 펴내고 많은 집필활동을 하던 중 그는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지고야 만다. 오른손이 마비되었지만 불편한 몸으로 계속 글을 썼고, 정성스러운 아내의 간호로 건강이 점점 호전되었다. 2005년에는 대담을 통한 자서전인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랑>을 펴냈고, 많은 매체와 기관으로부터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노령의 리영희 부부에게는 앙코르와트에 가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는데, 건강 악화로 인해 그 꿈을 접게 되었고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이 책의 저자가 2010년 8월 마지막으로 리영희와 인터뷰할 때도 꼭 쾌차하셔서 앙코르와트에 다녀오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결국 가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뜬 것이 가슴아플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리영희의 평생 동안 지속된 우상과의 싸움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부독재 시절 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에도, 팔순이 넘어서도 수구세력이 판을 치고 미국의 노예나 다름없어진 이명박 정권을 규탄했던 그는 한시도 정의와 진리를 잊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많은 우상들을 격파하는 전사의 역할을 평생 동안 계속한 것이다. 기회주의자와 변절자들이 득실거리는 사회에서도 끝까지 청렴한 자세로 살아온 것 역시 존경해 마지않을 점이며, 그의 저서들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결코 시효가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고 이어져야 할 정신적, 학문적 자산인 것이다. 아마 지금의 대학생들은 리영희 선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책들이,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고 마침내 행동하게 하기를 나는 강하게 바라고 있다. 그는 타계하였지만, 그의 이성은 영원히 살 것이다. Veritas liberabit vos(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