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버지를 죽였다
마리오 사비누 지음, 임두빈 옮김 / 문학수첩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내가 아버지를 죽인 날은 그늘 한 점, 음영 하나 드리워지지 않은 어느 밝은 날이었다. 아니, 잿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브라질의 작가 마리오 사비누의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원제 O Dia em que Matei Meu Pai)>의 가장 첫 문장이다. 순간 이것을 보면서 나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라는 지극히 건조한 프랑스어 문장으로 시작하는,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L'Etranger)>을 떠올렸다. 꽤 담담한 주인공의 서술에서, 보통의 살인 사건과는 뭔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았다.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인 주인공이 심리상담가와 만나 자신의 삶을 털어놓는 설정으로, 이 책은 과감하고 치밀하게 인간의 내면을 탐구해나간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와 3부는 주인공이 말하는 부분이고 2부는 주인공이 쓴 소설이다.  

화자는 심리상담가와의 이야기에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것은 순간적인 살의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철저하게 망가뜨린 한 인간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대와 폭력을 경험했으며, 어머니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둘이 살게 되면서 그 학대는 더욱 심해졌고 심지어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자신을 계속 지배해왔다고 말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도 아버지가 돈을 많이 부쳐줄수록 자신이 증오스러운 아버지에게 생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분노의 근원이 되어 왔다고, 자신은 아버지가 돈을 지불하던 수많은 창녀들 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그는 회상한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자신의 아내와 밀통하고 임신까지 시켰다고 말한다. 또한 주인공에게 마치 젤리와 같은 색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어떤 선생님의 말 역시 꽤 의미심장하다. '젤리 색'은 마치 주인공처럼, 꽤 초현실적인 색상이 아닌가.

그런가 하면 주인공의 미완성 소설 <미래>는 꽤나 기괴하다. 이 '소설 속의 소설'에는, 주인공의 분신으로 보이는 안토니무, 바베큐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그의 친구 에미스티키오, 그리고 파르파렐로 신부가 등장한다. 에미스티키오의 레스토랑은 '이성에 대한 본능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로서, 만찬의 참석자들은 환각 상태에서 광란의 밤을 보내게 된다. 에미스티키오의 철학적 장광설은 지루하다기보다 꽤 흥미롭게 느껴졌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야기를 하며, 전 부인인 베르나데치가 당신도 이반 카라마조프처럼 얼른 끝을 내라고 말하는 부분은 참 의미심장하다. 이방인에 이어, 이제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전자가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드러냈다면, 후자는 결국 주인공이 저지를 행위를 나타낸다.  

또한 에미스티키오와 파르파렐로를 통해 나타난 선과 악의 이야기는, 이 책의 주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악의 화신인 그들을 두고, 아마도 그들은 '정신의 인간'들이며, 또 다른 길의 창시자들일지도 모른다고 안토니무는 생각한다. 악은 선과 평행선으로 달리는 또 하나의 길이며, 이 둘은 무한대에서 서로 만나게 되고 이 무한대는 바로 신을 뜻한다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 그리고 그들이 의식을 벌이는 장소인 레스토랑으로 안토니무를 유인한 것은, 안토니무 그 자신이 스스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를 '정신의 인간'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설적 도구들은, 곧 이 소설을 쓴 주인공의 살해 동기가 신적인 행위, 곧 초월자로서의 행위임을 주장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참 흥미로운 것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주인공의 말은 종종 번복되거나 왜곡되기도 한다. 심리상담가를 대하는 태도 역시 지극히 기만적이고 자기도취적이며, 심리상담가가 자신의 내면을 속속들이 들여봐주기를 원하는 나르시시즘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 그를 악마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포용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럼으로써 한 명의 아버지로 축복받을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였다는 주인공의 궤변 역시 인간의 심리 속에 자리잡은 나르시시즘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거의 반전과도 같은 부분이 등장하는데, 그가 아버지를 죽인 직후 미리 짜 놓은 시나리오대로 그가 고용한 사람들이 그를 붙잡고 눈에 염산을 뿌린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경찰에 전화를 해서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에 대한 오마쥬가 아닌가!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하는 행위는 보고 싶지 않은 진실로부터 도망치는 것, 또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를 의미한다. '누군가를 죽이고 자살하는 것은 모순이죠. 그런 류의 모든 자살은 벌 받기를 두려워하면서 자신의 죄를 속죄하려는 약한 자들의 것이죠. 반면 나는 참회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그 죄를 대면하면서 지내고 있는 겁니다.(p.187~188)' 

처음에는 이 책이 자극적인 소재의 추리소설인 줄 알았지만, 읽어나갈수록 종교와 철학, 문학 등의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인간의 내면에 대해 탐구하는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들이 굉장히 흥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까뮈의 <이방인>으로 시작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거쳐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로 끝나는 느낌이랄까. 특히 2부의 안토니무와 에미스티키오의 대화, 그리고 베르나데치와의 대화 부분은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다. 아무래도 나는 철학적인 장광설을 꽤나 좋아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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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안그림자 2011-03-15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 평론가 쪽으로 솜씨가 많이 엿보입니다^^ 해마다 신문사에서 공모해서 당선된 문학 평론작을 읽어 볼 때의 느김 같았습니다^^ 글도 잘 쓰시고, 책도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최근에 즐겨 찾기 서재로 등록시켜 놓고는 자주 들어 오 보지 못하지만, 시간이 생기는 대로 들어 오 볼려고 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을 보다가 무슨 내용인지 한 번 사서 읽어 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실천에 옮기지를 못했는데 책을 한권 사서 읽어 본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까, 텔레비젼에서 두번인가 방영해 준 적이 있었던 외화 Cell의 장면들이 떠 올랐습니다^^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어 버린 범죄자 주인공의 내면심리도 잘 들었고요, 결과를 더 정당화 시키는 법이 인정해 줄 수 없는 범죄자가 되어 버린 주인공이 열어 놓는 정신 이상 증세 같은 말들을 듣고 있으니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이런 범죄자한테 조금 적용되어지는 말인 것 같아... 세상이란?? 를 메달아 보게 만듭니다.이 소설의 작가도 어쩜,이런 사회의 모순적인 단면을 메아리라도 쳐 보고 싶어서 집필하지 않았나 추측을 조금 해 봅니다. 타인도 아닌 친부 아버지가 남도 아닌 자식한테 가혹행위를 오랜 시간동안 해 왔는지... 우리나라에서도 간간히, 부모님으로 부터 받아 왔던 가혹행위나 억눌린 분노의 한계로 부모님을 죽이는 살인적 행위들이 뉴스에나 신문에 업데이트 되어지는 것을 보더라도 남의 일이라 살인자라고만 매도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허구라는 소설이지만 주인공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고단했으면... 살인의 길을 선택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피해자의 고통과 한은 피해자의 몫이라고들 합니다^^ 일본인이 당한 어처구니 없는 지진의 피해적 현실을 보면 하늘만 올려다 보면서 느껴야만 할 고통과 눈물이 어떨할지... 생각하면서도 일본이 우리나라 조선에 가한 행동들을 되돌아 본다면... 피해자가 되어쟈야만 했던 조선의 백성들의 한과 슬픔은 이번 쓰나미가 몰고 온 바다 깊이보다 더 깊어 보일 뿐입니다^^ 남편을 죽이고 감옥에 갇혀서 사행 집행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어느 여죄수의 말이 문득 떠 오릅니다^^ 몸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이제야 안식을 찾는 것 같다고....김각적이고 깊이있는 글 자주 들어와서 열심히 읽어 보겠습니다. 기후 이상이 봄을 들락 날락 변덕스럽게 만들고 있네요^^ 또다시 꽃샘추위라고 하니 감기 조심하세요^^

교고쿠 2011-03-16 09:44   좋아요 0 | URL
앗, 과찬이십니다. ^^

책을 꽤나 좋아합니다. 글 실력이 잘 늘지 않아서 항상 초조해하고는 있지만, 한때는 작가 지망생이었던 적도 있습니다.(그 꿈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보잘것없는 글들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의안그림자 2011-03-17 0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 그 꿈을 향해 달려 갈 수 있다는 현실이 그래도 사람을 살아 가게 만들어 주는 에너지가 되어 주는 것 같애요^^ 어제 저녘 7번 채널에서 방송해주었던 뉴스 추적 60분을 보았습니다. 일본인들이 안고 가야만 될 지진의 현실을 보니 한국에 태어났다는 것이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들고 때 아니기에 운명과 고통의 현실에 처한 일본인들을 보고 있으니까... 똑 같은 사람이란 심정에서 마음이 편하지를 않았습니다^^ 좋든, 싫든, 의지를 벗어나서 선택받아야 하고, 선택 당해져야 되는 것이 운명인가 싶습니다^^ 오늘 하루 나한테는 즐거움과 행복의 시간이 되어 주고 있는 그 타이밍이 또 어느 누구한테는 불행과 생사의 갈림 길을 오고 가는 시간이 되어 주고 있을 테니까요^^ 꿈 이루길 화이팅 해 드립니다^^

교고쿠 2011-03-17 11:12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일본에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고향같은...
어제 일본 이재민들에게 식수, 담요 등의 키트를 제공하는 모 구호단체에 작게나마 후원을 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자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꼭 신춘문예 등으로 등단하지 않더라도,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