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대해: 

  The difference is this: In space, a straight line describes the shortest distance between two points. In spacetime, by contrast, a straight path yields the longest elapsed time between two events. It's that flip from shortest distance to longest time that distinguishes time from space. (p. 145)


위에 더해 저자가 강조하는 오개념이 있다. 첫 번째, 시간이 천천히(또는 빨리) 흐른다는 얘기. 운동하는 물체, 사람에게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고 종종 얘기하는데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무엇의 속도는 단위시간당 변위로 정의되는데, 시간의 '속도'는 어떻게 정의하느냐, 시간을 시간으로 나눈 것이냐고 저자는 묻는다. 시간은 그냥 진행한다. 그 결과를 비교했을 때 차이가 나는 것일 뿐이다. 약간 미묘한 얘기이다. "You will sometimes hear that time can speed up or slow down according to the theory of relativity. That's a baloney. Or to be more polite about it, it's a misleading way to describe a real phenomenon. (p. 148)"


두 번째, 특수상대성이론은 등속운동을 하는 물체에만 성립한다는 얘기. 저자는 특수상대성이론이 평평한 4차원 시공간인 민코프스키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룬다고 강조한다. 등속운동이든 가속운동이든 상관없다. 반면, 일반상대성이론은 질량에 의해 시공간이 휘어지는 경우까지 다루는 것이다. "Sometimes people will suggest that special relativity works only for unaccelerated trajectories, and you need general relativity to handle acceleration. Rubbish. General relativity becomes important when spacetime is curved and we have gravity. As long as spacetime is flat--which it is in Minkowski spacetime, which we're sticking to in this chapter--special relativity applies, and you can consider any paths you like. (p. 153)"


"baloney", "rubbish" 등 저자의 표현이 강하고 재미있어서 기록해둔다. baloney, rubbish 모두 '헛소리',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의미이다. 


다음은 특수상대성이론이 주는 동시성의 의미이다. 


The nearest star to our sun, Proxima Centauri, is approximately four light-years away. For any particular event on Earth, there is an eight-year span of events on Proxima Centauri that could count as "simultaneous" with it, depending on your reference frame. (p. 166)


한 마디로, 기준틀에 따라서 "동시"라고 할 수 있는 사건들이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동시성은 의미가 없다, 혹은 모두가 동의하는 "동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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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서 물체에 작용하는 힘에 의한 운동을 다루는 분야를 역학(力學, mechanics)이라고 부른다. 특히 운동을 강조할 때는 동역학(dynamics)이라고 한다. 역학에서 물체의 운동을 이해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다. 첫 번째는 잘 알려진 뉴턴의 운동법칙(F = ma)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초기조건(물체의 위치와 속도)의 정보를 가지고 뉴턴의 운동법칙이 주는 미분방정식을 이용하여 매 순간의 이동을 더해(즉, 적분하여) 물체의 운동을 이해한다. 


또 다른 방법은 '최소작용의 원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작용(action)'은 운동에너지에서 퍼텐셜에너지를 뺀 양을 시간에 대해 적분한 값이다. 최소작용의 원리는 한 점에서 다른 한 점까지 물체가 이동할 때 이렇게 정의된 작용이 최소화된 경로를 따라간다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이렇게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정의된 두 방법이 동일한 결과를 준다는 것이다. 그럼 둘 중 어느 것이 맞다고 할 수 있나?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우월하다고 얘기할 수 있나?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So which is right? Does nature really start with some initial state and chug forward from moment to moment, as Laplace would have us believe? Or does nature have some kind of precognition, where it can visualize all the possible motion it might undertake between some initial point and some final point, and choose to move along the one that minimizes the action?

  Neither one. Nature just is nature, and it does what it does. We human beings do our best to understand it on our own terms. It might turn out that we discover different equivalent ways to conceptualize the same underlying behavior. In those cases, it's less important to fret over which one is "right" than to be ready to think in whatever terms offer the most insight into the situation at hand. (pp. 87-88)


"그럼 어느 방법이 맞는가? 자연은 정말 어떤 초기 상태에서 출발하여 매순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라플라스가 주장했듯 말이다. 아니면 자연에게는 일종의 사전인지가 있는 것일까? 그래서 초기점과 최종점 사이에 가능한 모든 경로를 시각화해서 작용을 최소화하는 경로를 따라 운동하기를 선택하는 것일까?

  어느 것도 아니다. 자연은 그냥 자연일 뿐이고 그저 할 바를 할 따름이다. 우리 인간들은 그저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자연을 이해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동일한 자연의 모습을 개념화하는 상이하지만 등가인 방식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어느 쪽이 '맞는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당면한 상황에 대해 가장 많은 통찰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경우 캐럴은 기대보다 훨씬 너그러운(진보적인?) 의견을 피력한다. 그의 말은 장하석 교수의 과학적 다원주의를 긍정한다. 다른 경우에서도 그럴까? 물리학이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낸 '모델'일 뿐이라는 점에 그는 동의할까? 어찌 보면 당연히 그럴 것 같은데, (캐럴을 포함한) 주류 이론물리학자들의 말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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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드 창은 최소작용의 원리에 기반하여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단편소설을 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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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의 아메리카 탐문 - 피터 틸, 일론 머스크, 알렉스 카프, J.D. 밴스, 이들은 미국을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 뉴 노멀 탐문 1
이병한 지음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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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책을 쓰기 전에, 분석하는 인물--피터 틸, 일론 머스크, 알렉스 카프, J.D. 밴스--가 되기 위해 그들에게 맞는 음악을 들으며 "빙의"를 했다는 저자. 재미있게 잘 읽힌다는 평도 있지만 내게는 맞지 않는다. 여기저기 문제적 발언이 튀어나온다. 예컨대 이렇다: [미국과 달리] "우리에게는 새로운 담론이 부재하다... 이번에는 내란 청산까지, 다시금 종식과 청산이 화두가 되고 말았다." 자유롭게 글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이 널을 뛰며 저자의 의도 파악이 힘들다. 전반적 분위기는 트럼프의 새로운 미국 찬양이다. 비꼬는 건가 싶은데 읽다 보면 또 그건 아니다. "적어도 저들에게는 AI혁명이 촉발하는 디지털 신문명의 운영체계(OS)와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사람과 사상과 철학이 있다. 아직은 진행형, 비록 완성되지는 못했을망정 문제의식만큼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라는데 학술적 글쓰기는 결코 아니다. 내가 기대했던 바가 아니어서 박한 평가를 내린다. (인용문은 모두 '머리말'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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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01-09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란 종식과 청산 말고 어떤 새로운 담론을 말하는 걸까요?🤔 미국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미국은 달랐을까 갑자기 궁금해 집니다😂

blueyonder 2026-01-09 19:19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저자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때때로 잘 모르겠더라고요. 민주주의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란 얘긴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The favorite spherical cow in all of physics--the most important simple, exactly solvable physical system of amazingly wide-ranging applicability--is the simple harmonic oscillator. (pp. 67-68)


물리와 공학에서 대부분의 진동 운동은 단순 조화 진동자simple harmonic oscillator를 이용하여 설명한다. 단순 조화 진동자의 예는 용수철에 매달려 있는 물체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 용수철에 매달린 물체는 잡아당겼다가 놓으면 위아래(수평면에 놓여 있다면 좌우)로 진동한다. 물론 언젠가는 '마찰'로 인해 멈춘다. 하지만 단순 조화 진동자의 운동에서는 '마찰이 없다'고 가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물리가 사랑하는 '공모양 젖소'의 중요한 예가 된다. 


단순 조화 진동자의 개념은 역학 문제를 넘어서서 교류 회로, 전자기파의 이해 등에도 핵심적으로 사용된다. 물리학에서는 정말 널리 쓰이는 중요한 '공모양 젖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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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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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ysics is made possible by the fact that the world exhibits a certain amount of continuity and predictability." (Sean Carroll, <The Biggest Ideas in the Universe: Space, Time, and Motion>, p. 29)


"자연 현상에는 어느 정도의 연속성과 예측성이 있어서 물리학이 가능한 것이다." 


여기 한 생명체가 있다. 인간은 이를 ‘바다’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한 행성을 거의 모두 덮고 있다. 하지만 이 ‘바다’는 생명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특성을 보인다. 자신이 위치하는 행성, ‘솔라리스’의 궤도 운동을 통제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솔라리스 행성은 쌍성계—태양이 두 개—에 속해 있어서 궤도운동이 매우 불안정할 수밖에 없지만, 이 ‘바다’는 인간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조종해서 안정된 궤도를 유지하게 한다. 이런 생명체를 상상할 수 있는가. 이 행성을 방문한 인류에게 이 바다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존재이다.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 바다와 소통하려고 인류는 다양한 실험을 한다. 하지만 수행하는 실험마다 바다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반복성, 예측성이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이론을 만들기가 매우, 매우 어렵다. 심지어 구성 물질조차 제대로 이해가 안 된다. 이 대상은 인간에게 적대적인가? 아니다. 적대적이 아닌가? 알 수 없다. 이러한 대상 앞에서 느끼는 인류의 무력함과 당혹감. 이것이 이 소설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스타니스와프 렘을 처음 읽었다. 왜 이제 읽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조지 클루니가 나오는 동명의 영화(2002년 작)를 지루하게 봤던 기억이 있다. 그것 때문에 이 책을 들여다볼 생각을 안 했던 듯싶은데, 지금 소설을 읽어보니 그 영화는 소설의 주제를 매우 매우 일부 다뤘다. 그동안 안 읽었던 것이 후회될 정도로 소설을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이 1961년 발표됐다고 한다. 스타니스와프 렘. 대단한 상상력을 지난 작가이다. 렘의 다른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폴란드어 원서를 번역했다는 역자의 말이 책 앞의 일러두기에 나오는데, 번역도 매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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