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이야기이다. 20세기 초 근대화 과정을 거치는 일본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미야자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라는데, 그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어른들을 위한 영화이다. 감독 본인을 위한 작품일 수도 있겠다. 전쟁을 싫어하면서도 비행기를 좋아한다는 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은 실존인물인 비행기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1]인데, 러브 스토리 부분은 호리 타츠오[2]가 쓴 동명의 소설 '바람이 분다'에서 가져왔다고 한다[3]. 


여러 복잡다기한 메시지가 숨어 있는데, 역시 핵심은 꿈을 좇는 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비행기를 사랑하지만 비행기가 전쟁 무기로 쓰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반전의 메시지도 숨어 있다. 국내에서는 일본 침략무기의 대표인 '제로센' 전투기를 미화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우익들로부터 반전 메시지 때문에 비판 받았다고 한다.


호리코시 지로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로서 이탈리아의 비행기 설계자인 카프로니 백작이라는 실존인물이 나온다. 미야자키 감독의 회사명인 Studio Ghibli의 Ghibli는 카프로니의 비행기 이름 중 하나라고 한다. 비행기에 대한 영화라 그런지 바람 부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불어오는 바람은 주인공의 비행기에 대한 꿈을 나타내는 동시에 인생의 우연성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더불어, 잡을 수 없는 행복, 격동의 시대 등등, 이 외에도 여러 의미를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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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돼지 님의 글을 보고 벼르다가 드디어 넷플릭스에서 봤음을 밝힌다.

[1] 호리코시 지로堀越二郎(1903~1982), 일본의 비행기 설계자. '제로센'의 설계자로 알려져 있다.

[2] 호리 타츠오堀辰雄(1904~1953), 일본의 소설가.

[3]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로 번역되는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의 시구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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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3 2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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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제662호 : 2020.05.26
시사IN 편집국 지음 / 참언론(잡지)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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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662호에는 이천 냉동 물류창고 화재에서 희생된 안타까운 이의 사연이 머리 기사로 실려있다. 일간 뉴스에서 그저 또 하나의 사건 사고로 넘기던 일을, 이렇게 개인의 사연을 통해 접하니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기사 다른 어디서도 접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사회가 매우 다기해지면서, 누구의 죄라고 100%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점점 늘어간다. 불교에서도, 이제 살생의 업을 누가 지는지가 불분명하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예전에는 짐승과 그 짐승을 죽여서 먹는 사람 간의 죄와 업이 분명했지만, 지금은 도살하는 사람과 먹는 사람이 다르다. 우리는 도살장의 잔인함에 애써 눈을 감고 상 위에 차려진 고기를 맛있게 먹는다. 


이번 냉동 물류창고 화재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 공사 발주처와 시행사가 직접적인 책임을 지겠지만, 이러한 냉동 물류창고에 저장되는 상품을 사는 우리 사회 구성원은 죄는 없는 것인가? 싼 것만을 찾는 우리들로 인해 사람의 목숨이 희생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아닌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주변을 돌아볼 여유, 당연히 생각했던 것들의 가치를 더욱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돈이 중요하지만, 돈만 중요하지 않다는 것,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며, 아깝게 목숨을 잃은 이들의 명복을 빈다.


그 외의 기사에서도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잘 알 수 있다. 다음은 다른 기사들의 제목 중 몇몇이다: 

- 팬데믹의 '약속된 출구' 면역에 대한 모든 것

- 선거 조작론에 보수 간 정면충돌만

- 봉쇄 풀린 프랑스의 불안한 일상

- 헛다리 짚는 CIA의 평양 분석


실려있는 또 다른 많은 기사가 내게 유익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기자가 기더기라 불리는 현실 속에서, 의미 있는 기사들을 실어낸 <시사인>에게 다시금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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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 in European History (Paperback)
Howard, Michael / Oxford Univ Pr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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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내 전쟁 양상의 변화를 통해 살펴보는 유럽 역사이다. 유럽 역사를 잘 모르는 나도 나름 재미 있게 읽었다. 얇은 책 안에 핵심이 잘 담겨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내공을 엿볼 수 있다. 초판은 냉전이 한참일 1976년에 발행되었는데, 2009년 재발행되며 에필로그에 '테러와의 전쟁' 내용까지 추가되었다. 


유럽이라는 좁은 지역에서 여러 말을 쓰는 사람들이 지지고 볶고 살다 보니 이들이 전쟁에 능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중앙집권적이고 비교적 나라 사이에 경계가 명확했던 동아시아의 상황과는 대비가 되는 듯 싶다[1]. 근세 들어오며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된 것에 지리적인 요인이 크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나름 이해가 된다. 


결국 유럽에서의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핵무장과 함께 끝이 났는데, 핵보유 국가간의 전쟁은 너무 위험하므로 쉽사리 분쟁을 일으키기 어렵다는 측면이 핵무기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대신 전쟁은 약소국을 전장 삼아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역사도 연결이 된다.


동아시아의 역사도 이런 식으로 정리해서 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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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아시아에서 일본만이 유럽의 중세와 진정 비슷했다는 말이 있는데, 일본의 호전성을 유럽과의 유사성을 통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To suggest, as have some historians, that the frenetic and militaristic nationalism of the early twentieth century was caused by a reactionary ruling class successfully indoctrinating the masses in order to wean their support away from revolution and attract them to the established order is crudely mechanistic. It was in fact the most reactionary elements in the ruling class which mistrusted nationalism the most. The ideas of Hegel and Mazzini had a value and an appeal of their own, and democracy and nationalism fed one another. The greater the sense of participation in the affairs of the State, the more was the State seen as the embodiment of these unique and higher value system which called it into being, and the greater became the commitment to protect and serve it. Moreover, the Nation appeared as a focus of popular loyalty at a time when the power of organized religion was ebbing. It provided purpose, colour, excitement, and dignity to peoples who had outgrown the age of miracles and had not yet entered that of pop stars. But the Nation could only measure its worth and power against other Nations. However peaceful its purposes and lofty its ideals it became increasingly difficult to avoid the conclusion—and a growing number of thinkers at the turn of the century were making no attempt to avoid it—that its highest destiny was War. (pp. 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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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다시 비가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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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다 - 138억 년 전 빅뱅에서 시작된 별과 인간의 경이로운 여정 서가명강 시리즈 9
윤성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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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별에서 왔다” 이 문구만큼 우주에서 인간 존재의 의의에 대해 잘 요약해 주는 말은 없는 것 같다. 항성의 진화를 연구하는 천문학자인 저자는 본인의 전공을 잘 살려, 우리가 알게 된 우주의 모습과 우주 속 인간의 의미에 대해 조근조근 설명한다. 늘 그렇듯 고대의 천동설부터 시작하지만, 우리가 현재의 우주관을 가지게 된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해 주어 재미있게 읽었다. 이런 주제의 책은 많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좋은 책 중의 하나인 것 같다. 현대 우주론에 대한 매우 좋은 소개로 추천한다. 


저자가 그리는 현대 우주의 모습은 과거 인간이 이성만으로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다. 인간이 그렸던 우주의 모습은 정적이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번다한 세속과는 거리가 먼 천상... 하지만 과학은 우리 우주가 대폭발을 통해 탄생하여 진화하고 있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끔찍한’ 모습임을 알려준다[1]. 이러한 현대 우주론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주에는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현대 우주론은 우리가 우주 존재의 95%를 모른다고 알려준다(암흑 에너지 + 암흑 물질의 비율).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은 우주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전체 에너지의 5%가 채 안 된다.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 것이고, 우주는 앞으로 또 어떻게 인간의 기대를 배반할까. 


저자가 역사와 진화를 얘기하며 우연성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인상 깊다. 우리가 여기 이 자리, 이 시간에 존재하는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다. 만약 우주 초기의 양자 요동이 조금만 달랐다면 지금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주 전체로 볼 때, 조금 다른 양자 요동으로 인해 우리가 지금 여기 없더라도, 우주의 어디에선가는 지적인 생명체가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우주는 충분히 넓고 우주의 나이는 충분히 길다. 이러한 우주의 조건을 생각할 때 결국 무작위성 속에도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우주는 어떤 방향을 향해 진화한다[2]. 우연과 필연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연성에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종종 어떤 일(특히 사랑?)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필연, 운명, 영원 등의 말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연에 의해 탄생한 지구에서, 우주 전체로 보면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들 자체가 기적 아닌가? 필연보다는 우연이 지금 우리에게 더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아닌가? 우연성을 통해 우리가 이 땅에서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또는 개인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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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끔찍함’의 기준은 물론 개인적 취향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상이 끔찍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여기서 ‘끔찍함’은 당시의 학자들에게 그랬다는 것이다. 특히, 아인슈타인은 본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정적인 우주가 아니라 동적인 우주를 예측하자 ‘끔찍’하다고 여겨 우주상수를 추가하여 이론을 수정하고자 했다. 

[2] 이 방향성에 목적이 있는지는 개인이 판단할 일이다. 목적성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 호일은 빅뱅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결코 직접적인 관측을 통해 검증할 수 없는 판타지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앞에서 콩트가 별의 구성에 관해 언급한 사례에서 지적했듯, 어떤 과학적 이론을 "절대 검증하기 어렵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현명하다. 역사적으로 그런 식의 발언은 대부분 반박되어왔기 때문이다. (129~13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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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4-19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연보다 우연이라는 말씀에 크게 공감합니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요...

blueyonder 2020-04-19 20:55   좋아요 0 | URL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