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ay the Universe Changed: How Galileo's Telescope Changed The Truth and Other Events in History That Dramatically Altered Our Understanding of the (Paperback, Rei Sub)
Back Bay Books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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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인 10장을 읽기 전에는 몇몇 부정확한 과학적 사실들로 인해 별 4개를 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10장의 마지막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별 3개로 생각이 바뀌었다. 10장에서 저자는 본인의 과학철학을 피력하는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신화나 과학이 별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상대주의이다. 


과학의 모든 활동에서 이론이 전제된다는 것은 맞는데, A라는 이론과 B라는 이론을 인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자연이라는 제약이 있다. 우주에서 관찰되는 지구가 둥그런 것을 보고서도 지구가 네모나다고 전제하는 이론을 펼칠 수는 없다. 


중세에서 근세로 오면서 어떻게 유럽이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는지에 대한 문화사적, 과학사적 이야기는 나름 재미있게 읽었지만 저자의 극단적 상대주의 과학론에 동의하기는 힘들다. 과학사 책으로는 나름 괜찮지만 과학철학 책으로는 별로이다. 저자가 다루는 '구조'(세계관)에 대해 좀 더 합리적 의견을 제시하는 과학철학 책으로 <당신 지식의 한계 세계관>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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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살펴본 모든 내용을 정리하며 버크의 과학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는 마지막 장(10장 '끝없는 세계들')을 읽고 있다. 버크는 과학적 데이터의 해석 뿐만 아니라 무엇을 관찰(측정)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학 실험과 도구의 설계 자체를 규정하는 '구조(structure)'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서 '구조'란 세계관이라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본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문단 앞의 두 문장도 함께 인용한다.)


... 투시 기하학은 무형 물질계의 상호 작용을 측정하려는 신학적 규칙에 도전했다. 19세기의 기하학은 역사에 대한 성서적 기록을 제거했다.

  대부분의 경우 각 구조는 과학계 자체와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 의해 발생된다. 흔히 변화에 대한 압력은 학계의 외부로부터 온다. 그러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최초의 우주 구조는 다른 구조적 작업 안의 전체적인 실재 형태를 자리 잡게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에는 이것들이 연구의 영역을 규정한다. 그 뒤 이런 연구 영역은, 전체 구조가 수용할 수 없고 따라서 변화를 발생시키지 못하는 변칙을 조사할 전문적인 형태를 요구한다. 그러나 판단 체계뿐만 아니라, 이론과 발견, 방정식, 법칙, 절차, 도구들이 조사 결과를 평가하는 데 이용되며, 이들 모두는 맥락과 구조의 모든 부분에 의해 규정된다. (492~493 페이지)


맥락이 잘 닿지 않는 번역문은 역자의 이해 정도(또는 피곤함?)를 반영한다. 이전 글에서는 주로 원문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했는데, 이번 글에서는 번역의 문제를 지적해 놓고자 한다. 과학의 본질에 대해 그만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 The use of perspective geometry challenges the theological rules for interaction with the intangible physical world by making it measurable. Nineteen-century geology does away with the biblical record of history.

  In most cases, each structure is generated by circumstances that are not directly related to the scientific field itself. Often the pressure for change will come from outside the discipline. Whatever the cause, however, it will be seen that the initial cosmological structure sets the overall pattern of reality within which other structures work. They, in turn, defines the areas of research to be covered. These areas demand specialist forms of investigation that then discover anomalies which the overall structure cannot accommodate, and so change occurs. But the theories, discoveries, equations, laws, procedures, instruments, as well as the judgemental systems used to assess the results of investigation, are all defined by their context, all part of the structure. (pp. 330-331)


먼저 처음 두 문장의 오류를 지적한다. 번역문은 "투시 기하학은 무형 물질계의 상호 작용을 측정하려는 신학적 규칙에 도전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투시 기하학"의 원문은 "perspective geometry"이다. 이 부분은 3장에서 논의한 '원근법'에 대한 얘기이다. "투시" 기하학이라고 하면 뭔가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원문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이렇다: "원근법의 사용은 손에 닿지 않는 물리적 세계를 측정가능하게 함으로써 이에 대한 신학적 규칙에 도전했다." 측정가능이 중요한 단어이며 원근법이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번역문은 이 부분을 완전히 뺐다. 그 다음 문장 "19세기의 기하학은 역사에 대한 성서적 기록을 제거했다."에서는 역자가 단어를 잘못 봤다. "기하학"에 대응하는 원 단어는 "geology"이다. geometry가 아니다. 문맥을 봐도 '기하학'일리가 없지 않은가? 진화론을 논의하는 8장에서 지질학에 의해 성서적 역사가 어떻게 도전 받는지를 설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19세기의 지질학은 역사의 성서적 해석에 종말을 고했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 다음은 '구조'가 어떻게 과학 연구에 영향을 미치고, 또 구조 내에서의 이상 현상(anomaly)에 의해 바뀌는지를 논의하는 부분이다. (토마스 쿤의 '패라다임'이 저자가 얘기하는 '구조'이다.) 역자는 단어를 잘못 이해해서 이 '구조'의 변화가 과학계 밖에서 오는 것처럼 번역했다: "흔히 변화에 대한 압력은 학계의 외부로부터 온다." 하지만 원문은 그렇게 의미하지 않았다. 앞의 번역문에 대응하는 문장은 "Often the pressure for change will come from outside the discipline."인데, 여기서 "discipline"은 과학의 '분야'를 의미하는 것이지 과학계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interdisciplinary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원문의 의미는 A라는 분야의 구조 변화가 B라는 다른 분야에 의해 촉발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대륙이동설을 설명하며 비슷한 얘기를 이미 했다. 지구 해저면의 자기장에 대한 연구가 결국 대륙이동설을 확증한 예이다. 좀 더 맥락을 살리면 다음처럼 되겠다.


"대부분의 경우, 각 구조는 과학 자체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종종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다른 과학 분야에서 온다. 어떻게 만들어졌든 우주적 구조는 실재의 전체적 양상을 규정하며, 이 속에서 다른 구조들이 작동한다. 이 구조들은 각각의 분야에서 어떤 연구를 수행할지 결정한다. 각 분야에서는 전문적 연구들이 수행되는데, 이 연구들이 전체 구조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異常) 현상을 발견하면 결국 변화가 촉발된다. 하지만 이론, 발견, 방정식, 법칙, 과정, 측정도구 뿐만 아니라 연구의 결과를 평가하는데 사용되는 판단 체계는 모두 구조의 일부로서 각각의 맥락에 따라 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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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하여 <당신 지식의 한계 세계관>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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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전효과에 대한 설명에서 오류가 눈에 띄어 기록해 놓는다. 광전효과(photoelectric effect)란 금속에 빛을 쐬어 주었을 때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을 말한다. 광전효과는 빛의 입자성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 현상이다. 


  1905년의 또 다른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에 대해 설명했다. 플랑크가 말한 바대로 빛은 에너지 단위들의 묶음 형태로 도달한다. 이것들은 금속판과 충돌해 전자들을 방출시키는데 빛이 발생하는 빈도에 따라 많은 수의 전자들이 방출되었다. (444 페이지, 밑줄 추가)


"빛이 발생하는 빈도"란 말은 '빛의 진동수'를 잘못 번역한 말이다. 원문은 이렇다.


  In another of his 1905 papers Einstein explained what was happening. The light was arriving in packets of energy units as described by Planck. These knocked electrons out of the metal, and as the frequency of the light rose, so too did the number of electrons released. (pp. 199-200, 밑줄 추가)


버크는 '빛의 진동수가 증가함에 따라 방출된 전자의 수도 증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관찰된 광전효과는 그렇지 않다. 빛의 진동수가 증가할 때 증가하는 것은 방출된 전자의 에너지이다. 빛의 에너지(또는 광양자의 에너지)가 진동수가 증가함에 따라 증가하고(플랑크의 가설), 전자가 이 에너지를 받아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광전효과이기 때문이다. 방출되는 전자의 수는 빛의 진동수와는 관계가 없다. 


그 밑에는 드 브로이의 기여에 대한 설명이 있다. 


  1927년에 루이 드 브로이는 용감하게 난국에 맞서서 광자, 즉 빛의 묶음들을 두 개의 바늘 구멍 사이로 동시에 통과시키는 실험을 했다. 그것은 간섭을 통한 빛의 파동 운동설을 확립하기 위해 토머스 영이 한 세기도 전에 이미 사용했던 방법이었다. 광자들은 마치 파동처럼 서로를 간섭했다. (445 페이지)


다음은 원문이다.


  In 1927 Louis de Broglie took the bull by the horns and carried out an experiment in which photons, or light packets, were sent, one at a time, through the double pinhole system which Young had used more than a century before to establish the wave motion of light through interference. The photons interfered with each other as if they were waves. (p. 300)


드 브로이는 보통 '물질파'를 제안한 이로 기억된다. 물질(입자)이 파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파동인 빛이 입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물질파 가설을 설명하는 대신 드 브로이가 1927년 광자를 한 개씩 보내는 간섭실험을 했다고 언급하지만, 혹시나 인터넷을 찾아봐도 이런 내용은 없다. 뭔가 저자가 단단히 착각한 듯 싶다.


근·현대물리학 부분(9장)으로 오면서 저자의 설명이 좀 길을 잃는 느낌이다. 번역본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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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파동 만들기'에 두 전류 도선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관한 앙페르의 실험을 기술하는데, 힘의 방향 설명에 오류가 있다.


  1879년 앙드레 앙페르는 전류가 흐르는 두 가닥의 전선을 나란히 놓았을 때, 전류가 같은 방향으로 흐르면 전선들이 서로를 밀쳐 내고, 전류가 반대로 흐르면 잡아당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기는 자기력을 띠었고, 자기력은 전기적이었다. 그렇다면 전자기 현상이란 양전기와 음전기를 가진 '미립자'가 자기력을 만들어 내는 작용을 말하는 것일까? (419 페이지, 밑줄 추가)


위의 글은 두 평행한 도선에 흐르는 전류가 같은 방향이면 척력, 다른 방향이면 인력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전류의 방향이 같으면 인력, 다르면 척력이 맞다. 두 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쿨롱의 힘과 연관하여 혼동한 듯 싶다. 쿨롱의 힘은 두 전하의 부호가 같으면 척력, 다르면 인력이다. 


원문에도 같은 오류가 있다. 


  In 1879 André Ampère put two live wires next to each other and saw that when the currents ran in the same direction the wires repelled each other and when the currents went in oppsite directions the wires were attracted. Electricity was magnetic and magnetism was electrical. Was the electromagnetic phenomenon a 'molecule' on which positive and negative electricity acted to produce magnetism? (p. 281, 밑줄 추가)


번역서의 마지막 문장인 "전자기 현상이란 양전기와 음전기를 가진 '미립자'가 자기력을 만들어 내는 작용을 말하는 것일까?"는 언뜻 잘 이해가 안되는 원문을 의역한 듯 싶은데, 사실 원문을 왜곡했다. 원문의 뜻대로 번역하자면 "전자기 현상이란 양전기와 음전기가 작용하여 자기력을 만들어내는 '미립자'인 것일까?"가 맞다. 무슨 뜻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저자인 버크는 과학사와 문화사에 정통한 듯 싶지만, 과학에 대한 내용을 기술할 때 부정확해 보일 때가 있다. 위의 글이 그런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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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 자체 - 현대 과학에 숨어 있는, 실재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울프 다니엘손 지음,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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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다니엘손은 스웨덴의 끈이론 연구가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 문장으로 책을 시작한다.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고, 우리 머리 밖에는 수학이 존재하지 않고, 실재하는 세계는 시뮬레이션이 아니고, 컴퓨터는 생각하지 못하고, 의식은 환각이 아니고,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21 페이지)


책의 나머지는 위의 주장에 대한 그의 설명과 논증이다. 그는 '실재가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동어반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첫 번째의 '실재(reality)'는 우리 주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사과, 사람, 개, ...)을 의미한다. 그것이 환상(illusion)이 아니라 실제로 있다는 것이 위 문장의 뜻이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실재가 사실은 환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플라톤주의자들이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이 사실은 '이상적' 형태의 불완전한 반영이라는 것이 플라톤이 한 말인데, 현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자연 현상이 수학에 의해 설명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므로 자연 현상보다 수학이 더 본질적이고, 어찌 보면 자연 현상은 단지 그림자(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일군의 이론물리학자들이 그 예이다. 이런 생각(모든 것이 수학으로 설명)을 더 밀고 나가면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이고, 우리 머리 밖(이데아의 세계?)에 수학이 존재하며, 실재하는 세계는 마치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같고, 컴퓨터와 우리 뇌는 별 차이가 없으며, 그러므로 컴퓨터도 생각할 수 있고(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하지만 의식처럼 보이는 것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것이므로 결국 인간의 의식도 뇌가 만들어낸 환상일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다니엘손은 이 모든 것이 표상에 불과한 수학을 실재로 착각한 오류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시간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스몰린도 이런 입장에 동의할 것 같은데, 스몰린은 과학 쪽에서 그의 주장을 펼치는 반면, 다니엘손은 입장과 논증이 상당히 철학적이다. 그가 스몰린과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은 의식을 물리학이 설명할 수 있느냐이다. 스몰린은 객관적으로 관찰이 불가능한 의식은 물리학의 영역이 아닐 거라고 얘기하는 반면, 다니엘손은 물리학은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하며, 그러므로 의식까지 포함하여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식을 포함한 물리학이 무엇일지는 그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물리학이라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개념 오류들의 일소가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의식이 실재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라는 것은 (종교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부분이다. 100년 후, 또는 1,000년 후에는 과연 의식까지 포괄하는 물리학이 가능할지, 우리는 모른다. 어떤 물리학일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척 궁금하다. 어쩌면 영원히 인간의 능력 밖인지도 알 수 없다. 


그의 관점에는 상당 부분 공감할 수 있었지만, 사실 그의 생각을 100%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거슬리는 번역 용어 2개가 자꾸 눈에 띄는데, 하나는 "기초 물리학"이고 다른 하나는 "환각"이다. 기초 물리학은 fundamental physics를 번역한 말인데, fundamental physics는 입자물리학이나 우주론 같이 근원을 탐구하는 물리 분야를 뭉뚱그려 부르는 말이다. 잘 사용하는 말은 아니지만 '근원 물리학'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 싶다. "기초 물리학"이라고 하면 basic physics가 떠오르며, 이는 원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환각"은 illusion을 번역한 말일 텐데, '환상'이 더 적절한 듯 싶다. 환각은 뭔가 약물의 영향인 듯한 느낌이 들지 않나? 


과학의 본질이나 의식의 문제에 관심 있는 분들이 읽으면 곱씹을 만한 주장이 많다. 하지만, 추천사에도 나오듯 많은 이론물리학자들은 저자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한다. 이들이 사실 물리학계의 주류이다. 


... 물리학은 그저 모든 것의 토대가 아니라 모든 것이다. 나는 물리학을 세계 자체의 모든 측면에 대한 연구로 정의한다. 우리는 유기체로서 이 세계의 일부를 이루며, 진화를 거치는 동안 서서히 자신을 영원한 잠에서 깨어난 물질로 인식하게 되었다. 물리학은 자유롭고도 독립된 관찰자가 세상 바깥을 떠다니며 멀찍이서 관찰하는 학문이 아니다. 우리의 유기체적 몸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과학적 모형을 비롯한 우리의 모든 생각은 우리가 그토록 절실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바로 이 세계의 일부다. 내가 상상하는 물리학은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모든 것을 다룬다. 물리학은 말 그대로 생사가 걸린 문제다. (27 페이지)

  평행 세계 이론의 핵심은 무엇을 실재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수학적 도구는 단지 우리가 예측할 때 이용하는 모형의 일부일 뿐일까, 아니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응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수학적 구조를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라고 믿는다면, 파동 함수를 이 범주에 넣고 평행 세계를 인정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지만 당신이 (나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우주가 수학의 형식언어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실재가 하나 이상 존재한다고 믿을 이유는 전혀 없다. (70 페이지)

  뉴턴은 중력이 있다고 말하고 아인슈타인은 없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턴 역학이 거둔 성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채 더 정확한 예측을 내놓는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무엇보다 GPS로 정확한 위치를 계산하는 데 필수적이다. 미래의 물리학자들은 더욱 효과적인 이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법칙과 수학이 발전하고 달라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뉴턴의 머릿속에,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에, 그리고 당신의 머릿속에. 자연은 사과가 어떻게 떨어지는지 계산하기 위해 물리학과 수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과는 그냥 떨어진다. 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우리의 기술은 시간에 따라 발전하고 개선된다. (84 페이지)

  실재론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과학자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 바깥에 우리의 생각과 선입견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세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단 한 가지뿐이다. 이것이 많은 과학자들이 천명하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실재론의 진짜 의미 아닐까?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 실은 대안이 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실재론은 '형이상학적 실재론metaphysical realism'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 입장은 우리의 직관에 반하며, 우리가 일상적 현실을 바라보고 관계 맺는 방식과도 어긋나지만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세계가 실재로 존재하는 방식이 하나뿐이라면, 그 세계의 형태는 (물리학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들의 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실재를 바라보는 대안적 관점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기초 물리학의 기술은 예외적으로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 보이는 모든 거시적 물체는 알고 보면 임의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의자와 당신이 지금 앉아 있는 의자(지금 앉아 있다면), 내가 <세계 그 자체>를 쓰고 있는 컴퓨터와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책, 내 몸과 당신의 몸도 마찬가지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따르면 이 가운데 무엇 하나도 실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계는 우리가 만들어 낸 환각일 뿐이다. (108~109 페이지)

... 객관적 세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세계에 대한 주관적 표상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인정하는 철학적 모형은 없을까? 그런 것이 있다. 퍼트넘은 그런 모형에 '내재적 실재론internal realis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내재적 실재론의 요점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세계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퍼트넘은 세 종류의 물체들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예로 들었는데, 여기에 살을 붙여보자. 이해를 돕기 위해 세 물체를 사과, 오렌지, 바나나라고 하겠다. 이것들이 우리가 쓸 수 있는 유일한 구성 요소다. 이 세계가 세 종류의 물체들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사실로 보인다. 과연 그럴까? 이것만이 이 작은 세계를 정의하는 방법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과일을 둘씩 셋씩 짝지어 또 다른 구성 요소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일곱 가지 구성 요소가 생기는 셈이다. 이제 사과, 오렌지, 바나나 말고도 사과-오렌지, 사과-바나나, 오렌지-바나나, 사과-오렌지-바나나가 생겼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이 체계로 표현되고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성 요소는 3개일까, 7개일까? 그것은 당신에게 달렸다. 하지만 당신이 한 체계를  선택하고 고수하면, 그 안에는 세계에 대해 객관적으로 참인 진술들이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현실 세계를 파악하려 할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세계 자체는 원자와 진공 같은 물리학적 구성 요소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고, 의자, 책, 사람 같은 일상적 사물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근본적 의미에서는 동일한 세계이지만(우리는 실재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내재적으로, 즉 의식 안에서 우리는 세계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근사한 일이다. (110~112 페이지)

  그런데 이 중에서 더 나은 방식이 있을까? 당연하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에 달려 있다...

  내재적 실재론의 이점은 실재하는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기술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목표는 세계 자체에 대한 유용한 예측을 내릴 수 있는 효율적이고 신뢰할 만한 모형을 내놓는 것이다. 각각의 모형은 잠정적이며, (정량적 예측뿐 아니라 개념적 실증 면에서도) 언제나 개선의 여지가 있다. 앞서 보았듯 뉴턴 역학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이 그 예다. 뉴턴은 사과의 낙하와 달의 공전이 중력에 의한 것임을 간파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의 존재를 깡그리 부정하고 모든 것이 휘어진 시공간의 결과라고 주장하여 뉴턴 역학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이런 종류의 개념적 혁명을 고려하면 과학의 발전은 그때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적어도 당신이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라면 그렇다. 틀릴 때마다 원점으로 되돌아가라. 거듭거듭 그렇게 하라. 뉴턴은 틀린 것으로 드러났고 아인슈타인이 그의 자리를 차지했다. 말하자면 과학은 결코 믿을 것이 못 된다. 하지만 내재적 실재론자의 생각은 달라서, 과학이 정확히 제대로 작동된다고 말한다. (112~113 페이지)

  요점은 과학을 수학적 논리에 기반한 체계로만 본다면 과학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 같은 연구자들이 이론을 가지고 하는 일도 형식화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조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의미가 생겨나는 것은 이 기호들이 현실 세계에, 더 정확히 말해 우리가 선택하고 추상화하는 현실의 일부에 연결될 때뿐이다. 문제는 여기에 중요한 단계들이 있다는 것인데, 이 단계들은 사소한 것으로 오인되며 의도적으로 외면당한다. 고상한 관념들과 비루한 자연계 사이에는 연구자 자신의 체화된 의식이 놓여 있다(이것이야말로 과학의 본질이다). 수학과 논리라는 추상 세계와 우주 사이에 객관적이고 외부적이며 독립적인 연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연결은 언제나 피와 살로 이루어진 뇌에서 이루어진다. (132 페이지)

순수한 형식언어로 수학의 본질을 포착할 수 없듯 현대물리학은 물질이 어떻게 유기체적 존재를 통해 의식을 만들어 내는지 알지 못한다...

  물리학자들은 곧잘 두 가지 기본적 함정이 빠진다. 첫 번째 함정은 모형을 세계 자체로 혼동하는 것이다. 모형은 수학으로 정식화되므로, 세계 자체를 수학과 동일시하는 실수를 저지를 법도 하다. 두 번째 함정은 괴델의 결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완전히 기계적인 수학이라는 힐베르트의 헛된 꿈을 좇는 데서 비롯한다. 이렇듯 세계를 수학과 동일시하면, 세계 자체가 어떤 의미론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의미한 구문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는 수많은 기이한 결론을 낳는다. 이를테면 모든 것이 의미 없는 형식언어에 불과하다면 시뮬레이션과 현실 세계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한낱 프로그램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전적으로 합리적이다. (168~169 페이지)

살아 있는 유기체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한다. 우리를 이루는 물질은 대부분 교체된다. 기계의 동일성은 물질적 부분, 궁극적으로는 낱낱의 원자에 깃들어 있지만 살아 있는 유기체에 대해서는 결코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다. 기계가 본질적으로 닫힌계closed system인 데 반해 유기체는 들락날락하는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열린계open system이기 때문이다. (193 페이지)

  세계 자체를 평범한 컴퓨터에서 시뮬레이션할 수 있고 자연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계산을 튜링 기계에서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흔히 '물리적 처치-튜링 가설physical Church-Turing hypothesis'이라고 불린다... 말하자면 우주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고성능 컴퓨터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즌에 따르면 생명계는 스스로를 떠받치는 고리가 필요한데, 이런 고리는 시뮬레이션이 불가능하다. 처치-튜링 가설이 적용되는 세계에는 오로지 기계만 있을 뿐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로즌이 옳다면 처치-튜링 가설은 틀렸으며 살아 있는 유기체는 이 가설에 어긋나는 물리계의 첫 사례다. 따라서 생명계를 완벽하게 기술하려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컴퓨터의 정보처리 능력을 뛰어넘는 모형을 동원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계산 불가능한 수학이다. (19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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