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의 다세계(many worlds) 해석은 때때로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라고 불리기도 하며[1], 근래 여러 영화에서 주요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 영화의 하나가 얼마 전 인기를 얻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다[2]. 물론 이 소재만으로 인기를 얻은 것은 아니며, 영화 속에는 모녀 관계, 이루지 못한 꿈, 이민생활의 고단함 등이 잘 버무려져 있다. 


다세계 해석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물리학자에 따라 다르다. 울프 다니엘손은 다세계 해석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며, 대중이 이 개념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경우의 부작용에 대해 걱정한다[3]. 반면 맥스 테그마크와 션 캐럴은 평행우주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사고를 피했을 경우 다른 평행우주에서 사고를 당할 또 다른 자기에게 연민을 느낄 정도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평행우주가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이들 우주를 왕복하거나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나와 교신할 수 있는 가능성은 현재의 물리학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평행우주를 단순한 흥미거리가 아닌 실제적 가능성으로 생각하는 물리학자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다니엘손은 이런 물리학자들을 심각하게 취급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현대 물리학이 처한 어려움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다. 다니엘손은 <세계 그 자체>에서 수학이 우주보다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 물리학자들의 태도가 이런 귀결을 낳았다고 비판한다. 다시금 곱씹어 보자. 수학은 도구일 뿐이다. 우주가 수학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기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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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종 '다중우주(multiverse)'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인플레이션 이론의 귀결로서, 또는 관측가능한 우주보다 더 큰 우주가 존재한다는 개념으로서의 다중우주는 양자역학 해석의 하나인 평행우주와는 다르다. 

[2] 10월에 상영 1주년 기념 돌잔치(재상영)를 한다고 한다. 

[3] 다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농담적) 테스트 방법인 양자 러시안 룰렛에 대해: https://blog.aladin.co.kr/746092183/88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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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5일에 개봉했던, 물리학자들의 영화, <오펜하이머>. 여러 메시지가 있지만, 내게 아직도 악몽을 선사하는 장면은 오펜하이머가 보안위원회에서 증언하다가 연인이었던 진과 의자에 발가벗겨진 채 앉아 있는 부분이다. 개인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가 어디까지 개인의 자유를 침범할 수 있는가. 인간이 만들어낸 국가라는 개념이 어떻게 존재하며 개인에게 촉수를 뻗치는가. 다른 이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한 개인의 사생활은 침해되어도 괜찮은가. 놀란 감독은 이 자극적 장면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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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8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론물리학자(더구나 끈이론 연구가)인 울프 다니엘손의 말을 자꾸 곱씹게 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인데...


  Mathematics does not rule the universe; we use it to describe what we discover in the universe. (<The World Itself>, p. 17)


우주가 물리학자들 하듯 수학 계산을 통해 지구의 궤도를 결정하거나 원자 안에서 전자가 존재할 확률을 부여하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왜 우리는 우주가 '수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왜 더 나아가 수학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다니엘손은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 물질과 의식을 분리하여 생각하며 의식이 물질을 지배한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깔려있다고 지적한다. 


완전히 상반된 의견을 표방하는 두 권의 책을 위에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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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y the Universe Changed: How Galileo's Telescope Changed The Truth and Other Events in History That Dramatically Altered Our Understanding of the (Paperback, Rei Sub)
Back Bay Books / 1995년 9월
평점 :
품절


마지막 장인 10장을 읽기 전에는 몇몇 부정확한 과학적 사실들로 인해 별 4개를 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10장의 마지막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별 3개로 생각이 바뀌었다. 10장에서 저자는 본인의 과학철학을 피력하는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신화나 과학이 별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상대주의이다. 


과학의 모든 활동에서 이론이 전제된다는 것은 맞는데, A라는 이론과 B라는 이론을 인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자연이라는 제약이 있다. 우주에서 관찰되는 지구가 둥그런 것을 보고서도 지구가 네모나다고 전제하는 이론을 펼칠 수는 없다. 


중세에서 근세로 오면서 어떻게 유럽이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는지에 대한 문화사적, 과학사적 이야기는 나름 재미있게 읽었지만 저자의 극단적 상대주의 과학론에 동의하기는 힘들다. 과학사 책으로는 나름 괜찮지만 과학철학 책으로는 별로이다. 저자가 다루는 '구조'(세계관)에 대해 좀 더 합리적 의견을 제시하는 과학철학 책으로 <당신 지식의 한계 세계관>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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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살펴본 모든 내용을 정리하며 버크의 과학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는 마지막 장(10장 '끝없는 세계들')을 읽고 있다. 버크는 과학적 데이터의 해석 뿐만 아니라 무엇을 관찰(측정)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학 실험과 도구의 설계 자체를 규정하는 '구조(structure)'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서 '구조'란 세계관이라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본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문단 앞의 두 문장도 함께 인용한다.)


... 투시 기하학은 무형 물질계의 상호 작용을 측정하려는 신학적 규칙에 도전했다. 19세기의 기하학은 역사에 대한 성서적 기록을 제거했다.

  대부분의 경우 각 구조는 과학계 자체와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 의해 발생된다. 흔히 변화에 대한 압력은 학계의 외부로부터 온다. 그러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최초의 우주 구조는 다른 구조적 작업 안의 전체적인 실재 형태를 자리 잡게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에는 이것들이 연구의 영역을 규정한다. 그 뒤 이런 연구 영역은, 전체 구조가 수용할 수 없고 따라서 변화를 발생시키지 못하는 변칙을 조사할 전문적인 형태를 요구한다. 그러나 판단 체계뿐만 아니라, 이론과 발견, 방정식, 법칙, 절차, 도구들이 조사 결과를 평가하는 데 이용되며, 이들 모두는 맥락과 구조의 모든 부분에 의해 규정된다. (492~493 페이지)


맥락이 잘 닿지 않는 번역문은 역자의 이해 정도(또는 피곤함?)를 반영한다. 이전 글에서는 주로 원문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했는데, 이번 글에서는 번역의 문제를 지적해 놓고자 한다. 과학의 본질에 대해 그만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 The use of perspective geometry challenges the theological rules for interaction with the intangible physical world by making it measurable. Nineteen-century geology does away with the biblical record of history.

  In most cases, each structure is generated by circumstances that are not directly related to the scientific field itself. Often the pressure for change will come from outside the discipline. Whatever the cause, however, it will be seen that the initial cosmological structure sets the overall pattern of reality within which other structures work. They, in turn, defines the areas of research to be covered. These areas demand specialist forms of investigation that then discover anomalies which the overall structure cannot accommodate, and so change occurs. But the theories, discoveries, equations, laws, procedures, instruments, as well as the judgemental systems used to assess the results of investigation, are all defined by their context, all part of the structure. (pp. 330-331)


먼저 처음 두 문장의 오류를 지적한다. 번역문은 "투시 기하학은 무형 물질계의 상호 작용을 측정하려는 신학적 규칙에 도전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투시 기하학"의 원문은 "perspective geometry"이다. 이 부분은 3장에서 논의한 '원근법'에 대한 얘기이다. "투시" 기하학이라고 하면 뭔가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원문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이렇다: "원근법의 사용은 손에 닿지 않는 물리적 세계를 측정가능하게 함으로써 이에 대한 신학적 규칙에 도전했다." 측정가능이 중요한 단어이며 원근법이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번역문은 이 부분을 완전히 뺐다. 그 다음 문장 "19세기의 기하학은 역사에 대한 성서적 기록을 제거했다."에서는 역자가 단어를 잘못 봤다. "기하학"에 대응하는 원 단어는 "geology"이다. geometry가 아니다. 문맥을 봐도 '기하학'일리가 없지 않은가? 진화론을 논의하는 8장에서 지질학에 의해 성서적 역사가 어떻게 도전 받는지를 설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19세기의 지질학은 역사의 성서적 해석에 종말을 고했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 다음은 '구조'가 어떻게 과학 연구에 영향을 미치고, 또 구조 내에서의 이상 현상(anomaly)에 의해 바뀌는지를 논의하는 부분이다. (토마스 쿤의 '패라다임'이 저자가 얘기하는 '구조'이다.) 역자는 단어를 잘못 이해해서 이 '구조'의 변화가 과학계 밖에서 오는 것처럼 번역했다: "흔히 변화에 대한 압력은 학계의 외부로부터 온다." 하지만 원문은 그렇게 의미하지 않았다. 앞의 번역문에 대응하는 문장은 "Often the pressure for change will come from outside the discipline."인데, 여기서 "discipline"은 과학의 '분야'를 의미하는 것이지 과학계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interdisciplinary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원문의 의미는 A라는 분야의 구조 변화가 B라는 다른 분야에 의해 촉발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대륙이동설을 설명하며 비슷한 얘기를 이미 했다. 지구 해저면의 자기장에 대한 연구가 결국 대륙이동설을 확증한 예이다. 좀 더 맥락을 살리면 다음처럼 되겠다.


"대부분의 경우, 각 구조는 과학 자체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종종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다른 과학 분야에서 온다. 어떻게 만들어졌든 우주적 구조는 실재의 전체적 양상을 규정하며, 이 속에서 다른 구조들이 작동한다. 이 구조들은 각각의 분야에서 어떤 연구를 수행할지 결정한다. 각 분야에서는 전문적 연구들이 수행되는데, 이 연구들이 전체 구조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異常) 현상을 발견하면 결국 변화가 촉발된다. 하지만 이론, 발견, 방정식, 법칙, 과정, 측정도구 뿐만 아니라 연구의 결과를 평가하는데 사용되는 판단 체계는 모두 구조의 일부로서 각각의 맥락에 따라 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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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하여 <당신 지식의 한계 세계관>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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