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청미래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간이 육체를 정복할 수 있고, 또 육체적이고 열정적인 자아에 결코 휩쓸려서는 안 된다고 암시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가장 고매한 열망을 품도록 자극하는 고귀한 충고이다. 하지만 그 충고를 완벽하게 따르기란 불가능하며,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어떤 인간도 정착할 수 없는 높기만 한 철학의 산봉우리들이 그리고 우리의 관습과 힘을 넘어선 곳에 있는 규율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 <수상록> III
[인간이] 자신과는 엄청나게 다른 존재의 기준에 맞추어서 자신의 의무를 정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다. - <수상록> III -176쪽

인간의 지혜라는 것에 담긴 지적 우둔함을 간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랄 만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위대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그런 중요한 인물들에게서조차 엄청난 오류를 발견할 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인간의 감각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 <수상록> II-196쪽

... 그들이 단어의 기원에 관한 책을 쓰고 보편적인 명제를 발견한 것은 명백한 업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철학적 논리에 대해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보다 결코 더 행복하지도 않았고, 약간은 더 불행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몽테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바로의 삶을 떠올리면서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바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박학다식이 정작 그들 자신들에게는 어떤 소용이 있었던가? 그것이 그들을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던가? 그것이 평범한 짐꾼에게 일어났던 불행을 덜어주었는가? 논리학이 그들의 통풍(痛風)에 위안이 되었던가......? - <수상록> II
-206쪽

그 두 사람이 그렇게 박식하면서도 무척 불행했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몽테뉴는 지식을 두 개의 범주로, 즉 학문(learning)과 지혜(wisdom)로 구분했다. 학문의 범주에는 논리학과 어원학, 문법,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들어갔다. 그리고 지혜의 범주에는 그보다 훨씬 더 폭넓고 이해하기 어렵고, 보다 가치 있는 지식의 종류를 넣었는데, 여기에는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이를테면 사람들이 행복하게 도덕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당되었다. -206쪽

전문적인 교수진과 교장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콜레주 드 기옌이 안고 있던 문제는 학문을 전달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지혜를 전파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이었다. 바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인적인 삶을 망쳐놓았던 잘못이 이번에는 제도적 차원에서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나는 기꺼이 교육의 부조리라는 주제로 돌아가겠다. 우리의 교육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고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무엇인가를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이라면 성공한 셈이다. 교육은 우리에게 미덕을 추구하고 지혜를 포용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단어의 기원이나 어원 같은 것들을 우리의 뇌에 각인시켰다....... - <수상록> II-207쪽

... 몽테뉴의 지식체계에서는, 한 권의 책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삶에서 유익하고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플라톤이 쓴 내용이나 에피쿠로스가 뜻한 바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그들의 말이 정말 흥미롭고 지금 당장 우리의 고민이나 외로움을 달래는 데에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하는 것보다 가치가 덜한 일이다. 인문학 분야에서 저자의 책임은 과학에 버금가는 정확도에 있니 않고 인류에게 행복과 건강을 주는 데에 있다. 몽테뉴는 그런 관점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짜증스러운 반응을 나타냈다.-216쪽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룬 성취의 스케일 자체가 우리에게 문제투성이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우리에게 이로운 존재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똑똑한 저자들이 있다.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한 나머지 그런 저자들은 최종 결론까지 내려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천재성은 후계자들로 하여금 창조적인 작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불경(不敬)을 저지를 용기를 가지지 못하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처럼 행동하지 못하도록 막았는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단지 자신보다 앞서 축적되었던 지식의 상당 부분에 대해서 회의함으로써, 말하자면 플라톤이나 헤라클라이토스를 읽기를 거부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취약한 부분에 대해서 비평을 가함으로써 위대한 인물의 반열에 올랐으면서도 말이다. 진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에 입각하여 행동한다는 것은, 몽테뉴가 깨달았던 반면에 피사의 그 남자는 깨닫지 못했는데, 어쩌면 가장 성공한 권위자들과도 어느 정도 지적 결별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220쪽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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