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지도 - 진중권의 철학 에세이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9월
구판절판


프로이트에 따르면, 한때 친숙했으나 억압을 통해 망각된 욕망이 다시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낯설어 하면서도 어딘지 친숙하게 느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때 무생물이었으나, 탄생과 더불어 그 사실은 억압되고 망각된다. 하지만 억압되고 망각된다고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 내면에는 여전히 죽음으로 돌아가려는 은밀한 충동이 존재한다. 한때 친숙했으나 이제는 낯설어진 그 충동은 우리에게 섬뜩한 느낌을 준다.-200쪽

이성주의자에게는 다시 찾아온 유미주의가 일종의 퇴행으로 여겨질지 모르겠다. 라캉에 따르면 유아는 거울을 통해 실재계(le re'el)에서 상상계[le symbolique]로 입장하고, 이어서 상징계[le imaginaire]로 이행하면서 성장을 완료한다. 어떤 의미에서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헬레니즘 문명은 이미지로 빚어낸 상상계의 문화였다. 이후 서구 사회는 이미지를 금하는 텍스트의 문화, 즉 헤브라이즘을 수용함으로써 상징계로 진화한다. 하지만 산업이후사회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상징계에서 상상계로 되돌아가는 퇴행이다.-234쪽

아무리 변증법적 '운동'을 강조한다 해도, 헤겔은 결국 '존재'의 철학자다. 그에게 '생성'이란 '아직 덜 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관점을 뒤집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생성'을 '되다가 만 존재'로 규정할 게 아니라, 외려 '존재'를 '활동하다 멈춘 생성'이라 부르는 거다. 한마디로, 존재를 생성의 우위에 놓는 태도에서 벗어나 생성을 존재보다 더 근원적 사건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철학에서 이는 곧 플라톤주의에서 니체주의로 사고를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를 달고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철학들이 한 일이 바로 그 작업이었다. -267쪽

기관 없는 신체는 일종의 존재미학으로 제기된 것이다. 사회는 개인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개인은 사회라는 거대한 신체 속에 하나의 기관(직업 혹은 역할)으로 명료하게 분절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아무 짝에도 쓸 데 없는 자'일 뿐이다. 이 점에 관한 한 전통적 좌파나 우파나 차이가 없다....
들뢰즈는 항상 생성의 상태로 존재하라고 요청한다. 즉 이미 분화를 마친 하나의 기관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어떤 기관으로도 분화할 수 있는 잠재성의 상태로 자신을 유지하라는 얘기다.-268쪽

우리가 시각이나 청각을 통해 사물의 이름을 배운다면, [소설 <향수>의] 그루누이는 후각을 통해 사물의 이름을 배운다. 카멜레온이 자신의 몸 색깔을 주위환경과 완전히 동화하듯이, 나무의 냄새를 맡는 동안에 그루누이는 스스로 나무인형이 된다. 스스로 나무가 되어버림으로써 그는 '나무'라는 낱말의 진정한 의미를, 그 현상학적 충만함 속에서 신체로 배운다. '그루누이의 피노키오-되기.' 이 존재론적 닮기를 '미메시스'라 부른다. 미메시스는 문명화의 과정 속에서 인간이 예민한 후각과 더불어 잃어버려야 했던 가장 중요한 원시적 능력이다.-276쪽

영화 역시 시각과 청각의 예술이다. 하지만 영화도 종종 공감각[synesthesia]을 사용한다. 물론 4D 영화라는 이름으로 좌석을 흔들거나 객석에 연기를 분사하는 유치한 방식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가령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를 향한 채찍질, 특히 <블랙 호크 다운>은 거의 '쇼크'에 가까운 강렬한 촉각적 효과를 주지 않던가. 이 '시청각의 촉각-되기'도 감각들 사이의 미메시스라 할 수 있다. 영화로 후각의 효과를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향수>를 영화화한 작품에서는 유감스럽게 냄새가 나지 않았다.-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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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3-05-07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의 충동'을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트가 도입한 '비존재의 기억'... 내가 무생물이었을 때가 어떻게 기억에 남나?? 설마 원자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