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기의 달이 뜨면>을 조금 읽었다(4장까지). 책 자체의 가독성은 괜찮은데 번역이 가끔 이상하다. 처음 원문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한 부분은 1장에서 처칠이 영국 국왕의 부름을 받아 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다. 처칠은 첫 번째 차에, 그의 경호원 톰슨은 두 번째 차에 타고 길을 달리고 있다. 그리고 다음의 구절이 나온다.


"나는 올드맨Old Man을 뒷자리에 모신 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벅찬 자부심을 가지고 차를 몰았다." 톰슨은 그렇게 썼다. (26 페이지)


올드맨은 처칠을 의미할 터인데 톰슨의 뒷자리에 앉아 있다니? 조금 전에 첫 번째 차에 타고 있다고 했는데? 원문을 찾아봤다.


"I drove behind the Old Man with indescribable pride," he wrote. (원서 12 페이지)


원문은 분명 톰슨이 처칠 뒤에서 운전하여 쫓아가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왜 이런 오류를 범했을까.


이후 원문과 대충 비교해 보기 시작했는데 가끔 오역이 보인다. 다음에 예를 나열한다.


  그래서 좀 알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해보자'라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나는 작업을 시작하기 무섭게 절감해야 했다. (9 페이지)


원문: I decided to find out, and quickly came to realize that it is one thing to say "Carry on," quite another to do it. (원서 XIII 페이지)


"Carry on"은 2차 대전 당시 영국의 구호 중 하나이다. "Keep Calm and Carry On"이 원래 문구이다. 아마 돌아다니는 빨간색 포스터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자"의 의미인데, 이 "Carry on"이 들어간 문구를, 알아보겠다고 '마음 먹은 것'을 실제로 해보니 어려웠다는 식으로 번역했다. 저자가 원래 의미하는 바는 "하던 일을 계속하자"라고 구호를 외치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생활하는 것은 정말로 다른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저자 자신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당시 영국 국민에 대한 얘기이다.


흐릿한 불빛 속에서 톰슨 경위는 처칠의 빰에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30 페이지)


원문: In the fading light, Inspector Thompson saw tears begin to slip down Churchill's cheeks. (원서 14 페이지)


여기서 light는 불빛이 아니라 햇빛이다. 문맥을 보면 차에서 내려 실외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국왕을 만나고 해군성으로 와서 이제 날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이 장면을 갑자기 실내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바꾸어 버렸다.


미국은 전쟁을 대하는 처칠의 생각과 그로 인한 최종적인 결과를 중대하게 보았다. (45 페이지)


원문: America loomed large in Churchill's thinking about the war and its ultimate outcome. (원서 24페이지)


"전쟁과 그 궁극적 결과에 대한 처칠의 생각에서 미국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도가 올바른 번역일 것이다. 이후의 본문은 처칠이 처음부터 미국을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일화를 얘기해 주고 있다. 


"우리가 지지 않는다는 말씀이세요?" 랜돌프가 물었다. "그러니까 그 망할 놈들을 무찌를 수 있다고요?"

  그러자 처칠은 면도기를 세면대에 내던지고 얼굴을 돌려 아들을 마주보며 고함을 쳤다. "당연히 우리가 이기지." (46 페이지)


원문: "Do you mean that we can avoid defeat?" Randolph asked. "Or beat the bastards?"

  At this, Churchill threw his razor into the basin and whirled to face his son. "Of course I mean we beat them," he snapped. (원서 24~25 페이지)


조금 미묘하지만, 처칠의 아들 랜돌프는 패배를 피하는 것과 독일을 무찌르는 것 중 어느 것을 의미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or'가 앞의 질문을 부연하는 것이 아니라,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한다. 당시에는 파죽지세의 독일을 무찌르는 것을 다들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독일이 대륙을 차지하는 것을 용인하고 강화 등을 통해 독일의 패권을 인정하는 것이 '패배를 피한다'의 의미이다. 사실 이것이 히틀러가 영국전투를 통해 얻으려고 했던 바라는 이야기도 있다.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을 실제로 침공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처칠은 (미국을 끌여들여) 독일을 무찌른다고, 둘 중 후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임 총리에 대한 의구심, 특히 그의 주량에 대한 의구심은 회의가 있기 훨씬 전부터 심어진 것이었다. (47 페이지)


원문: Doubts about the new prime minister, in particular his consumption of alcohol, had been sown well before the meeting, however. (원서 25 페이지)


"주량에 대한 의구심"은 이상한 번역이다. 처칠의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 미국이 궁금하게 생각했다는 것인가? "음주 습관" 정도가 나을 것 같다.


  화이트홀 전체의 전기 사용량이 급증했다. 조용했던 통로들이 깨어났다. (49 페이지)


원문: A new electricity surged through Whitehall. Subdued corridors awoke. (원서 27 페이지)


비유적 표현을 실제적 의미로 번역했다. "A new electricity surged through Whitehall."은 "새로운 활기가 화이트홀에 넘쳐 흘렀다." 정도의 의미이다. 실제로 전기 사용량이 급증했다는 것은 아니다. 장의 제목인 "Galvanized"를 "감전 효과"라고 번역한 것도 눈에 띤다. "galvanize"는 "활기를 불어 넣다"의 의미이다. galvanize가 전기와 관계가 있는 단어이니 '감전 효과' 정도는 역자의 선택이라고 용인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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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2-21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서를 사서 이렇게 읽고 비교해 주시는 거 넘 좋아요!!! 블루얀더님 영어 실력이 대단하시군요!!! 저는 읽기만 잘(?)하지 한국어로 번역이 어렵던데요,, 더구나 제 한국어 실력이 변변찮아서 더 그런... 이런 페이퍼 더 자주 올려주세요!!^^

blueyonder 2022-02-21 12:37   좋아요 1 | URL
편집자가 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책은 결국 출판사와 편집자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신경을 더 써주면 좋겠네요.
국제화가 되면서 국내에도 영어 잘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네이티브 정도는 아니지만 읽을 수 있는 수준은 됩니다. 가끔 의미를 모르겠는 문장도 나오지만요. ^^;
요즘 애들은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책을 안 읽어서 그렇지... 그래서 앞으로 우리말 번역도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
라로 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라로 2022-02-21 13:21   좋아요 1 | URL
블루얀더님 넘 겸손하세요!! 요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아서 더 잘 하는 것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간호사라 주변에 필리핀 간호사들이 많은데 어려서부터 영어를 생활화해서 그런가 타갈로와 영어에 아주 뛰어나요,, 그런 거 보면 저는 구시대라 많이 부러워요,, 그리고 어린 한국 간호사들 보면 영어를 아주 잘해요,, 저는 그들을 아주 많이 부러워하고요,, 영어책 보다 보면 가끔 아니라 자주 모르겠는 문장 투성입니다요.^^;;

blueyonder 2022-02-21 15:54   좋아요 1 | URL
저도 문법으로 영어를 배운 구시대인입니다. ㅠ 언어는 정말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발음이 다르지요.
타고난 시대를 어쩔 수는 없는 것 같고요, 그냥 주어진 대로, 생긴 대로 살자고 마음 먹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