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단편 소설 <죽지 않는 사람들>은 불사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로마 시대의 군단장이었던 주인공 마르코 플리미니오 루포는 불사의 강 하구에 있는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곳을 찾아 나선다. 갖은 고초 끝에 드디어 그는 강물을 마시고 불사의 인간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이집트의 불락 교외에서 <아라비안나이트>의 어떤 이야기를 필사했고, 사마르칸트 감옥 마당에서 수없이 장기를 두었으며, 보헤미아에서 점성학을 연구하며 수많은 생을 살게 된다(<알렙>, 민음사, 1996, 13~35쪽).
불사의 삶을 찾고자 한 것은 진시황만은 아니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미라가 되어 거대한 피라미드 속에서 사후의 시간을 보내고자 했던 것도 잘 알다시피 불사와 영생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다. 영원성에 대한 플라톤의 철학적 꿈으로부터 레닌의 방부 처리된 시신까지 모두 이 불사의 삶에 대한 욕망의 산물이다. 영생이야 불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을 향하여 생명의 길이를 늘리는 것 또한 이런 욕망과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수명을 연장하고 노화를 방지하려는 현대 과학자들의 집요한 노력 역시 '영생'이라는 '종교적' 단어와 공명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보르헤스가 말한 루포의 불사의 삶이란, 생각해보면 '윤회'라는 관념과 거의 비슷한 것이다. 불락에서 <아라비안나이트>를 필사하다 사마르칸트에 가고, 다시 보헤미아에 가서 점성학을 연구하는 완전히 다른 삶을 천 년 이상의 세월 동안 이어가는 것은 그 상이한 삶 사이에 '죽음'이라는 사건을 끼워 넣으면, 우리가 익히 아는 윤회하는 삶이 된다... 사실 윤회 안에서 죽음은 결코 삶의 중단을 뜻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죽음'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변환의 문턱일 뿐이다... 보르헤스는 말한다. '죽음에 대한 관념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사실 불사의 존재'라고. 컴컴한 어둠 앞에서 느끼는 공포 때문에, '죽음'이란 두려운 관념 때문에 우리는 죽는 것이라고. (201~202 페이지)
... 윤회는 근본적인 죽음의 불가능성에 대한 교설이다. 거기 불사에 대한 욕망과 반대로 죽음의 불가능성 앞에서 출현하는 절망, 즉 죽어도 죽지 못하고, 죽고자 해도 죽을 수 없는 기이한 무능력에 대한 사유가 깃들어 있다. (203 페이지)
'피안'이라는 말이 야기할 오해를 넘어서기 위해 피안 없는 차안의 삶에서 깨달음을 얻을 것을 가르치고, 윤회의 중단이란 말이 야기할 오해를 깨기 위해 윤회 없는 해탈이 아니라 윤회하는 삶 속에서 해탈할 것을 가르쳤던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전환은 분명 이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깨달음이란 번뇌 안에서 얻는 것이며 번뇌와 함께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부처란 중생과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중생 자신임을 설하는 것도 모두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공이란 물질이 없는 세계(무색계)에서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세계(색계) 그 자체 안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는 개념 또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윤회하는 삶은 떠나야 할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장으로 긍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업이란 이름으로 주어진 것을 참고 견디라는 인고의 가르침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할 만한 것으로 바꾸어가라는 가르침으로써 긍정된다. (212~213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