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출간된 위의 책(원저는 2009년 출간)은 현재 알라딘에서 검색이 안된다. 절판된 지 오래된 모양으로, 온라인 중고샵에서만 찾을 수 있다. 


예전부터, 기술이 뛰어난 일본 전자산업(특히 반도체 산업)이 어떻게 밀려나게 됐는지 궁금했다. 비교적 큰 내수시장으로 인한 갈라파고스 현상이니 말이 많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결국 '혁신의 덫'에 걸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저자인 유노가미 다카시湯之上隆는 1987년부터 2002년까지 약 15년 6개월 동안 히타치 제작소에서 반도체 미세가공기술 개발에 참여했다. 퇴사 후, 도시샤 대학에서 일본 반도체 산업의 쇠퇴 이유에 대해 사회과학적 연구를 진행했다. 


그에 따르면 DRAM은 1971년 인텔이 1 KB DRAM을 발명한 이래 시작되었는데, 일본 반도체 산업은 혁신을 거듭하여 1980년 중반에 미국을 제치고 DRAM 시장 점유율 세계 1위가 되었다. 당시는 대형 컴퓨터인 메인 프레임이 주류였는데, DRAM 회사에 25년 품질 보증을 요구했다고 한다.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새로운 공정기술을 개발할 뿐만 아니라 마스크 및 공정의 수를 늘려 시장의 성능 및 신뢰성 요구에 맞추었다. 이러한 극한기술의 추구는 장인정신으로 유명한 일본인들의 구미에 잘 맞았을 것 같다.


문제는 세월이 흐르며 개인용 컴퓨터(PC) 시장이 급속히 커지지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PC는 아무리 오래 써봐야 10년이다. 그러니 일본이 만드는 고품질, 고신뢰성의 DRAM보다 성능 및 신뢰성은 떨어지지만 가격이 싼 DARM이 요구된다. 이 시장을 삼성 등 한국 회사와 미국의 마이크론 등이 잘 대응했다. PC용 DRAM은 3년 보증(!)을 요구했다고 한다. 25년 보증용 고가의 DRAM을 만들다가 3년 보증용 저가의 DRAM을 만들기가 쉬울까. 뭐 고성능 제품 만들다가 저성능 제품 만들기는 누워서 떡먹기일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마스크 및 공정의 수를 줄여야 하는데 사실 이것이 더 어려울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은 일본 DRAM 회사가 아예 없어져 버렸다[1]. 엘피다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회사인데[2] 엔지니어들은 일본이 여전히 기술은 최고이지만 경영 전략의 실패와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 고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여기에 교훈이 있다: 싸게 만들지 못하면서 기술이 최고라는 생각이 잘못됐다. 싸게 만들 수 있는 것이 기술력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예전처럼 하는데 왜 시장에서 밀려나고 있을까 고민하는 것, 이것이 혁신의 덫이다. 


혁신을 하여 성공한 후, 동일한 방법을 지속하면 다시 성공할 수 없다. 동일한 방법으로 계속 성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은 변한다. 그 틈을 와해성 기술(disruptive technology)이 치고 들어온다. 이러한 기술은 세상과 시장을 완전히 재편한다. 이전의 혁신기업들은 이러한 기술에 대응이 느리다. 특히 자신의 기술에 자부심이 강할수록.


혁신의 덫은 개인에게도 교훈을 준다. 나의 노력과 성품과 직관이 먹혀서 성공했다고 하자. 그 경우 나는 그 성공전략을 계속 밀어부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운좋게 먹힌 그 성공전략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먹히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과학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천재적 직관으로 특수상대성 이론과 더 나아가 일반상대성 이론이라는 거대한 히트를 쳤다. 하지만 그의 물리적 직관은 거기까지였다. 이후 미시세계를 연구하며 나온 양자역학이라는 도도한 흐름에 그는 완벽히 소외됐다. 그의 물리적 직관이 양자역학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 우물을 파는 개인은 아름답다고도 할 수 있다.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을 경우 그의 아이디어는 그와 함께 사라지면 된다. 혹시 또 모른다. 언젠가 그의 아이디어가 다시 인정 받을지. 


한 우물을 파는 기업은 아름답지 않다. 기업의 생명은 개인의 생명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기업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사라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겠지만, 또 새로운 기업이 나올 기반이 될 수도 있다. 한 우물을 파는 나라는? 상상하기 어렵다. 기업, 특히 국가는 새로운 생각에 열려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존과는 다른 혁신이 나올 토양을 배양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일본과 우리나라를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래도 혁신의 덫에 비교적 잘 대응해 온 것 같다. 일단 사회 자체가 일본보다는 열려있는 느낌이다. 일본은 매뉴얼의 사회라 매뉴얼 없는 일에는 허둥댄다. 이건 역사가 증명한다. 78년 전 미드웨이 해전에서 그랬듯이,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서도 일본은 허둥대고 있다. 우리는 원래 쌓아 놓은 기반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빨리빨리'의 기질이 시대에 잘 부합해서 그런지 비교적 선방하고 있는 것 같다. 


기업도 그렇다. 현재 우리나라 LCD가 중국에 밀려서 올해를 기점으로 거의 접는 분위기이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LCD의 대형화를 선도해서 TV로 만드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중국이 10세대 이상 라인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면서 가격 인하를 주도하자 우리 디스플레이 기업의 적자가 커지고 있다. 여기서 LG 디스플레이와 삼성 디스플레이는 재빨리 OLED 및 QD-OLED 등의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옮겨가려는 전략을 보여주고 있는데, 올바른 방향일 것이다. 삼성전자만 해도 DRAM의 성공에만 안주하지 않고 플래시 메모리, 시스템 반도체 등을 계속해서 주력 제품으로 추가하는 역동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업은 그렇다 치고, 개인인 나는 고정관념을 갖지 말고 유연한 사고를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나이 먹으면서 계속해서 유연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생물학적으로도 그렇다. 그래도 마음가짐만이라도 겸손히, 유연히 하고자 노력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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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20년 Q1) DRAM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우리나라가 73.4%(삼성 44.1%, 하이닉스 29.3%), 미국(마이크론)이 20.8%이다.

[2] 엘피다는 2012년에 파산 신청을 했고, 그 다음 해 미국의 마이크론에게 인수 당했다. 지금은 마이크론의 자회사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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