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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생각은 받아들이는 힘에서 온다 - 시인의 마음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표현하기 ㅣ 아우름 7
김용택 지음 / 샘터사 / 2015년 12월
평점 :
섬진강 시인...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또 어른이 되어 임실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연에서 느끼는 감성을 고스란히 시로 표현한 김용택 시인이다. 문학의 중심지인 서울에서의 활동이 없는 상황에서도 김용택 시인의 독자층은 꾸준히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짧은 글귀로 압축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시의 특성상 모더니즘이나 민중문학의 표현에 앞장서는 것이 그것이지만, 김용택 시인은 그러안 이슈적인 면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김용택 시인이 그렇게 활동하지 않아도 독자들에게 각인되는 가장 큰 이유는 태어나서 자라고 일하던 곳의 자연 이야기를 묵묵하게 쓰기 때문일 것이다. 시골의 넉넉함과 풍요로움, 때론 겪어보고 싶은 체험을 글을 통해서 전달받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김용택 시인이 이번에는 시가 아닌 담담한 글로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샘터의 '아우름 시리즈'를 통해서 읽게 되는 <새로운 생각은 받아들이는 힘에서 온다>라는 책이다.
알려진 대로 샘터의 '아우름 시리즈'는 각계각층의 명사들이 다음 세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색으로, 또는 저자들이 경험했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속에서 느꼈던 지혜를 두루두루 이야기하는 책이다.
인생의 선배가 들려주는 말이기도 하고, 작가의 작품성을 염두에 두는 것보다는 소통이라는 주제를 놓고 독자들에게 편하게 이야기하는 책이다.
읽어 내려가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편안한 글도 좋고, 저자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좋은 것이 바로 '아우름 시리즈'인 것 같다.
<새로운 생각은 받아들이는 힘에서 온다>
제목만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뭐랄까... 틀에 박힌 이야기만 들려줄 것 같지만, 전혀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글은 아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대로의 것이 나의 생각이 되고, 나의 힘이 된다..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아시다시피 김용택 시인의 글 속에는 시골에서 자라고, 경험하고, 아이들과 함께 생활한 이야기가 있다. 서두름 없이 천천히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나무며 구름이며 하늘이 참 환하게 다가오는 그런 들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소낙비가 내린 후에 거미줄에 맺힌 빗방울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늘 콩콩 밟고 건너뛰는 도랑의 디딤돌도 이야기도 있다.
시인은 모든 것을 천천히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그 모습을 글로 남기고 독자들은 그 글을 통해서 자연이라는 것을, 그리고 바쁨이라는 생활 속에서 잊고 있던 파란 하늘을, 싱그러운 시골의 공기 냄새를 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할 것은 그 자연 속에서 삶의 모든 것을 깨우치는 지혜를 저자도 얻고, 독자도 얻게 된다는 점이다.
간혹 도심 생활은 너무도 바쁘게 경쟁 속에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자연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자연에 눈을 돌리는 자체가 여유 있는 삶의 하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모두 여유가 없다.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면서, 도심 속에서 살아가면서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인의 말처럼 억지로 보라는 것이 아니라 매일 내 눈에 스치는 모든 것을 찬찬히 들여다봄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매일 똑같이 다니던 골목길에서 우연히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그 어떤 날 유독 파란 하늘이 각인될 때의 느낌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잠시 그 하늘의 색에 취해서 아무 동요가 일어나지 않던 그 잔잔함을 말이다.
시인이 말하는 자연을 들여다보고, 주변을 찬찬히 들여다본다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파란 하늘 때문에 속이 후련했다...라던가, 파란 하늘을 보니까 웃음이 저절로 피어난다 하던가 등의 내 감정을 표현해 본 적이 있는가 떠올려보게 된다.
이 책의 부제가 <시인의 마음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표현하기>이다.
그만큼 표현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 역시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 우리의 학창시절에는 글자 하나하나 정성 들여 쓰는 일이 많았다. 수업시간에 줄기 장창 써 내려가던 필기부터 가슴 설레던 첫사랑과의 소식도 예쁜 편지지에 꼭꼭 눌러 적어 보냈었다. 조금 더 발전하고 글에 자신이 있는 친구들이라면 심야 라디오 방송에 사연을 보내고 읽히기를 애타게 기다리기도 했다.
비록 솜씨는 부족했을는지 몰라도 모든 것을 글로 썼고, 글 속에서 표현이 되었던 그때가 있다.
그런데 요즘의 주변 모습을 그렇지가 않다. 출근길에 보면 애어른 할 것 없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오히려 책을 읽고 나서는 사람이 귀한 정도이기도 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 시대 속에서 사는 아이들은 속도전에서는 무척 빠르다. 지구 곳곳의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알려지는 시대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눈으로 보고 바로 인식되는 이 방법 때문에 내 속에 있는 감정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는 것이 생각해 볼 문제라는 것이다.
싫다 좋다, 다르다 틀리다에 대해서 각자의 의견을 생각하고 정리할 시간도 없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내가 가진 정보를 날리고 있는 동시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의견을 말하기 전에 전하는 이의 감정을 그대로 인식하고 또 다른 곳으로 날려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인문학이 강풍처럼 다가온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문학을 듣는 청년들이 과연 인문학을 이해하고 싶어서 듣는지, 아니면 또 다른 스펙을 위해서 듣는지 모르겠다. 그 어려운 책에 대해서 열심히 듣고 본 이들에게 그것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라고 한다면 거의 태반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자세히 보아야 생각이 일어난다.
무엇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도 우선이겠지만, 그 과정에 있는 것을 찬찬히 들여다볼 여유는 어떨까?
시인은 가르치던 올망졸망한 아이들에게 자기 나무를 정하게 했다 그리고 매일 '네 나무는 뭐하고 있대?'라고 물어본다. 몇 번을 보라고 하고 물어봐도 그냥 '나무가 있다'라고 말하던 아이들이 어느 날은 나무 아래 할아버지들이 있고, 냇물이 있고, 하늘이 있다는 것을 말했단다.
매일 똑같은 자리에 있던 나무의 존재도 기억하지 못하던 것이 그 자리에 나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좀 더 들여다보고 천천히 보니까 나무 옆에 시냇물이 있고, 나무 그늘에서 할아버지들이 한가로이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이라는 것이 그렇다.
내가 뭘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계획은 거창하다. 하지만 그것을 이루는 것은 매일 조금씩 나를 보고 주변을 보고, 세상을 보는 힘 때문에 결론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하고 싶다.
시인이 독자들에게, 특히 다음 세대들에게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런 시야를 갖기 원함이 아닐까?
책을 읽고, 글을 읽고, 글을 쓰고, 나를 표현하는 것.
이것이 내 생각을 정리하게 되고, 정리한 생각에 또 다른 생각이 겹쳐지는 것
이것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
어느 날 뚝 떨어지는 삶의 지혜는 없다. 인생의 깊이는 없다.
어떤 일이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 그래서 내가 잘하게 되는 것.
이것이 삶의 의미이고 인생의 목표가 아닐는지.
그렇게 생각을 해본다.